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는 미국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수여하기 시작한 대학이다. 1701년 설립돼 미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예일대가 위치한 코네티컷주 뉴헤이번시는 뉴욕에서 약 120㎞ 떨어진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로 예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대학도시다. 예일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교포학생을 제외하고는 한국 유학생이 극히 드물었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크게 증가해 1990년대 이후에는 연평균 100명을 넘고 있다. 이 학교는 하버드보다 한국인에게 덜 알려져 유학생 수가 하버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예일대는 다른 유명 대학에 비해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소수인종 입학장려, 최초 남녀 공학 실시 등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신학문인 경영학을 달갑지 않게 여겨 1976년에야 뒤늦게 경영대학원을 설립할 정도로 보수적인 일면도 가지고 있다.
예일대학교 | 구분: 사립대 개교연도: 1701년 소재지: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번 교수 1인당 학생수: 3명 장서: 1080만 권 학교 특징: 미국에서 최초로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 시작한 대학이다. 소수 인종 입학 장려 등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전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국인 동문: 예일대 동문 중엔 기업보다는 학계 쪽에 진출한 사람이 훨씬 많다. 윤후정 이화학당 이사장, 권태준 서울대 명예교수,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박문옥 단국대 명예교수, 백낙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등 원로 교수들이 학계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치학 분야에서는 서강대 신윤환·유석진·김재천 교수가 있고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이삼성 한림대 교수, 신욱희 서울대 교수, 조정관 한신대 교수 등이 정치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 |
예일대는 아이비리그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Residential System’이 잘 갖춰져 있다. 거의 전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학업에 몰두하고 우정을 다진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수업 외 시간에도 항상 열띤 학문적 토론이 이어진다. 그래서 기숙사도 ‘Yale College’로 불린다. 17세기 중반부터 코네티컷 지방에 목회자 양성 학교의 설립을 구성하던 중 1701년 목사 10명이 제각기 소지하던 책자들을 들고 와 학교 문을 연 것이 예일의 시작이었다. 당시 학생 수는 단 1명뿐이었고 교장 그리고 강사 1명으로 한 목사의 집에서 개강했다. 그 후 1916년 현재의 뉴해이븐 자리로 옮기게 됐다. 당시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던 이 학교에 예일(Elihu Yale)이라는 상인이 상품들을 기증했고, 이를 팔아 562파운드를 모으게 되자 학교 이름을 예일로 바꾸게 됐다. 처음에는 인문계 과목을 중심으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학교 정책에 전념했다. 시일이 지나면서 유럽의 새로운 학문의 영향을 받게 되고 또 목회자가 되려는 학생의 수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학교가 계속 발전하고 또 성장해 오면서 이 학교에는 의대(1810년), 신학대(1822), 법대(1824), 문리대대학원(1847), 미술대(1865), 음대(1894) 등이 세워졌다. 20세기 이후 산림학대(1900), 간호대(1923), 연극학대(1955), 건축대(1972), 경영대(1974) 등이 추가됐다. 문리대대학원은 1861년 미국 최초로 박사학위(Ph.D.)를 수여했고 1854년 동양인(중국 태생)에게 미국 대학에서 처음으로 학사학위를 수여한 것도 예일대다. 대학원에서는 여학생의 입학이 허용됐지만 학사학위 과정의 예일칼리지는 1969년에야 처음으로 여학생을 입학시켰다. 초창기에 재정난을 겪었던 이 대학은 현재 2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확보해 미국 대학 중 네 번째 부자이기도 하다. 미국 대통령 부시 외에도 예일대 졸업생 중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다. 우선 미국 내 주요 산업체 CEO 중 예일 출신이 가장 많다. 또 미국의 8만여 개 산업체의 중역 중에서도 예일 출신이 제일 많은 것으로 보고돼 있다. 예일대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하버드나 프린스턴대 학생 못지않게 대단히 우수하다. 학사학위 과정에는 65개 전공 분야가 있다. 그중에서도 인문, 사회과학 분야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문학, 역사, 미술사, 종교학 등이 뛰어나다. 음악과 연극분야도 잘 알려져 있다. 정치학, 외국어(독일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 심리학 분야에도 쟁쟁한 교수들이 있다. 올해 개교 306주년을 맞은 예일대는 뉴잉글랜드의 콜로니얼식이나 빅토리안 고딕식 건물이 줄지어 있는 캠 퍼스가 인상적이다. 학기가 시작되면 2주간의 소위 ‘강의실 쇼핑’ 기간이 마련된다. 학생들은 자신이 지 원한 클래스에 들어갔어도 이 기간 내에는 다른 강의실에 드나들며 마음에 드는 교수나 강의실 분위기를 선택할 수 있다.
