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도 가족친화 경영 나섰다
한국 기업도 가족친화 경영 나섰다
이직률(0.2%)은 제조업 평균(2.57%)의 10분의 1을 밑돈다. 산재사고는 지난 10년간 7분의 1로 감소했다. 2004년 직원 합계출산율은 1.89명(당시 국내평균 1.16명)이다. 1인당 자원봉사활동 시간은 국내평균의 7.5배다. 이 회사의 주요 제품은 국내 시장 점유율 1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회사의 직원들은 행복하다. 이쯤 되면 어느 기업인지 알만 한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라고 단골로 오르내리는 유한킴벌리의 경영성과들이다. 이 회사는 1993년부터 생산직 4조 근무제, 94년 관리직 시차출근제, 99년 영업직 현장 출퇴근제 등 탄력근무제도를 도입했다. 또 생후 1년 미만 유아를 가진 여성근로자에게 1일 2회 각 1시간씩 수유시간을 준다. 자녀 1인당 200만원씩의 유아보육비도 지급된다. 이렇듯 유한킴벌리는 가족친화경영의 대표 기업이다. 유한킴벌리는 직원의 행복과 기업의 행복이 거의 일치하는 기업이다. 가족친화 경영으로 직원들의 만족도와 기업 매출이 동시에 증가했다. 하지만 가족친화 경영을 할 여건이 안 된다고 판단하는 기업들은 유한킴벌리를 불편하고 거북스럽게 바라본다. 그래서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제단체들은 무조건 가족친화 경영을 강요하는 유한킴벌리와 문 사장의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어느 경제단체의 한 고위 간부는 “사실 환경 훼손의 주역이 환경 기업으로 홍보되면서 소비자들이 마구 사준다”고 유한킴벌리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가족친화 경영을 한다는 유한킴벌리의 기저귀 시장 점유율은 현재 70%선으로 독주 체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다른 기업들과 단순비교하기 곤란하다. 만약 이 회사의 기저귀 시장 점유율이 30%선이고, 경쟁기업의 추격을 받는다고 치자. 그래도 지금처럼 가족친화 경영을 외칠 수 있을까? 유한킴벌리가 하는 가족친화 경영을 대기업들이 왜 못하느냐고 다그치기는 힘들다.” 경영자총연합회의 사회정책팀 황인철 팀장의 말이다. 유한킴벌리는 사회책임 경영이나 환경친화 경영 등에서도 좋은 이미지를 획득했다. 지난해엔 여성가족부가 선정한 ‘가족친화 경영’ 사례집에 모범 회사로 올랐다. 가족친화 경영이란 직원들이 직장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도록 여러 가지를 지원하는 경영을 말한다. 그래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 회사는 가장 존경받는 기업 혹은 일하고 싶은 기업에 항상 들어간다. 게다가 시간은 유한킴벌리 편이다. 한국에서도 가족친화 경영은 거스르기 힘든 대세이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의 의식구조가 변했고, 인구 구조도 기업인들로 하여금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직장인들의 의식변화는 여러 군데서 감지된다. 전경련이 지난해 작성한 ‘저출산 고령화에 대비한 정책과제 및 기업의 대응방향’에서도 ‘근로자들 역시 과거 직장을 우선시하는 경향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올 2월 보고서에서 ‘일 중심’ 근로관이 ‘개인생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간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통계청이 전국 3만3000가구에 상주하는 청년층(15~29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젊은 층에서 더욱 뚜렷하다. 첫 직장 이직사유로 ‘보수나 근로시간 등 근로여건 불만족’이 41.1%로 가장 많았으며 ‘건강, 육아, 결혼 등 개인이나 가족문제’도 21.3%나 됐다. 일과 가족, 기타 생활의 조화가 가능한 직장을 선호한다는 증거다. 직원의 행복이 생산성 향상에 직결된다고 깨닫는 기업들도 늘어간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서울 소재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족친화 경영이 기업 성과를 올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응답한 기업이 61.2%에 달했다. 이 중 60.8%가 종업원의 만족도가 높아져야 생산성이 올라간다고 했고, 이직률이 낮아져 안정적인 인력 운용이 가능하다는 응답도 26.1%나 됐다. “시대가 바뀌어 핵심인력이 가족친화 경영을 하는 기업에 몰리는데다 한국 특유의 저출산 고령화 현상과 맞물려 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가족친화 경영의)압력을 받는다”고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 수석연구원은 분석했다. 가족친화 경영의 보다 현실적인 동력은 한국사회의 인구구조에서 나온다.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다. 2005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0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1983년 2.08명으로 인구대체율(한 사회가 현재의 인구수준 유지에 필요한 출산율. 통상 2.1명을 의미) 아래로 떨어진 이래 계속 하락했다 반면 2001년 기준 65세 이상의 인구비율이 7.3%로 고령화사회(유엔이 정한 고령화사회 기준 7%)를 넘어 2005년 현재 9.1%선으로 급상승했다. 2019년에는 14%인 고령사회에, 2030년이면 초고령사회인 20% 이상이 된다.