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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亂大治로 끝내 승부를 내다

大亂大治로 끝내 승부를 내다

1882년 5월 22일 오전 9시30분. 제물포 화도진(花島鎭) 언덕에 텐트가 쳐졌다. 텐트 앞에는 태극도형기와 성조기가 꽂혔고, 조선 전권대사 신헌·김홍집과 미 해군 제독 슈펠트가 마주 앉았다. 미 해병대의 ‘양키 두들(Yankee Doodle·미국의 애국가)’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미 수교 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5조에서 두 나라는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되 미국 수출입 상품에 10%, 사치품에 30%, 수출 토산품에 5%씩 각각 과세한다고 규정했다. 그로부터 125년 후인 2007년 4월 2일 오후 4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가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을 발표했다. 제1의 개국인 개항, 가난 극복을 내건 1960년대 제2의 개국에 이어 2007년 대한민국 제3의 개국은 이렇게 시작됐다. 다시 노무현인가. 제3 개국의 결단을 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대통령 중 진보 성향이 가장 강하다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2006년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처음으로 한·미 FTA 협상에 나설 뜻을 공개했다.

노무현 드라마의 재연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은 반드시 하겠다. 개방 문제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다. 적극적으로 대처해 우리 경제를 선진화하는 기회로 삼아 나가야 한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도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 지금 대화가 시작됐는데, 조율이 되는 대로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 나라 안은 들끓었다. 진보 진영에선 “배신”이라는 성난 함성이 일었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등 대통령의 참모들까지 FTA 반대를 주장하며 노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흔들림 없이 FTA 체결을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2006년 2월 3일 한·미 FTA 협상 개시 선언에 이어 14개월 만에 마침내 협상 타결을 이끌어냈다. 그 여파는 엄청나다. 보수 진영에선 때아닌 ‘노무현 찬가’가 이어지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총무처장관을 지낸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경제에서의 6·29 선언”이라며 “가슴이 뭉클하다”고까지 했다. 반면 민주노동당 등 진보 진영은 “청와대, 한나라당, 보수 언론의 신 대연정”이라며 노 대통령 비판에 앞장서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 동의를 앞두고 있는 정치권은 찬반으로 갈라져 논쟁의 바다로 빠져들고 있다. 일단 여론은 노 대통령 편이다. FTA 타결 다음 날 각종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한 여론조사마다 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급상승했다. 한국갤럽 29.8%, 코리아리서치 32.2%, 미디어리서치 32%, 리얼미터 32.5%….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한 2005년 7월을 기점으로 10%대까지 곤두박질치던 지지율은 20개월 만에 30%대로 올라섰다. 임기를 불과 11개월 남겨놓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다시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린 적은 아직 없었다. ‘노무현 드라마’가 재연될 조짐마저 보인다.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는 그동안 ‘노무현’을 잘못 봐 온 것일까. 노무현 리더십의 정체는 도대체 뭐기에 임기 말 지지율 10%대의 인기없는 대통령의 위치에서 한·미 FTA 타결까지 밀어붙였는가. 노무현 리더십의 첫 키워드는 ‘유연함’이다. 그의 사고는 한 가지 이념 속에만 고여 있지 않다. 청와대 참모들에 따르면 지금도 청와대 내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고 가장 많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 바로 노 대통령이다. 한 비서관의 고백.


