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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관료들 사기만 꺾었다

경제 관료들 사기만 꺾었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중국 오경(五經) 중 하나인 ‘예기(禮記)’의 ‘단궁하편(檀弓下篇)’에 나오는 고사성어다. 고사성어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태산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어느 한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지난해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먹혔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 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잘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다소 지나친 비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론스타 수사를 지켜보는 경제관료들의 눈에는 검찰이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특히 외환은행 매각의 주무부처였던 재정경제부의 분위기는 허탈감을 넘어 무력감까지 배어나고 있다. 외환은행 매각이라는 ‘정책결정’에 대해 검찰은 편집증적이다 할 정도로 칼끝을 겨누고 있고, 여론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약 또다시 외환은행 매각과 같은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누가 감히 총대를 멜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표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호랑이에게 물려갈지언정 어떠한 정책 결정도 내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경제관료들 사이에 팽배하다. 아무 일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검찰의 부름은 피할 수 있다는 냉소적 분위기가 깔려있다. 행정고시 19회에 수석으로 합격한 뒤 차기 재경부 장·차관으로까지 거론되던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그에 대한 검찰의 집요한(?) 수사를 지켜보는 경제관료들은 너나없이 등골이 서늘하다고 말한다. 재경부 관료의 상징으로까지 거론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국부를 빼돌린 주범으로 매도되는 까닭이다. 여기에다 재경부의 최고 수장이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까지 검찰에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면서 느끼는 무력감은 더 크다. 정부 고위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용두사미 된 중수부 수사 “요즘 후배들 보기가 민망하다. 후배들에게 일을 시킬 수도 없다. 중요한 일을 시켰다가 나중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지나? 그래서 대놓고 ‘너희가 알아서 몸조심하라’고 말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것처럼 튀다간 죽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래도 재경부 관료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본인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 그런데 잘나가던 선배가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겠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관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한다. 이렇게 경제관료들을 범죄 집단으로 몰아붙여 과연 무슨 이득이 있는지 회의가 든다.” 그는 “특수부가 몇 개월 이상 털었는데 변 전 국장의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면 혐의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며 “검찰이 저렇게까지 무리하게 몰아붙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현재로선 9개월 가량 끌어온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수사가 이헌재 전 장관을 참고인으로 조사하는 선에서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수사는 용두사미가 된 꼴이다. 검찰은 외환은행 헐값 매각의 핵심인물이라고 판단했던 변 전 국장의 구속영장이 두 번이나 기각되는 수모를 겪었다. 론스타 임원진에 대한 영장발부 여부를 놓고 법원과 여러 차례 대립각도 세웠다. 검찰의 체면이 이미 여러 차례 구겨진 것이다. 더구나 이번 수사는 최고의 검사들이 모였다는 대검 중수부가 맡았다. 그런데도 의혹만 잔뜩 부풀린 채 별다른 수사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검찰이 여론에 밀려 법리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 채 여론몰이에 앞장섰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금까지 상황을 봤을 때 법원의 판단 여부에 따라 검찰은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검찰의 지나친 수사관행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다. 론스타보다 더 큰 파장을 몰고 왔던 미국의 엔론 사태의 경우 미국 검찰은 보석금을 받은 뒤 불구속 수사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검찰은 구속수사가 ‘전가의 보도’인 것처럼 구속 여부에 사활을 걸었다. 한 외국계 금융기관 관계자는 “검찰이 혐의를 밝혀낼 자신이 있다면 구속 여부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느냐”며 “인신 구속을 해야만 혐의를 입증할 수 있다는 낡은 수사관행을 검찰 스스로 깨고 합리적이고 자료에 근거한 수사를 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론스타 사건만 놓고 보면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으로 등장한 검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재경부 관료들은 검찰 권력에 무기력하기만 한 자신들의 경제권력(?)에 대해 자괴감마저 느끼고 있는 분위기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검찰이 무리하게 론스타 수사를 밀어붙이는 모양새만 보면 꼭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기관차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라며 “검찰 권력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관료들 입장에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외신들의 부정적인 시각이 아니더라도 검찰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수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며 “결과를 정해놓고 하는 수사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법원서 법리 다툼 치열할 듯 외환은행을 매각할 당시 정책적 판단을 검찰이 충분히 감안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검찰은 변 전 국장이 사실상 매각을 지휘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검찰은 당시 장관이 주무 국장의 보고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지난 3월 스타타워에 위치한 론스타코리아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장면.

그렇지만 변 전 국장은 영장 실질 심사에서 “우리나라 행정 시스템을 뭘로 보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변 전 국장은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청와대에 매각 상황을 보고했기 때문에 일개 국장이 단독으로 매각을 추진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항변했다. 이 때문에 검찰이 정책결정 과정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편의적으로 재단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일부에서는 검찰 수사가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놔라’는 식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외환은행을 매각할 당시 재경부는 국내외 대부분 금융기관에 인수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한 곳도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론스타로 매각을 결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외환은행 인수 의사를 타진 받았던 한 외국계 금융기관 관계자는 “우리뿐만 아니라 국내외 금융기관 중 인수 여력이 있는 웬만한 금융기관에는 의사를 물어본 것으로 안다”며 “론스타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론스타 입장에서도 리스크를 감안하고 투자를 감행한 것인데 사후에 투자이익을 많이 가져간다고 문제를 삼는다면 누가 리스크를 안고 투자하겠느냐”고 전했다. 검찰이 재경부의 수뇌부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제관료들의 사기만 꺾어 놨다는 분위기도 있다. 무너진 경제 관료의 자존심이 쉽게 치유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의 아니게 재경부 내 ‘복지부동’ 분위기가 조성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결론이 어떻게 나더라도 론스타는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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