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라디오 살렸다
인터넷이 라디오 살렸다
대학원생인 김용우(25)씨는 하루 1시간 정도 학교 연구실에서 ‘콩’으로 한국방송공사(KBS)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콩’은 컴퓨터로 라디오를 듣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김씨는 인터넷 라디오가 등장하기 전에는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라디오 수신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연구실에서도 컴퓨터로 쉽게 라디오를 듣는다”고 김씨는 말했다. 인터넷 라디오를 이용하는 청취자가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 지난해 3월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듣게 해주는 소프트웨어 ‘미니’를 문화방송(MBC)이 처음 내놓으면서 거의 모든 방송사가 뒤따라 비슷한 소프트웨어를 무료 보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라디오 청취율은 10년 전부터 꾸준히 하락했다. TV의 등장에도 끄떡 않던 라디오였다. 그러나 인터넷이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라디오 청취율은 빠르게 떨어졌다. 그래도 1995년에서 1999년까지 청취율은 43%대에 머물렀다. 2000년 들어 3%가 떨어졌지만 그 후 5년간은 40%대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6년 조사에서 8%가 갑자기 떨어져 2006년 11월 현재 33%다. 라디오 청취율이란 전체 국민 중 하루 5분 이상 라디오를 들은 사람의 비율을 말한다. 요즘엔 열 명에 세 명 정도만이 하루에 5분 이상 라디오를 듣는다는 말이다. 청취율 하락은 특히 핵심 고객층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남태정 MBC 라디오 PD는 “지금도 중·장년층은 자동차로 출퇴근할 때 라디오를 듣지만 젊은이들은 뉴미디어, 인터넷, 케이블·위성TV와 같은 다양한 매체가 생기자 라디오를 등졌다”고 말했다. 그런 변화는 38년 동안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젊은이들의 ‘친구’ 였던 ‘별이 빛나는 밤’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남 PD에 따르면 과거 ‘별밤 가족 마을’(고 1, 2학년 대상으로 2박3일 동안 진행했던 음악 캠프)은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참가해 보고 싶은 꿈의 캠프였다. 하지만 지금은 별밤 행사에 관심을 보이는 청소년은 거의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라디오의 존립기반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커져갔다. MBC 라디오의 임재윤 PD도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나 뚜렷한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려나갔다. 임 PD는 어느 날 “라디오를 어디서 사야 하나요?”라는 한 청취자의 물음을 듣고 불현듯 뭔가를 떠올렸다. 그래 요즘 전자제품 매장에 가도 라디오는 찾아보기 힘들고 라디오가 있는 집도 많지 않다. 설사 라디오가 있다 해도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컴퓨터는 그렇지 않다. 어느 집에나 한 대 이상이고, 사람들은 언제나 컴퓨터를 껴안고 산다. 그렇다면 컴퓨터에 라디오를 가져다주면 어떻게 될까. 임 PD는 2005년 말 iMBC 팀과 함께 PC에 들어가는 라디오를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2006년 3월 ‘미니’가 탄생했다. 남 PD는 “특히 인터넷 때문에 라디오를 떠났던 젊은이들을, 인터넷을 이용해 다시 불러들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미니’는 내 PC 속의 라디오다. MBC 홈페이지에서 기본 신상정보를 입력한 뒤 ‘미니’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설치하면 컴퓨터에 라디오 기능이 주어진다. 물론 채널을 마음대로 돌리지는 못한다. 방송사마다 유사한 프로그램을 따로 내려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인터넷 라디오를 설치하면 아주 다양한 기능이 주어진다. 재생, 빨리 감기, 되감기에다 곡목 확인, 청취시간 예약도 가능하다. 평균 노래 길이인 5분을 되감아 듣는 타임머신 기능도 있다. 