U턴식 사고의 유연함 “대통령이 과제를 하나 준 일이 있다. 팀원끼리 의기투합해 과제를 받자마자 밤샘 작업을 해 새벽 3시 이지원(청와대 온라인 업무관리 시스템)에 올렸다. 새벽에 귀가하며 ‘대통령께서 내일 오후쯤에나 보시고 놀라겠지’라고 스스로들 대견해 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통령께서 새벽 5시에 보고서를 보시고 코멘트까지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 노 대통령은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거기에 몰두한다. 해답을 찾아낼 때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특히 연구와 토론 등을 거쳐 옳다고 생각되는 해답을 얻으면 지금까지 가져 온 사고나 인식의 정반대 쪽으로도 주저없이 행보를 바꾼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 그랬고, 한·미 FTA도 그렇다. 그러니 노 대통령을 고정된 사고의 틀로만 지켜보는 반대 진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다. 대연정 제안 때 한나라당이 끊임없이 숨은 정략을 의심한 것도 기존 정치의 틀로는 납득할 수 없는, 노 대통령 특유의 유(U)턴 식 사고와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논리보다 우선하는 직관’에 바탕한 자신만의 독특한 리더십을 설명한 적이 있다. 2002년 2월 15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시절 프리랜서 시사평론가였던 유시민씨와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성공한 리더의 리더십 중 제일 중요한 게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영감(靈感)을 가지고 조직원들이 그걸 확실하게 공유하게 한다. 이건 논리로 되는 게 아니다. 비전을 받아들이는 데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과정이 있다. 지도자가 가지는 신화, 신뢰성, 예감 같은 거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이건 논리가 아니고 직관으로 하는 거다. (민주당)경선 주자 가운데 그런 영감이 가장 풍부하고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다. ” 2005년 9월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선진형 통상국가로 가려면 미국과 FTA가 필요합니다”라고 했을 때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당장 시작합시다”라는 결정을 내린 배경이다. 유연함은 멈추지 않는 사고(思考)에서 비롯된다. 노 대통령은 늦깎이 운동권이다. 대부분의 386은 대학에 입학하며 운동권에 입문한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이면 몇몇 핵심을 빼고는 가족과 평범한 삶의 요구에 이끌려 생활인으로 편입된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결혼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 생활을 하던 중 30대 중반의 나이에 인권 변호사로 험난한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것도 남의 손에 이끌리지 않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권 변호사의 길이 그랬듯 한·미 FTA는 노 대통령 입장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 고민 속에서 해답으로 선택된 어젠다다. 협상 타결 후 노 대통령은 대국민담화에서 “한·미 FTA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라는 명제를 던졌다. 미국 경제에 종속될 수 있다며 한·미 FTA를 반대하는 진보 진영을 향해 노 대통령은 이렇게 설파한 적도 있다. “나도 변호사 시절 종속이론 책을 섭렵했는데 한국 사회에 맞지 않아 폐기했다. 개방도, 노동의 유연성도 더 이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효용성 문제다. 세계 시장이 하나로 통하는 방향으로 가는 시대적 대세는 중국의 지도자들도 거역하지 못한 일이다. 진보도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고 좀 달라져야 한다.”


원칙·소신 지키는 ‘바보’ 노 대통령에게는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별명이 하나 있다. 그의 정치 인생이 붙여준 ‘바보’라는 별명이다. 뻔히 편한 길이 있는데도 굳이 가시밭길을 고집스럽게 선택해 낙선의 고배를 마신 이력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90년 3당 합당을 할 때 통일민주당 의원 중 유일하게 따라가지 않은 게 노무현 의원이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을 저버릴 수 없다는 고집이 원천이었다. ‘그 덕분에’ 잘나가던 13대 국회의 청문회 스타 의원이었던 그는 14대 총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이 당시를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88년 13대 총선에서 나의 선거 지원 유세를 하며 김영삼씨는 민정당 후보를 가리켜 ‘허삼수는 반란의 총잡이입니다. 총잡이는 감옥으로 보내야 합니다.’그리고 3당 합당을 거친 4년 후 민자당의 김영삼 총재는 자기 당의 허삼수 후보를 지원하는 유세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허삼수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제가 중히 쓰겠습니다 ’. 3당 합당이 만들어 낸 웃지 못할 희화였다.”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떨어지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해 또 떨어지면서도 그는 원칙의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원칙의 정치가 제대로 보상받은 게 2002년 대선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자신의 리더십 두 번째로 원칙을 꼽고 있다. “지도자는 신중하게 판단하되 한번 결정한 원칙은 아주 소중하게 지킨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원칙을 지켜 나가려면 아주 강력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게 리더십의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이는 믿어도 된다. 저는 한다면 했다.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건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결단을 해야 뭘 할 수 있다. 욕먹을 각오하고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행복한 책읽기가 출간한 『상식 혹은 희망 노무현』이란 책에서) 그의 원칙을 엿볼 수 있는 일화는 많다. 해양수산부 장관에 막 취임했을 때다. 부산 지역에서는 지역발전을 위해 해양수산부를 부산에 유치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마침 부산 출신 장관인 만큼 지역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장관 노무현이 나섰다. 