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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욱(CW)의 Challenge & Win 1946년 경북 상주 출생. 상주고와 영남대 법학과를 나왔다. 72년 삼성물산 인사과에 입사해 삼성-GE의료기기 대표이사 등을 거쳐 2007년 2월 GE헬스케어 아시아 성장시장 총괄 사장을 맡았다. 대학 때 학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를 하고 돈 때문에 베트남 파병을 지원했다. 상주 사투리를 쓰는 지방 출신 촌놈의 성공 키워드는 ‘성실’과 ‘겸손’. 리더에게 카리스마는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직원들이 웃으면서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게 바로 이채욱 사장의 카리스마다. | |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 다니면 도둑놈)’란 말이 유행한 지도 이제 10년 가까이 된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이런 유행어가 등장했다. 이제 직장인은 누구나 40대 중반만 되면 엉덩이를 약간 들고 있다. 꾹 눌러앉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채욱 ‘GE헬스케어 아시아 성장시장’ 사장은 행복한 사람이다. 올해 환갑도 맞고 새로운 직장과 임무도 맡았기 때문이다. 전깃불도 없는 산골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대학까지 마친 그는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CEO에 올랐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는 GE에서 아시아 성장시장을 총괄하는 자리다. 이채욱을 만든 결단의 순간은 무엇일까?
1980년 봄 부산의 감천만 앞. 이채욱 삼성물산 과장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둥둥 떠 있어야 할 배들이 뜻밖의 해일로 감천만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72년 삼성물산에 입사한 이채욱은 특유의 성실성과 아이디어로 초년 과장 시절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80년 이채욱은 미국 출장 중 낡은 선박에서 고철을 분리해 철강회사에 판매하는 ‘고선박 해체사업’을 보고 이를 한국에서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은 미국에 비해 인건비도 저렴하니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게 아닌가!’ 이 과장은 귀국하자마자 경영진을 설득해 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산 감천만에 정박해 두었던 배들이 갑자기 몰아닥친 해일로 모두 바닷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당장 수십억원의 손실을 회사에 안기게 됐다. “아무도 예상 못 했어요. 보험회사도 그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고 했죠. 물론 보험도 안 들었고요. 그때 회사 자본금의 3분의 1에 달하는 40억원이 날아간 거죠.” 일개 과장이 회사를 휘청하게 했으니 내놓은 목이었다. “일단 사표는 썼죠. 회사에 너무 미안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내 처신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 과장의 부하 직원이었던 홍모 대리는 감천만 부두에서 이채욱을 만나자 울어버리고 말았다. 옆에 있던 또 다른 대리도 눈물을 보였다. “그때는 삼성물산 과장이면 그래도 책임감이 있었어요. 요새 과장들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우선 ‘이 사태를 수습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는 사표를 서랍 속에 일단 넣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내고 현장을 지휘해 왔던 자신이 떠나면 사태 수습은 더 늦어질 것 같았다. 이채욱의 인생에서 첫 번째 분수령은 다시 바다로 달려간 바로 이날이다. “회사 돈 축냈으면 벌어 놓고 나가” 그때부터 꼬박 1년 반 동안 그는 감천만 부두에서 살았다. 부두 근처에 하숙집을 얻어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수천t에 이르는 대형 선박을 수중에서 50t 단위로 잘라 크레인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 작업에는 삼청교육대까지 동원됐다. 수중에서 용접하는 기술자들도 달려들었다. 바다에서 거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막걸리를 밤마다 대접했다. 인양작업이 마무리된 81년 9월 이 과장은 정신이 돌아왔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사표를 꺼내 인사과에 제출했다. 사표를 내고 대치동 청실 아파트에 와서 누웠다. 3일 동안 밤낮으로 잠만 잤다. “그때 해방감이란 말로 다 못해요. 정말 편했어요.” 3일 뒤 인사과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에 일단 나오라고 했다. 주영석 부사장이 이채욱 과장을 방으로 불렀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사표를 내밀며 한마디 던졌다. “어이, 회사 돈 축냈으면 벌어놓고 나가야 될 것 아니야!” 사고를 친 그에게 회사는 해외지사 발령으로 배려해줬다. 두바이 지사로 나간 그는 4년간 한국에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국으로 들어올 때는 해외사업부장이라는 요직을 맡겼다. 