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필연적으로 생산 가능 인구(15~64세)의 감소와 노령화로 이어져 생산성 위축이나 국가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 경총이 지난 2005년 발표한 ‘기업 내 근로자 고령화 현황과 정책과제’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4.6%에서 2020년대 2.9%, 2040년대 0.7%로 폭락한다고 나타났다. 저출산 고령화는 생산 가능 인구의 조세와 사회보장비 부담을 가중시킨다. 2005년에는 생산 가능 인구 8.2명이 65세 이상 노인 1명을 부양하지만, 2020년에는 4.6명, 2050년에는 1.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게 된다. 이런 통계와 사회적 위기감을 지렛대 삼아 정부는 2006년 7월 저출산 고령화 기본계획인 ‘새로마지 플랜 2010’을 확정했다. 2008년도 배우자 출산휴가제 도입, 출산 여성 채용 기업에 인센티브 제공 등 출산 보장이나 여성 노동력 활용 방안을 다수 담았다. 이를 위해 5년간 32조원이 투입된다. 이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도 2005년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민 대통합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전경련,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참여연대, 대한 불교 조계종, 재경부·보건복지부 등 각계의 대표적인 기관, 단체들이 참여하는 ‘저출산 고령화 대책 연석회의’가 이듬해 1월 출범했다. 저출산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처럼 비관적인 인구전망, 대책을 요구하는 사회 여론,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의지가 맞물리면서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치유방안으로 가족친화 경영이 더욱 부각됐다. 통신장비 제조 벤처기업인 네오웨이브는 지난해 8월 제이엠피 경영권 분쟁에 휩싸여 올 들어 사장이 두 번 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2005년 332억원이던 매출액이 지난해 483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경상이익도 43억원에 달했다. 광장비 등 신규사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덕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직원들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와 업무 효율 개선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이 회사의 김태선 전무는 강조했다. 이 회사 직원 100명 중 연구인력이 절반 정도다. 벤처기업이 대부분 그렇듯이 업무 강도가 높고 밤늦게까지 근무하는 일이 잦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부족해 늘 문제였다. 당시 CEO는 기술 개발을 제대로 하자면 편하게 일하고, 의욕을 발휘토록 하는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직원 평균 연령이 32~33세로 아이들이 취학연령에 접어들 때다. 그래서 전 임직원과 그 가족들이 함께 공연도 보도록 알선해주고, 환경 자연학습장인 ‘파랑새 학교’도 운영한다. 한 달에 한 번 임직원 자녀들이 모두 야외 체험학습에 참여한다. “가족친화 경영은 정작 일하는 직원보다는 자녀들에게 더 강한 파급력을 갖는다. 파랑새 학교에 참여한 자녀들이 아빠가 네오웨이브에 다녀 자랑스럽다는 편지를 보내온다”고 이 회사의 최형배 팀장은 전했다. 58년 설립된 한국스레트공업의 후신인 벽산은 직원들이 가족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한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월부터 ‘아빠가 쏜다’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직원들이 자녀가 공부하는 교실을 찾아가 피자 파티를 열어주는 행사다. 회사는 관련 비용을 대주고, 학교 방문시 출근했다고 간주한다. 또 매년 우수사원으로 선정된 직원 12명에게 가족동반 해외여행 기회를 제공한다. 연초에 체중감량 목표를 정해 연말 수치 변화가 가장 큰 직원 가족도 해외여행에 나선다. “직원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잘 보살펴야 기업이 잘된다는 게 벽산의 경영원칙”라고 경영관리팀 하경미 과장은 말했다. 이처럼 기업이 직장과 가정의 경계를 허물어 적극적으로 직원들의 삶 속으로 뛰어든다. 그래도 한국의 가족친화 경영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전국적으로 몇 개의 기업이 가족친화 경영을 실천하는지를 파악한 기초자료조차 없다. 가족친화 기업 인정 기준과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국회에서 인증 기업 선정 방안을 규정한 법률안(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이 발의한 ‘가족친화 사회환경 조성법안’,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이 발의한 ‘가족친화 기업 촉진에 관한 법률안’)이 심의단계에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직장보육 시설 제공을 의무화하는 사업장(상시 여성근로자 300인 이상 또는 상시 근로자 500인 이상)을 봐도 그렇다. 