개발팀은 ‘단순함’을 살리려고 애썼다. 예전에는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들으려면, 창을 띄우고 기다렸다가 방송사 홈페이지를 통해 ‘on-air’ 서비스를 이용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미니 같은 프로그램에선 로그인만으로 직접 수신이 가능하다. 라디오의 특성 덕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 임 PD는 “TV에서는 서버나 회선에 부담이 커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터넷 라디오는 ‘미니’가 세계 최초라고 MBC는 주장한다. 그러나 특허권을 보장받지는 못했다. 홍정미 iMBC 웹운영 2팀장은 “‘미니’의 비즈니스 모델 기술특허를 받으려고 당국에 문의했지만 완전한 새 기술이 아니라 어렵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고 전했다. ‘미니’ 이후, 2006년 한 해 동안 KBS의 ‘콩’(4월), 서울방송(SBS)의 ‘고릴라’(6월), 교육방송(EBS)의 ‘반디(7월)’ 등으로 인터넷 라디오가 서비스를 시작했다. 임 PD는 “컴퓨터에 라디오 수신기를 얻는다는 아이디어와 기술이 간단해 타 방송사에서 모방하기가 쉬웠다”고 말했다. KBS 등 다른 방송사는 후발 주자라는 치욕을 덜고자 프로그램 출연자의 모습을 생중계하는 ‘보이는 라디오’ 서비스를 덧붙였다. 뚜껑을 열고 보니 인터넷 라디오는 방송의 틀을 바꾸는 ‘킬러 앱(Killer Application)’이었다. 우선 컴퓨터가 있는 곳이면 세계 어디서든 라디오 청취가 가능해졌다. 홍 팀장은 “중국, 미국, 아랍에미리트 등 110개국의 해외동포가 ‘미니’로 라디오를 듣는다”고 말했다. 남태정 PD는 “‘이소라의 음악도시’를 맡았을 때, ‘3년 동안 그 방송을 들었지만 유학을 가서 못 듣게 됐다’며 아쉬워하는 청취자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 흐뭇하다”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듣는 대다수는 젊은층이다. 예를 들어 ‘미니’ 이용자의 42%는 20대다. 30대가 32%, 10대는 13% 수준이다. 홍정미 팀장은 “새 매체 적응력이 빠른 젊은이, 특히 직장인이 컴퓨터로 일하면서 짬짬이 인터넷 라디오를 이용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니’ 접속률은 출근 시간인 오전 9시 무렵 서서히 올라갔다가 오후 1~4시 정점을 이룬 뒤 퇴근 시간인 6시에는 수치가 뚝 떨어진다. 인터넷 라디오는 죽어가던 라디오를 살려냈을까. 실제로 라디오 청취율은 다시 늘어났을까. 방송 관계자들은 당연한 얘기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니를 개발한 MBC의 임PD는 2006년 여름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미니’로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전체 라디오 인구가 늘었다”고 남태정 MBC PD는 말했다. “매체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MBC ‘미니’ 출시 후 지금까지 내려받은 횟수는 대략 340만 건이다. 이 밖에 KBS의 ‘콩’ 140만 건, SBS의 ‘고릴라’ 200만 건, EBS의 ‘반디’ 11만 건 정도라고 각사는 밝혔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라디오가 거의 700만 대나 새로 보급된 셈이다. 방송사들은 이들이 모두 새로 늘어난 청취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터넷 라디오가 청취율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크지 않다. 현대리서치 연구소의 황인영 대리는 2006년 12월 청취자들의 라디오 수신 방법을 조사했더니 인터넷을 통해 라디오를 듣는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라디오 수신기가 전체 청취자의 48.2%고, 차 안에서 듣는 경우가 40.8%, 이동 중 휴대용 라디오가 5.9%, 컴퓨터로 듣는 경우가 4.3%, DMB 수신기가 0.4%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의 기준이 청취율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주 1회 한 번에 30분 이상 라디오를 들었을 경우 선택한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온 답변이기 때문이다. 