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정치의 리더십 찾아야”
“실종된 정치의 리더십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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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가장 시급한 것=정치 지도자의 리더십 회복 ■ 부동산 문제 해결 방안=단편 정책 아닌 ‘정책군(群)’으로 대응 ■ 한·미 FTA 협정=협상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손해 ■ 국가의 흥망 결정 요인=그 나라 문화 수준 ■ 다음 대통령 필수 요건=국민의 신뢰 |
문화가 나라의 성쇠 판가름 사회가 흐트러진 게 정치인들이 민심을 잘못 읽어서인가요, 아니면 국민이 잘못 생각하고 행동해서인가요? “어느 나라든 경제가 굴러가는 것을 보면 그 나라 문화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일본 경제에는 일본인의 장인(匠人)정신이, 중국 경제에는 중국인의 장사 기질이 반영돼 있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예요. ‘빨리빨리’ 문화가 반영돼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문화, 그 나라의 성품이 국가의 성쇠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점은 그 문화에 장·단점이 있다는 겁니다. 나라 운영이 잘 될 때는 장점이 돋보이고, 안 될 때는 단점이 많이 나타나죠. 장점을 많이 살리고 단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게 제대로 된 정치적 리더십입니다.”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어 우리의 단점이 자꾸 드러난다는 말씀이지요? “멀리 조선시대까지 갈 것 없이 광복 이후 우리가 쌓아온 문화 중 단점이 요즘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를테면 자꾸 분열하는 것입니다. 여야(與野)가 다를 뿐 아니라 여권 안에서도 분열하고, 야당 안에서도 나뉘어 갈등을 일으킵니다. 국민도 분열돼 있긴 마찬가지고요.” 지난 4년 참여정부의 정책 방향이나 추진 과정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참여정부만 일방적으로 잘못이라고 할 순 없지요. 정권을 넘긴 게 국민 아닙니까? 말하자면 기성세대, 우익이 잘못했기 때문이지요. 공동 책임인데, 리더니까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게지요. 참여정부는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정권을 맡았어요. 정권을 잡고나서라도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세계 정세 등을 연구해 대책을 세워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고…. 방향 자체를 잡지 못한 채 4년이 흘러간 겁니다. 국가 장래에 대한 비전이 확실하지 않은데 경제와 정권의 운영 전략인들 제대로 세웠겠어요. 전략이 있어야 전술도 나오는 법인데, 결국 그 전술이 앞뒤가 맞지 않게 돼버렸고…. 동정하는 게 아니라 솔직히 아쉽습니다. 젊은 386세대가 성공해주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애를 썼지만 성과는 나지 않고, 이제 바둑으로 치면 끝내기 단계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한 집안으로 볼 때도 젊은이가 잘해야 집안이 융성하는데, 잘한다고 했지만 나중에 하는 것 보니 어른들 모방만 했지 나은 게 없는 그런 상황 아닙니까?” 대세야 뒤집기 어렵겠지만 바둑에서 끝내기가 중요한데, 참여정부가 남은 임기에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바둑 한 수가 열댓 집을 좌우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잘 둬도 댓 집 왔다갔다 하는 겝니다. 더구나 마무리 단계에선 한 집 움직이기도 힘들고요. 정권이 지금 끝내기 단계인데 개헌이나 한·미 FTA 협상처럼 포석 구상을 해선 곤란합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말라가는데 씨를 뿌리는 격이에요. 지금 개헌과 FTA를 추진하는데 그 싹이 언제 나겠습니까.” 지금 한·미 FTA 협상을 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공하면 국민이 손해를 보고 성공 못 하면 정권이 욕을 먹는 거예요. 어차피 손해 볼 일입니다. 더구나 협상력에서 미국과 한국은 너무 차이가 나요. 상대를 잘 모르는데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미국에서 10년 살아봤고 정부에서 일할 때 협상단을 이끌기도 했지만 힘든 상대입니다. 천하장사와 어린 아이가 씨름하는 거하고 같아요.” 농업 분야 협상팀이 미국 측에 ‘만족함을 알고 돌아가기 바란다’는 내용의 을지문덕 장군의 한시를 건넸다는데요. “대한민국이 참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할 때부터 제가 그랬어요. ‘농업은 어떻게 할 거냐고’. 그때는 얼버무리다 이제 와서 떠들썩하니 참…. 농업은 국가의 기본 산업이에요. ‘돈으로 따지면 농업 전체가 얼마나 되느냐’ ‘자동차 수출한 돈으로 쌀 사먹으면 되지’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은 미국, 일본, 유럽 국가들 모두 자국 농업을 보호하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사실 미국으로선 농업 분야 협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이라면 농업과 항공우주산업 정도예요. 농업을 제외하면 미국이 굳이 FTA를 맺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정부는 임기와 관계없이 할 일은 한다고 강조합니다.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정권 초기라면 선택지가 많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요.