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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알까기 인형’으로 불리는 마트료시카 목각 인형은 우크라이나에서 관광 기념품 부동의 1위다. 인형 안에 크기가 작은 똑같은 인형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인이 그려져 있는 것이 기본이지만, 대통령 등 유명인이 그려진 변형도 있다. 지난 여름 키예프에서는 유셴코를 열면 티모셴코가 나오는 마트료시카가 유행이었다. 그 안에 모로즈 사회주의당 당수(국회의장)와 야누코비치 총리가 들어있다. 맨 마지막에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나온다. |
“한국과 우크라이나가 가까워지려면 비행기 직항로부터 뚫어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갔다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말이다. 수도 키예프가 관광지로만 해도 기가 막힌 곳인데, 교통이 불편해서 엄두가 안 난다는 이야기다. 바로 날아가면 8시간 안팎이면 될 거리를 모스크바나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야 하니까, 그런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어쨌든 보리스필 공항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40분 정도 걸려서 도착한 고도(古都) 키예프는 첫눈에 홀딱 빠져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도심 한복판을 가르는 드네프르 강은 서울의 한강을 능가하는 웅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주중의 한낮인 데도 시민들이 강변 여기저기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키예프국립대의 김석원 교수는 “도시 전체가 큰 공원이고 박물관이며 식물원이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이었다. 시내 한복판에는 파리를 연상케 하는 고풍의 건축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키예프도 더 이상 조용하고 아름답기만 한 고도의 자태를 마냥 누릴 순 없게 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사방에서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심 주변에는 곳곳에서 건설 붐을 반영하듯 크고 작은 신도시가 펼쳐져 있다.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수십 층짜리 오피스 건물이 여기저기서 올라가고 있는데 대부분 선분양이 끝났다고 했다. 서울 강남의 주상복합식 고급 아파트도 보이고 제법 빌딩 숲의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방크(Bank)’ 등의 은행 광고, 전자제품 광고들이 여기저기 요란하게 붙어 있다. 옛 소련시대를 뒤로하고 경제개발의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도시풍경의 변화 단면들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지난 15년 동안 12개 독립국가연합(CIS) 나라 가운데 경제 성적표가 비교적 우수한 편에 속했다. 1999~2004년까지는 연평균 9%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왔으니 말이다.
박물관 같은 도시 키예프 그랬던 것이 지난해 성장률은 2.6%로 꺾였다. 더구나 물가는 다락같이 올랐다. 소득증대는 신통찮은데, 기름값 인상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물가 때문에 못 살겠다”며 경제실정에 대한 불만이 목에 차 있었다. 휘발유값은 2년 새 30%나 올라 5그리브나(약 1달러)가 넘는다. 공공요금도 마찬가지다. 키예프~도네츠크 간 철도 요금은 올해만 두 번 올라 지금은 200그리브나(약 40달러)가 넘는다. 무엇 때문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공통 답변은 “정치 탓”이었다. 잠시 정치상황을 돌이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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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혁명 2주년 기념식. |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이 2004년 12월 이른바 ‘오렌지 혁명’을 통해 집권한 것은 세계적 뉴스였다. 유셴코는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를 등지고 노골적으로 친(親)서방 정책을 선언했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유럽 식구’에 편입시키겠다는 복안이었다. 러시아한테 밉보이는 걸 각오하고서 소위 민주화·서방화의 노선을 분명하게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유셴코의 개혁정책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인사부터 말썽이었다. 그를 지지했던 학생운동세력 ‘포라(pоrа)’를 주도했던 인물, 한국으로 치면 386세대가 청소년부 장관(유리 파블렌코)이 된 것을 비롯해 오렌지 혁명에 뒷돈을 댄 젊은 실업가들이 대거 경제부처를 장악했다. 이로 인해 30대 초반의 권력자들이 수두룩해졌다. 키예프에서 만난 야로슬라브 아르시리 조달청장도 31세에 불과했다. 젊은 나이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다는 누구누구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시민들의 불만이었다. 17세밖에 안 된 대통령의 아들이 외제차를 굴리며 한 달이 멀다 하고 구설에 오르고 있는 것도 우크라이나의 정치 현실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썩은 오렌지’ 혁명이라는 비아냥도 그래서 나도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친서방 정책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당초 도네츠크·드네프로페트롭스크 등 남동부 공업지역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국가로 성립된 것은 8~9세기로 보지만 사실 우크라이나는 16세기 이후 동과 서로 분단돼 있었다. <상자기사 참조> 동쪽은 러시아, 서쪽은 유럽 국가들의 소유였다.