한국리서치 임정관 과장도 “2006년 11월까지의 청취율 조사로는 큰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각 방송사에서 적극적으로 인터넷 라디오를 홍보한 2006년 말 이후의 청취율 조사 결과가 나와야 추세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실 현재로서 가장 확실한 변화는 청취자의 프로그램 참여 방식과 태도에서 발견된다. 1980년대 중반 MBC 라디오 ‘별밤’의 청취자 사연은 엽서나 편지로 하루 500통가량 들어왔다고 이석헌 당시 담당 PD는 말했다. 그러나 요즘엔 ‘별밤’의 사연 중 엽서나 편지는 거의 없다. 사실 90년 중반부터는 라디오 청취자가 보내던 우편과 엽서가 줄면서 팩스나 인터넷통신, 문자메시지 등으로 옮겨갔다. ‘미니’가 도입되면서 엽서나 편지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대신 ‘별밤’의 경우 ‘미니’로 전해지는 메시지가 하루 평균 500줄(1줄이 1건)가량이다. 최근 동방신기가 출연했을 때는 1만 줄가량으로 폭주하기도 했다. 여기에 매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500건, 인터넷 게시판 사연 100건 정도가 더해진다. iMBC 홍정미 팀장은 “그동안 한 번도 사연을 보낸 적이 없는 청취자가 ‘미니’를 통해 실시간으로 사연을 보내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청취자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법이 달라졌듯이 그 내용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애틋한 사랑 또는 애달픈 사정을 엽서에 구구절절이 적어 보냈지만 지금은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처럼 짧고 가벼운 내용이 많다”고 남 PD는 말했다. 고민 상담 등의 진지하고 심각한 내용보다 가볍게 한 마디씩 던지는 식이다. 참여의 양은 늘었는지 모르지만 정서적으로 라디오와 함께 호흡하는 깊이는 많이 낮아졌다는 얘기다. 다른 한편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예전보다 청취자의 즉각적인 반응에 예민하게 촉각을 세운다. ‘별밤’ 제작진은 즉각적인 반응를 ‘미니’ 메시지로 모니터하면서 청취자들의 취향을 프로그램에 반영한다. “예전에는 PD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고 남 PD는 말했다. 즉각적인 반응을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내용은 반응이 별로 좋지 않구나’ 하고 알게 돼 즉각 대처하려고 한다”고 남 PD는 말했다. 한편 KBS 2FM ‘슈퍼주니어의 KISS THE RADIO’의 이정윤 PD는 “이제는 라디오 출연자가 동작에까지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보이는 라디오’가 생긴 후 출연자 손가락 동작 하나에도 ‘콩’ 사연을 통해 피드백이 바로 오기 때문이다.” 사실 인터넷 라디오는 라디오의 혁명을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의 유선방송과 비슷하지만 TV와 달리 중간에 유선사업자가 배제된 형태로 청취자와 쌍방향 통신을 할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사는 이제 실시간으로 어떤 사람이 듣는지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터넷 쪽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특정 계층을 겨냥한 다양한 형태의 광고를 청취자들에게 보낼 길이 열렸다. 각 방송사들은 이런 광고 기법을 올해 안에 도입하기 위해 실무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니 기독교방송(CBS), 교통방송(TBS), 극동방송(FEBC), 불교방송(BBS)도 인터넷 라디오 서비스를 서둘러 준비 중이다. 박옥배 CBS PD는 “10, 20, 30대의 인터넷 라디오 청취가 급증하면서 청취 형태가 변한 점을 감안해 곧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라디오가 컴퓨터 안에 머물까. 임 PD는 지금의 인터넷 라디오가 3년 후에는 또 다른 형태로 바뀌리라고 본다.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기가 변하면 라디오 역시 다른 형태로 옮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인터넷이 휴대전화로 들어가면 라디오가 그 안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임 PD는 예를 들었다. 홍정미 팀장은 “TV를 통해 라디오를 보고, 리모컨으로 사연을 접수하는 시대”를 상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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