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을 등용해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여하튼 현안을 잘 마무리하고 더 큰 문제는 자꾸 손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정부 차원에선 그렇고, 경제계도 움직이고 국민 개개인도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치뿐 아니라 경제계에도 리더십이 부족합니다. 개별 기업 단위로 보면 괜찮은데 전경련의 예에서 보듯 경제계 전체론 목소리를 못 내는 것 같아요. 대통령 한 사람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고 리더는 리더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각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조 전 부총리는 ‘國家興亡 匹夫有責(국가흥망 필부유책)’이란 자구를 직접 쓰며 설명했다. 중국 청나라 말기 학자인 강유위(康有爲)의 말로 ‘나라의 흥망은 보통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집값 급등이 국민에겐 가장 큰 고통입니다. 최근에는 또 전셋값이 들먹입니다. “집값이 뛴 것은 부동산 문제를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려 든 탓이죠. 부동산 시장도 수요공급의 원리로 움직이지만, 그 안에는 교육(학군)·금융(금리)과 같은 여러 요인이 들어있습니다. 가격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가격 안정에만 올인하다 보니 세금을 무겁게 매기는 방법을 선택한 게지요. 한 가지 정책으론 답이 안 나옵니다. 여러 가지 병이 겹쳤는데 해열제만 먹이니 열이 조금 식었다가 다시 오르곤 하는 게지요. 단일 정책이 아닌 패키지 정책군(群)이 필요해요. 그동안 나온 크고 작은 부동산 대책이 서른 개에 이른다는 점은 문제의 핵심을 찌르지 못한 탓입니다.” 서민의 민생고도 심각하지만 기업은 중국에 쫓기고 일본에는 밀리는 샌드위치 신세로 힘들다고 합니다. “낙관하긴 어렵지만 대기업은 아직 괜찮다고 봅니다. 이들 기업에 우리나라 우수 인재들이 모여있지 않습니까. 최고의 자원이 투입된 셈인데 쉽게 무너지진 않겠지요. 만약 대기업마저 어려워진다면 우리나라 경제 재생은 어렵다고 봐야죠.”
“물가·사교육비 때문에 고통”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기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기업 투자가 미약해 내수가 죽어가고, 고용 문제도 심각합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참여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전자는 관치경제로 빠른 공업화를 추진한 결과 고비용·저효율 구조와 불균형 성장이 나타난 겁니다. 결국 이게 터져 외환위기를 맞았고요. 후자는 참여정부가 확고한 비전과 전략이 없어 과거 유산을 호전시키기는커녕 되레 악화시켜온 겁니다.” 중국의 긴축정책에 주가 하락, 엔 케리 트레이드 자금 청산과 미국 경기 침체 가능성 등 대외 상황마저 어려운 쪽으로 가고 있는데요. “IMF 관리체제에서 시장을 한꺼번에 너무 풀었어요. 당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쩔 수 있는’ 부분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외환·금융시장에 문제가 있을 때 손을 쓸 수 있는 룸은 확보했어야 했는데 안타깝습니다.” 이 상태로 가다간 1인당 소득 2만 달러도 안 된 상태에서 주저앉고 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옵니다. 미래의 먹거리도 문제이고요. “환율이 떨어져 부풀려지긴 했어도 이 정도면 거의 선진국 수준입니다. 대기업 임금도 미국만큼 높아요. 그런데 받는 입장에선 많다고 느끼질 않아요. 물가가 높고 사교육비가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호텔 음식값은 살인적인 수준입니다. 대학생들은 유행처럼 어학 연수를 떠나는데 몇 천만원씩 들고…. 어렵게 대학을 나와도 직장 잡기 힘들자 결혼이 늦어지고,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고, 이혼율 높고, 자살 많아지고…. 어느새 이 나라 문화가 불행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러니 선진국이란 생각이 안 들지요.” 결국 선진국 진입은 어렵다는 말씀인가요? “선진국이 되려면 기초가 탄탄해야지요.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고 사회가 잘 돌아가도록 시스템이 마련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국민 각자가 개성과 독립 정신이 있어야지요. 일본 돈 1만엔짜리 모델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남긴 말이 있어요. ‘일신(一身)이 독립해야 일국(一國)이 독립한다’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독립한 일신이 많지 않아요.” 독립 정신을 갖고 깨어 있으려면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할 텐데요. “맞습니다. 올바른 교육이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인재인데 이를 키우는 교육이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릴 수밖에요. 부동산 문제처럼 교육 문제도 한 가지 정책으로 해결하려 들어선 곤란합니다. 근본 바탕을 바꿔야 해요. 그러려면 일본 잔재부터 없애야 합니다. 학군제나 평준화 제도가 바로 일본이 남긴 거예요. 그 위에 미국식 자유주의를 덮었는데 그것도 완전하지 못했어요. 결과적으로 한국식도, 일본식도, 미국식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돼버린 겁니다. 한자 교육을 폐지한 것도 잘못입니다. 한자를 쓰던 선인들의 문화가 전승이 안 돼요. 그러니 문화가 깊어질 수도, 넓어질 수도 없는 거지요. 말이 빈약한 나라는 사상도 부족한 법입니다. 이 땅에서 배울 게 없다고 여겨 애들을 데리고 나가는 게지요. 평준화 제도를 없애고 경쟁 체제로 가야 합니다.”