그는 명분도 부족했고, 이전해서 얻을 실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부산 시민들이 참여한 공개토론회에 직접 나섰다. 여섯 명의 토론자 중 유일한 반대자였다. 노 대통령은 이번에 한·미 FTA 협상 개시를 결정하고, 타결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뚝심으로 원칙을 밀어붙였다. 결과는 국정 수행 지지율의 급상승이라는 소득으로 나타났지만 애초 시작할 때는 “정치적으로 손해 가는 일”이라는 노 대통령의 말처럼 험난한 결정이었다. 3월 20일 한·미 FTA에 반대해 단식농성 중인 농민단체 회원들 앞에서 “농업도 시장원리에 지배될 수밖에 없다”며 “제가 후보 때 계란을 맞은 적도 있는데, 이젠 계란을 던져 해결되는 시대가 아니다”라고 한 게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원칙과 소신은 때로 고집으로 일탈할 위험도 있다. 한번 옳다고 결정한 일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추진할 당시 청와대 참모들조차 일제히 반대론을 개진했다. 참여정부의 정체성과 맞지도 않는 데다 한나라당이 제안을 수용할 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노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오랜 기간 동안 나름의 고민 과정을 거쳐 결심한 일인 만큼 논리로 참모들이 맞서기도 어려웠다. 결국 당시 노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인 문재인 민정수석이 나서 “저렇게 대통령이 하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가 물러서자”고 해 청와대 내부 논란을 정리한 일이 있다고 한 참모는 전했다. 대연정의 결말은 그러나 실패였다. 후유증도 컸다. 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를 내리막길로 걷게 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토론과 설득 프랑스의 정치사상가인 토크빌은 “절대 군주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의 육체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지만 민주주의 시대는 소수의 영혼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다수의 의지를 관철시킨다”고 말했다. 권위주의 시대의 리더십은 반대자들을 힘으로 억압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경제론은 계엄으로 대표되는 긴급조치법 등으로 추진 동력을 삼았다. 반대편에 선 민주화 세력의 분배론은 색깔론으로 덧칠해져 숨을 쉬지 못했다. 그런 만큼 결정과 추진의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다. 고도 성장이라는 양지의 반대편에 억압과 복종이라는 그늘을 만든 건 권위주의 리더십의 어두운 측면이다. 이 같은 권위주의 리더십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대로도 이어진다. 민주화 세력 1세대라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은 군사정부 시절의 리더십보다는 강도가 약해졌지만 강력한 카리스마의 리더십은 여전히 유효했다. 각각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대표되는 집권 세력의 공고함은 토론과 설득보다는 ‘총재님’ ‘선생님’으로 상징되는 최고지도자의 결심과 추진이라는 단선 구조로 정책 집행력이 힘을 받았다. 하지만 검찰과 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에 대해 상대적으로 손을 놓아버린 노 대통령의 리더십은 다를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유형이다. 각종 토론회와 업무보고 회의에서 쏟아지는 대통령의 말은 인쇄매체로는 다 전달하지 못할 정도다. 대선 후보 시절 노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말이 좀 많죠? 아마 제가 늘 소수파여서 그랬을 겁니다. 열심히 소수파의 목소리를 항변하려 하다 보니 할 말이 많아졌다고 봐주세요. ” 포스트 권위주의 시대에 노 대통령은 말로써 통치하는 유형이다. 현 정부 출범 이래 청와대에서는 매일같이 토론이 벌어진다.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오전 상황점검 회의에서부터 시작해 노 대통령이 집무실로 출근하기 전 청와대 관저에서 하는 참모회의, 그리고 사안이 생길 때마다 소집하는 참모회의 등. 바깥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부 부처 장관들이 참석해 열리는 국무회의를 청와대 비서관들은 비서실 내 자신의 방에서 모니터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정책의 결정 과정과 토론 과정을 공유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의 정책 결정 과정도 토론, 그리고 설득을 거쳐야 한다. 토론을 통해 노 대통령의 소신은 단련된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논리를 바탕으로 한 설득 작업이 전개된다. 한·미 FTA를 추진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진 후 진보 진영의 반대가 거세자 노 대통령은 이들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 토론을 했다. 2006년 2월 청와대 참모 출신인 정태인씨 등을 부른 데 이어 8월 25일 국회 한·미 FTA 특위위원들과의 만찬에서 노 대통령은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과 면전에서 얼굴을 붉혀가며 설전을 벌인 일도 있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과도 토론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참모는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사실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정보 출납형’과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사소한 절차상의 문제들은 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는 ‘판단 보조형’이 그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참모형은 후자 쪽이다. 판단을 보조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폭넓은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 그 과정 속에서 기본적인 가치와 목표, 절차와 수단에 관한 원칙을 함께 공유하며 사고방식을 일체화해 나가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 노 대통령은 FTA 협상이 타결된 이후 반대론자들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토론을 계획하고 있다. 개헌 제안을 한 후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일제히 방송 토론에 나갔듯이 이번에도 범정부 차원에서 FTA 전도사로 나서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다.