여성가족부가 올 들어 실시한 전국 817개의 직장보육서비스 의무사업장 실태조사에서 37%(302곳)만이 직장보육을 실시한다고 나타났다. 그나마 국가기관이나 지자체가 양호한 편이어서 조사대상(196개)의 76%(149개)가 직장 보육시설을 운영 중이다. 민간사업장은 25%(569곳 중 141곳), 학교는 22%(55곳 중 12곳)에 그쳤다. “한국 기업들은 1000억원짜리 사옥은 지으면서도 10억원이 드는 탁아소는 외면한다”고 강혜련 이화여대 교수(경영학)는 비판했다. 단기적인 효과가 예상되는 투자에만 열을 올릴 뿐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본적으로 인내심이 부족하다.” 전경련, 경총, 대한상의 등 취재과정에서 만난 정부, 기업인, 경제단체 관계자들은 대부분 가족친화 경영 취지에는 공감했다. 직원의 만족도를 높이고 이직률을 낮추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일에 전념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져 기업도 이익이라고 여성가족부는 말한다. 가족친화적 제도의 시행이 기업에 적지 않은 비용 부담을 초래하는데도 기업들이 흔쾌히 나서는 이유는 기업 이미지나 경쟁력이 개선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경련 노동복지팀 정대순 부장은 “결국엔 국내 기업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그 믿음이 아직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직원들의 행복지수 고양과 기업의 생산성 향상이 반드시 양립하는지 많은 경영자가 의문을 갖는다고 정대순 부장은 말했다. 가족친화 경영이란 이익을 주기는커녕 그저 비용만 유발하는 애물단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김효선 중앙대 교수(경영학)도 “일부 기업은 가족 친화적인 직장환경을 만드는 일을 윈-윈으로 보기보다는 제로섬(zero-sum)으로 본다”고도 했다. 상당수 인사 담당자가 아직도 가족친화 경영과 제도가 종업원들에게 좋다는 걸 알지만 비용 때문에 도입을 꺼린다. 만약 기업들이 가족친화 경영을 통해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확신한다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가족친화 제도가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느냐를 객관적 성과 지표로 검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외국에선 이미 지표 검증이 이뤄진다. 강혜련 이화여대 교수는 “독일 ‘헤르티에 재단’에 따르면 가족 친화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생산성이 30%나 높다고 조사됐다”고 했다. 한국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여성가족부 가족정책국 가족문화팀 김권영 사무관은 “가족친화 경영의 계량적 연구 성과를 들은 바 없다”고 했다. 전경련 정대순 부장도 “가족친화 경영으로 생산성이 올라가는지 경영성과 지표로 입증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가족친화 환경 관련 국내 조사가 기업의 경영이나 인사 담당자, 근로자 등 이해당사자의 지각(知覺) 측정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가족친화 경영에 드는 비용 대비 효과를 정밀하게 검증하는 분석결과는 없었다. 실제로 가족친화 기업이 어떻게 업무 성과를 높이는지 정확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단지 복리 후생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김효선 교수는 지적했다. 한국에서 가족친화 경영의 효용성을 객관적 지표로 따지기엔 아직 시기상조인지 모른다. 강혜련 교수는 “기업이 말 그대로 가족친화 경영을 실천하고 제도를 완비한다면 3~5년 정도의 기간이 지나야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현단계에서 가족친화 경영 도입은 “경영자의 철학에 기초해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덧붙였다. 4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사당 6층 여성가족위원회 회의실에서는 법안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이 발의한 ‘가족친화 기업 촉진에 관한 법률안’과 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이 발의한 ‘ 가족친화 사회환경 조성법안’을 놓고 정·관·학계, 경제계 인사들이 각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입장을 진술했다. 이 두 개 법안은 가족친화 경영을 위한 분야별 지원 방안과 행정기관 간 역할분담을 규정했다. 정부와 국회는 제도 지원을 통해 가족친화 경영을 널리 확산케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날 행사에 참석한 경총의 황인철 팀장은 “기업 내 가족친화적 환경 조성은 어디까지나 개별 기업 상황에 맞게끔 자율적으로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은 법률안 제정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법률을 통해 기업에 관여하면 할수록 규제만 강화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시행주체인 기업 간 시각차 극복도 가족친화 경영이 확산에 앞서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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