빅토르 유셴코는… 1954년 우크라이나 북동부 수미주(州)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테르노폴 경제금융대학을 나와 러시아은행에 근무하다 88년 키예프 아그로산업은행 부행장, 93년 신설된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높은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화폐를 도입하는 등 우크라이나 경제개혁을 이끌었고 99년 말 레오니트 쿠치마에 의해 총리로 발탁됐다. 2002년 우리우크라이나당을 창당해 최고의 인기 정치인으로 떠올랐으며, 2004년 말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3차 결선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경쟁 끝에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올랐다. |
그것도 400년이 넘는 기간이었으니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서쪽 지방은 우크라이나어를, 동쪽 지방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서쪽엔 지천에 사탕무·감자 밭이 깔려 있고, 동쪽은 광산과 제철소 천지다. 서쪽에 가면 카페가 많고, 동쪽 사람들은 술과 마약을 더 즐긴다. 경제 전문가든, 언론인이든, 아니면 택시기사든 우크라이나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동·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심지어 나라를 쪼개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우리나라 영·호남 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셈이다. 서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유셴코는 동부에서는 국가원수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다. 도네츠크에서 만난 코토바 나탈리아는 “유셴코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첫째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우크라이나어 교재만 쓰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이제껏 러시아어만 써왔는데….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것과 다름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런 불만의 결과가 지난번 선거라고 했다. 집권여당인 우리우크라이나당은 지난 3·26 국회의원 선거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지역당, 율리야 티모셴코의 티모셴코블록에 밀려 제3당으로 추락한 것이다. 오렌지 혁명의 파트너였던 티모셴코와 연정을 구상했으나 이것마저 불발됐다. 2004년 대선 당시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격돌했던 야누코비치가 사회당(제4당)의 알렉산드르 모로즈와 손을 잡은 것이다. 국회의장 자리를 약속받은 사회당수 모로즈는 야누코비치를 총리에 앉히라고 대통령을 압박했다. 유셴코 대통령은 결국 정적(政敵)을 총리에 앉히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정말이지 뚜껑을 열면 열수록 작은 인형이 나오는 ‘마트료시카’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우크라이나의 정치구조다.
키예프 시내의 ‘깃발 부대’ 데모는 오렌지 혁명 이후 이젠 일상적인 풍경의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서울의 풍경과 다른 점은 시위도 조용하고 진압경찰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회의사당 앞에선 지역당 지지자들이, 1㎞쯤 떨어진 독립광장 위에선 티모셴코블록 당원들이, 그 사이에선 유셴코 지지자들이 전국에서 올라와 며칠씩 노숙을 해가며 ‘상경 시위’를 하고 있었다. 족히 수천 명은 되는 이들은 각각 ‘파란색+노란색(지역당)’ ‘흰색(티모셴코블록)’ ‘오렌지색(우리우크라이나당)’ 깃발을 흔들어댔다. 일당을 받고 움직이는 동원부대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올해 4월 신헌법 발효로 우크라이나는 독특한 형태의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정부 수반은 국무총리다. 대통령은 외무장관·국방장관·국가정보원장만 임명 제청할 수 있다. 총리는 주지사를 포함해 나머지 각료를 지명할 수 있다. ‘실세 총리’라 함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이야기다. ‘유셴코-야누코비치 연정’이 얼마나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지가 주목거리다. 9월 14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방문한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와 EU 간의 협력지향서와 WTO 가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지기반과 노선이 다른 이들의 결합은 아무리 봉합해도 터지게 마련. 야누코비치는 틈날 때마다 “EU나 NATO 가입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러시아와의 관계 회복이 먼저다”며 자기 목소리를 냈다. 최근엔 보리스 타라슈크 외무장관을 경질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외무장관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에게 임면 권한이 있다. 유셴코가 발끈한 것은 물론이다. 서로 발목을 잡는 대통령과 총리 때문에 키예프에서는 정치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나라를 쪼개자” 정치가 이러니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유럽 최저인 2%대의 경제성장률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외풍까지 악재로 작용했다. 주요 수출품목인 철강재 가격이 낮아져 국제수지에 노란불이 켜졌다. 연초엔 러시아의 가스값 인상으로 공공요금·연료비 등이 30% 이상 오른 상태다. 우크라이나는 이대로 주저앉는 것인가. 지금의 혼란이나 고전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국외국어대 박정호 교수(러시아연구소장)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나라”라고 말한다. 우선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서쪽엔 폴란드와 루마니아, 동쪽에는 러시아가 버티고 있다. 유럽은 러시아로, 러시아는 유럽으로 가는 관문 같은 나라가 우크라이나다.