링컨에서 배운 리더십 대통령 노무현의 리더십 모델은 링컨이다. 그는 2001년 11월에 쓴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란 책에서 “나는 훌륭한 역사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링컨에게서 얻는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링컨에게 반하게 했을까. “링컨 정권은 강력하지 못했다. 대통령 링컨은 자기가 임명한 장관이나 장군의 목을 함부로 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쉼없이 정적들의 강공에 시달리는 정권을 가지고 링컨이 연방 통합과 노예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을 보면서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떠올린다. ” 노 대통령의 링컨 예찬론은 계속된다. “링컨은 현실이 어떻든간에 성과를 내려하는 조급한 개혁주의자가 아니었다. 역사의 흐름에 자신의 과업을 맡겨두고 그냥 민심을 좇아다니지도 않았다. 진보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열망이 있었고, 한발한발 치밀하게 나아갔다.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있었다. ” 한·미 FTA 추진 과정에서 링컨의 리더십에 영감을 받은 노 대통령의 논리는 진보 진영에 대한 도발로 발전한다. 2월 17일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한다’라는 장문의 글에서 노 대통령은 “저는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지만 무슨 사상과 교리의 틀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진보가 달라지기를 희망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 스스로 이름 붙였듯이 교조적 진보에 대응하는 유연한 진보론의 탄생이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노 대통령의 주장을 ‘실용 좌파’라고 규정하며 “노 대통령의 FTA 정책을 좌파냐, 우파냐의 이념 논쟁으로만 몰고 가는 건 부적절하다”며 “한·미 FTA를 추진하는 노 대통령의 정신은 실질과 실용이라고 본다”고도 했다. 한·미 FTA는 필연적으로 진보 진영 내부의 논쟁을 부를 수밖에 없다. 특히 추진 주체가 진보 진영의 지지를 모태로 출범한 노 대통령인 만큼 더욱 그렇다. 벌써부터 민주노동당 등은 “청와대, 한나라당, 보수 언론의 대연정이 시작됐다”며 공세의 날을 세우고 있다. 제3의 개국인 한·미 FTA는 아직 험난한 고개가 하나 더 남아있다. 국회 비준 동의라는 고개다. 한·미 FTA 협상이라는 험준한 산을 넘은 노 대통령은 지금 그 고개 앞에 서서 반대론자들을 향해 “나의 진정성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노무현 대 심상정의 ‘FTA 논쟁’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FTA 추진에 가장 거세게 반대하는 정당이 민주노동당이다. 노 대통령은 2월 3일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선언한 지 6개월 후인 8월 25일 국회 FTA 특위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과 장시간 논쟁을 벌인다. 참석자들의 브리핑 등을 바탕으로 당시 두 사람의 논쟁을 소개한다. ■노무현 대통령 대선 때 나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안 좋아하는 일을 하게 돼 진땀을 빼고 있다. 오늘은 토론 자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진의를 밝히는 자리로 생각해 달라. ■심 의원 노동 문제, 한·미 FTA 문제 보면서 또 한번 갖게 되는 생각이 대통령이 찬성 논리만 아니라 절반의 반대 의견과 노동자, 농민 의견에 대해 정보를 균형있게 접하고 있는지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갖고 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반대하는 절반의 국민도 국민이다. ■노 대통령 나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듣고 있다. 그래서 현장의 정보를 바로 접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노동운동 한 사람들, 386, 요즘에는 정치인들을 만나고 있는데 현장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적 구성은 돼 있다고 본다. ■심 의원 오늘 대통령께서 가장 잘 돼 있다고 주신 한·미 FTA 홍보 자료는 찬성 논리로만 구성된 자료다. 일주일 시간을 주시면 똑같은 주제에 대해 반대하고 우려하는 사람들의 반대 논리로 구성된 반박 자료를 정리해 드리겠다.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노 대통령 정리해서 보내달라. ■심 의원 ‘바다 이야기’ 같은 사행성 도박산업이 국지적 해일이라면 한·미 FTA는 한반도 전체를 삼키는 쓰나미가 될 거라는 우려가 높다. ■노 대통령 FTA는 전 세계적인 대세다. 