하지만 요직도 잠시. 회사는 다시 그에게 ‘고선박 해체’와 비슷한 일을 맡긴다. 84년 삼성이 GE와 합작회사로 의료기기 회사를 세운다. 한국 최고의 회사와 세계 최고의 회사가 힘을 합쳤지만 이 회사는 ‘적자 제조기’였다. 89년 이채욱 삼성-GE의료기기 사장이 부임했을 때 공장 가동률은 고작 27%에 불과했다. 그가 부임한 목적도 ‘패전 처리용’이었다. 회사는 이채욱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줬다. “가서 상황 보고 문 닫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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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헬스케어 아시아 성장시장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헬스케어 사업은 첨단 의료기술을 이용해 한 단계 앞선 환자 관리 시스템을 개발하는 140억 달러 규모의 사업군이다. 의료 영상, 의료 진단, 환자 모니터링 시스템, 질병 연구, 신약 발견, 바이오 제약 분야를 통해 조기 질병 발견과 개인 맞춤치료를 제공한다. 아시아 성장시장은 싱가포르에 본부를 두고 한국·인도·남아시아·동남아시아·호주 및 뉴질랜드 등 아시아 17개 국가에서 헬스케어 사업을 추진한다. 이채욱 신임 사장은 2800여 명의 직원과 함께 GE의 첨단 의료장비 생산·판매·서비스를 총괄하게 된다. | |
이 사장은 가자마자 회사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공장도 팔고, 땅 팔고, 설비도 다 팔았다. 100명 정도 구조조정을 해 삼성그룹의 다른 회사로 보냈다. 세일즈·마케팅·서비스만 남겨 최소 비용으로 비즈니스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하는데 딱 1년 걸렸다. 이 사장은 내심 ‘이제 본사로 돌아가면 더 좋은 자리를 주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엉뚱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구조조정을 한 당신이 회사를 맡으시오.” 법대를 졸업한 그가 의료기기를 알 턱이 없다. 게다가 7년간 적자를 기록한 회사다. 이 사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맡기 싫었다”고 했다. 하지만 삼성에서 계속 일해 뭔가를 이뤄보고 싶었기 때문에 사표를 낼 수는 없었다. 먼젓번에는 회사가 그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회사를 잡았다. 두 번째 결단의 순간이다. 사장으로 부임한 후 백지를 책상에 올렸다. 회사의 나쁜 점은 수없이 봤고, 들었으니 이제 좋은 점을 하나씩 기록해 봤다. “그게 백지와의 대화입니다. 참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백지를 갖다놓고 희망적인 점, 좋은 점을 하나씩 적으니 점점 기분도 좋아지고, 희망도 보이더군요.” 하지만 시선은 싸늘했다. 명색이 계열사 사장이었지만 그룹의 동기들은 오히려 이 사장을 측은하게 봤다. 부장, 이사들이 오히려 사장을 측은하게 봤다. “야, 그 조그만 회사, 그거 표도 안 나는 회사 뭐 그렇게 열심히 하냐?” 이 사장은 백지와의 대화를 친구들에게 옮겼다. “너희는 겨우 상인들 만나고 다니지만 나는 박사, 의사 만나고 다닌다.” “너희는 TV 팔아봐야 하나에 30만원이지만 내가 파는 MRI는 하나에 30억원이다.” “너희는 그저 그런 물건이나 만들고 팔지만 나는 세계 최첨단 기계를 판다.” “부장, 이사가 보는 회사와 사장이 보는 회사는 다르다.”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이 사장은 “그때 내가 실망하고 회사를 떠났으면 오늘날 GE의 이채욱은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6년간 연평균 45% 성장 기록 백지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최면을 건 이 사장이 회사를 맡은 6년간 연평균 45%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그에게 매료된 프레스코 GE 부회장은 96년 이건희 회장에게 “CW(이채욱 회장의 영문 이니셜)를 놔주거나(release), 몇 년간 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이 사장은 96년부터 GE메디컬 아시아 사장에 부임해 외환위기 와중에서도 시장점유율을 6위에서 1위로 끌어올렸다. 이후 그는 아예 GE로 회사를 옮겼고, GE코리아 회장을 거쳐 지난 2월 1일부로 GE헬스케어 아시아 성장시장 사장으로 부임했다. 중국·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와 호주를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CEO가 됐다. 두 번의 큰 고비를 넘은 그에게 드디어 기분 좋은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사장은 이번에도 결정에 앞서 자신과 대화를 했다. 첫째, 이 비즈니스에서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둘째, 내가 가서 기여할 수 있고, 즐겁게 일할 수 있나. 셋째, 팀들이 나를 반길 것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마음속으로 ‘yes’를 외쳤다. 환갑인 이채욱의 이번 도전이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일까? 이 사장은 “이 나이에 더 무슨 승진을 바라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회사가 그를 다시 잡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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