절대 놓쳐선 안 될 나라 경제적으로도 요충지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나가는 천연가스관의 80%가 우크라이나에 집중돼 있다. 연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가는 가스관을 봉쇄했을 때 EU 국가들의 반발을 기억하면 그 가치를 쉽게 따져볼 수 있다. 흑해는 또한 카스피해의 에너지가 마지막 지나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러시아로서도 유셴코의 친서방 정책은 간단치 않은 문제다. 흑해 연안에 있는 세바스토폴 항 같은 경우는 현안 중의 현안이다. 수심이 깊어 러시아 흑해 함대의 모항으로 불리는 세바스토폴은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정책으로 돌아설 경우 ‘고립무원’이 될 수 있다.
 | ▶독립국가연합 정상회담. | |
“자리 잡고 있는 민감한 지리적 위치, 그리고 주변의 더 막강한 지정전략적 게임 참가자들의 행동 결과에 따라 그 국가가 지니는 중요성이 더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주장은 우크라이나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흑해 위에 올려진 흑진주 같은 나라”(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라는 평가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산업 경쟁력도 대단하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 ‘지식탱크’라고 불릴 만큼 지적 자원이 풍부한 국가로 꼽힌다. 정부 지원이 줄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도 항공우주산업 분야에서는 세계 7~8위권 국가로 꼽힌다. 99년부터 우크라이나와 기초 과학기술 교류를 추진하고 있는 이상목 한·유라시아 산업기술센터장은 “우크라이나 역사에서는 ‘쓰라린 기억’인 체르노빌 원전 사고도 우리에겐 기술 배움터”라고 말한다. 원전 사고 처치 노하우, 대형 산불 방재 시스템 등 배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흥시장으로서도 다시 봐야 할 나라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 중공업·군수산업 및 농업 위주의 산업구조로 인해 소비재 산업이 대단히 취약하다. 가전제품 가운데는 냉장고 정도밖에 만들지 못한다. 제조업이 이처럼 약하다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해외투자 진출의 기회가 그만큼 크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가 아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투자를 조심하고 있다. 컨트리 리스크를 우려해서다. 그래서일까? 지난 10월 22일 20여 명의 비즈니스 대표단을 대동하고 서울을 찾은 미하일로프 블라디미르 우크라이나 국제상업회의소(ICC) 수석부회장의 발언은 초겨울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다.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한국 기업과 합작해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투자 유치를 희망하지만 일단 관심부터 보여줬으면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어떤 나라 위치 러시아~동유럽 사이, 유럽의 지리적 중심, 러시아·벨로루시·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 등과 인접
면적 60만3700㎢ (한반도의 약 2.7배)
인구 4671만 명 (2006년 7월)
수도 키예프 (261만 명)
주요 도시 하리코프 (147만 명), 드네프로페트롭스크 (106만 명), 오데사 (103만 명), 도네츠크 (101만 명), 리보프 (74만 명)
종교 정교, 기독교
언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기후 온화한 대륙성 기후
기온 겨울 -12~-8℃, 여름 18~25℃, 최고기온 35℃ 이상
지형 국토의 95%가 평지, 60%가 비옥한 흑토지대
정치체제 공화국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 빅토르 유셴코 (2005년 1월 23일 취임)
지방정부 24개 주 및 크리미아 자치공화국
의회 지역당 186, 티모셴코블록 129, 우리우크라이나당 81, 사회주의자당 33, 공산당 21
GDP 751억 달러 (2005년, 공식 통계), 3404억 달러 (CIA, 2005년, 구매력 기준), 3300억 달러 (IMF, 2005년)
1인당 GDP 1747달러, 7200달러 (CIA, 구매력 기준)
수출 382억 달러 (2005년)
수입 372억 달러 (2005년)
주요 자원 철광석·석탄·티타늄·흑연·마그네슘·목재 등
주요 산업 철강·기계·비철금속·화학·항공우주산업 등
월평균 임금 864.9그리브나(약 172달러)
화폐 그리브나(hryvnya), 1달러=5.05그리브나 |
길고 긴 고난의 역사 |
‘잃어버린 800년’ 축복인가, 재앙인가? 한반도의 세 배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 그것도 세계 최고의 옥토를 보유한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아시아 강호들에게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우크라이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대 정착민의 역사는 기원전 3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고트족·훈족·불가리아인들이 우크라이나 영토에 출현했다. 국가 형태가 처음 나타난 것은 8~9세기에 형성된 키예프 루시(Kyiv Rus)다. 이 시기 슬라브족이 형성되고 이후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키예프 루시는 기독교를 수용(988년)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강성한 세력을 누리게 된다. 12세기 초반까지 봉건국가로 발전하던 키예프 루시는 1223년부터 세 차례에 걸친 몽골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만다. 이때부터 8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비옥한 땅의 ‘주인’이 된 적이 거의 없다. 몽골에 200여 년간 지배를 당하더니 14세기 중반에는 리투아니아·폴란드·터키·몰도바에 의해 분할되는 수모를 겪는다. 1569년엔 폴란드·리투아니아 합병으로 드네프르 강 서안이 폴란드에 귀속됐다. 이후 폴란드의 해체(1772년)에 따라 나라가 갈가리 찢겨 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됐다. 소련에 흡수된 것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창설 조약에 서명하면서부터다. 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발표되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91년 8월 24일 독립선언문을 채택했다. 같은 해 12월 1일 레오니트 크라브추크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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