한·미 FTA를 추진한 첫 생각은 세계시장에서 ‘왕따’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다. FTA에서 동아시아는 후발 주자고 한국은 뒤처지고 있다. 미국에 왕따당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봤다. 일본이 미국과 먼저 FTA 하면 우리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일본이 미국하고, 중국이 미국하고 먼저 FTA를 체결하면 불안하고 대충 따져봐도 우리가 낙오된다. 한·미 FTA를 체결하면 얼마가 남을지 모르지만 뒤처지면 곤란하다. 미국의 압력으로 하냐 하는데 미국의 압력은 없었다. 미국이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 압력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정치 안보적으로 강대국인 프랑스의 드골이라도 미국 눈치 안 볼 수 없고, 중국은 중원의 중심인데도 중국 지도자가 미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노(NO) 못 한다. 미국이 한·미 FTA를 선택한 것이지만, 나는 우리가 끌어들인 것으로 설명하고 싶다. 처음엔 미국이 FTA에 적극적이지 않아 걱정이었다. 김현종 본부장이 미국 끌어안을 테니 한번 해보자 이야기한 적도 있다. ■심 의원 한·미 FTA가 이른바 ‘국익’이라면서도 정부는 그 타당성에 대해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 세계화 과정에 참여 여부 문제를 숫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니다. 쌀 한 말 메고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갈 때 새로운 세상에 많은 기회가 있다는 논리 말고 그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나. 큰 틀에서 봐야지, 전자계산기 두드릴 일이 아니다. ■심 의원 대통령이 한·미 FTA에 대해 긍정적 확신과 소신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많은 사람이 그 확신의 근거를 공유 못해 고통받고 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국민은 졸속 추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노 대통령 예상되는 국내 피해에 대해 최선을 다해 대비하겠다. FTA가 없더라도 농촌에 대한 복지 대책은 세울 수밖에 없다. 공업 분야는 일단 국회가 1차적으로 잘 대비해줬으면 좋겠다. 특히 중소기업과 관련해 기술개발 부분에 대해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또 정부가 방심하지 않고 협상 과정에서 함정에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비준을 안 하더라도 국회에서 협상 과정을 챙겨달라. 어떤 전제 조건 없이 토론할 수 있어야 된다. 진지하게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 밀어붙이지 않고 정상적 절차 통해 추진하겠다. ■심 의원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임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거냐. ■노 대통령 법에 따라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내에 이 조건으로 안 된다는 공론이 있지 않는 한 이대로 밀고 간다. ■심 의원 반대 의견 묵살한다는 뜻이냐. ■노 대통령 다 설득해서 갈 수 없지 않으냐. 수퍼마켓과 재래시장이 어렵지만 지금 이 시대에 지키자는 것도 무리 아닌가. 지금까지 우리가 많은 개방을 했고 어쩔 수 없이 열었지만, 이 모든 것을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 이겨냈다. 실패한 적이 없다. 한국인은 이론적으로 안 되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 ■심 의원 대통령 말씀은 종교적 낙관처럼 보인다. ■노 대통령 인신공격성 발언을 안 해줬으면 좋겠다. ■심 의원 인신공격성 발언이 아니고 대통령 말씀 내용이 그렇다. 한·미 FTA로 사회 경제적 제도를 바꾸자는 건데 미국은 바뀔 것이 없지 않나. 우리 사회의 거대한 변화가 예상되는데 전혀 준비되지 않고 있다. 전자계산기를 두들겨 숫자를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거대한 제도 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할 체계적 준비가 전무하다는 게 한·미 FTA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핵심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내부적 개혁의 동인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노 대통령 국민 뜻은 국회 비준에서 대변될 것이다. 국민투표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유효한 방안이 아닐 수 있다. 이제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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