학자·법관·언론이 바로 서야 경제·정치·사회 모든 면에서 앞으로 5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새 지도자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합니까? “제일 중요한 게 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신뢰예요.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깨끗하고,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말 저 사람이 맡으면 잘하겠지’ 하는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지요. 동시에 국내외 정세를 잘 살펴 나라의 장래에 대한 큰 비전을 그리고, 현실성 있는 전략을 구사할 줄 알아야겠죠. 인물을 적재적소에 맞게 쓸 줄 아는 것도 필수 조건입니다.” 12월 19일 국민의 선택이 제대로 이뤄져야 할 텐데요. 그래서 남 탓하는 풍조도 없어지길 기대합니다. “대한민국이 처한 현 상황에 책임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누구도 옆 사람, 윗사람을 탓할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 비난은 역효과를 낼 뿐입니다. 독일 경제학자 빌헬름 레프케의 『휴머니즘의 경제학』에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세 역할이 나옵니다. 바로 학자·법관·언론인입니다. 나라의 장래가 아무리 암담해도 이 세 역할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 희망이 있다는 얘기지요. 학자는 곡학아세해선 안 되고, 법관은 법 정신을 확실히 지키고, 언론인도 곡필하지 않아야 합니다. 언론이 참 중요한데 요즘 언론에 대해선 솔직히 A학점을 못 줄 것 같아요. 언론도, 정치도 포퓰리즘에 오염됐습니다. 우리나라 문제 중 하나가 국민의 성숙도가 낮다는 점인데 이 문제를 언론이 해결해야 합니다.” 정치인은 그 세 역할에서 빠져 있네요. “궁금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유가 있어요. 정치인은 국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자리 아닙니까? 다른 세 자리는 국민 눈치 보지 않고 소신대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사람들이고요.” 책을 함께 쓴 제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이번 대선에 출마하리란 관측이 많은데요. “잘 모르겠어요. 걱정은 됩니다. 대학총장까지 한 지성인이고 나이도 환갑인데 알아서 하지 않겠어요? 가끔 만나는데 정치에 대해선 말이 없었어요. 물론 어떤 결심을 하면 이야기하겠지만 아직은 어떤 언질도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 전 총장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충분한 재목입니다. 성품이 곧고 단호한 면이 있지요. 자기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인데, 다만 경험이 없어서 그게 좀 걱정입니다. 여도, 야도 아닌 나름대로 독자적 판단 능력을 갖고 있어 올라갈 때까지가 문제지 자리에 앉게 되면 잘할 거예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약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데 의지가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잘 모르는 게 문제라고 봐요.” 현재 상황이 어둡긴 해도 밖에 나가면 여전히 ‘한강의 기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개개인의 잠재력은 세계 일류입니다.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환경이 안돼 주저하는 게지요. 의기소침하지 말고, 어떤 상황도 견뎌내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앞날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현 정부나, 앞으로 올 정부에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국민은 욕심이 많고 마음이 급한 편이죠. 과거 압축 성장한 것처럼 선진국도 너무 쉽게 되려 하는 것 같아요. 시스템이나 의식은 갖추려 들지 않고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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