美 CEO 들 예일 출신 가장 많아 대학 내 43개 도서관에 약 1140만 권의 각종 도서와 980만 점의 마이크로필름 자료 및 24만여 점의 시청각자료, 6만6867종의 정기간행물이 비치돼 있고, 부설시설로는 미술관, 자연사박물관, 플라네타리움, 라디오방송국, 베이네케 희귀본·필사본 도서관, 마시식물원을 비롯해 많은 연구센터가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 부자, 클린턴,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예일대 출신이다. 구한말 태프트 조약의 당사자인 윌리엄 태프트(27대, 1909~13) 대통령이 로스쿨 출신으로 퇴임 후 예일대 법대 교수를 역임했다. 모스 부호를 만든 새뮤얼 모스(Samuel Morse)와 1828년 웹스터 영한사전을 편찬한 노아 웹스터도 예일 출신이다. 국내 예일대 동문은 300명을 웃돈다. 동문 사이에서 ‘원로’로 꼽히는 동문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정치학 박사)와 고 박성용 전 금호그룹 회장(경제학 박사)이다. 동문들은 두 사람을 예일대 동문의 ‘양대 축’으로 생각한다. 이 전 총리는 서울대 법대에 다니다 미국 에모리대에서 학부 생활을 했다. 예일대에서는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에모리대 조교수,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등을 거쳐 1988년 국토통일원 장관으로 입각한 후 대통령 정치담당 특보, 주영 대사, 주미 대사, 통일부총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지금은 중앙일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으면서 중후한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고 박 전 회장은 캘리포니아대 조교수,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등을 거치면서 학계와 관계에서 경험을 쌓은 뒤 72년부터 금호그룹에 발을 디뎠다. 그는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화가들과 음악 영재를 키우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음악인들을 열렬히 후원했던 옛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 하지에 비유돼 ‘한국의 에스테르 하지’라고 불렸다. 예일대 동문 중에는 유난히 고위 공직자가 많았다. 기획예산처·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한 장승우(경영학 석사)씨,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경제학 석사), 정종욱 전 주중 대사(정치학 박사),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 금융통화위원(경제학 박사), 이동걸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김기환 전 상공부 차관(역사학 석사), 임내규 전 산업자원부 차관(경영학 석사) 등이 대표적이다. 장승우 전 장관은 한국투자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겸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광주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 중용됐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예일대 경제학 석사 출신으로 현재 청와대 비서실 정책실장을 맡고 있다. 변 실장은 공기업을 포함한 정부 세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으며 자전거 전용도로 확대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청와대 내 태스크포스를 가동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태동 위원은 성균관대 교수, 한국금융학회장 등을 거치며 학계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시장 실패 해결에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경제철학을 갖고 있다. 김기환 전 차관은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UC버클리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을 거치며 현실 경제 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정계 인사 중엔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이 있다. 한나라당 경기도당위원장으로 당내 소장개혁파의 중심인물로 성장하고 있다. 이종률 통일시대연구소 이사장도 예일 출신이다. 이 이사장은 1979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후 청와대 대변인, 정무1장관 등을 거쳤다. 김영삼 정부 시절 국회의원을 지낸 인권변호사 강신옥씨도 예일대 법대에서 수학한 경력이 있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내다 정계에 입문, 민주당 대표를 지낸 장상씨도 예일대에서 수학했다.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에는 예일대 신학대학원 ‘자랑스러운 동문인 상’을 받았다.
경제계서도 활약 두드러져 예일대 신학과 출신으로는 석사학위를 받은 신낙균 전 의원이 있다. 신 전 의원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을 맡아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을 펼쳤으며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맡으며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문화관광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재계와 경제계에서도 예일 동문들의 활약이 상당하다. 다만 학풍상 정계, 관계, 학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다. 조현준 효성 사장은 예일대에서 정치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효성은 그룹 경영권 승계 작업이 한창이다. 장남인 조현준 사장에게는 스판덱스 등 기존 섬유·화학 부문을, 2남 조현문 부사장에게는 중공업을, 3남 조현상 전무에게는 수입자동차 딜러인 더클래스효성과 금융회사인 효성캐피탈 등 기타 사업군을 각각 맡겨 상호 시너지를 극대화하면서 사업을 특화해 나가고 있다. 박재하 모토로라코리아 부회장도 예일 출신이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점이 이채롭다. 미국 해사에 유학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예일대에 진학해서는 경영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외 이찬구 한라그룹 상임고문, 김한 유클릭 회장, 임래규 코코실버 회장이 예일 출신이다. 장일형 한화경영기획실 부사장은 전략홍보담당을 맡고 있고 이양동씨는 어헤드모바일 대표이사 사장이다. 김세진 한국채권평가 대표이사 사장, 김종희 한국전자거래진흥원 원장, 박성현 알짜마트닷컴 대표이사 사장도 예일에서 수학했다. 예일대 동문 중엔 기업보다는 학계 쪽에 진출한 사람이 훨씬 많다. 윤후정 이화학당 이사장, 권태준 서울대 명예교수,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박문옥 단국대 명예교수, 백낙호 서울대 명예교수 등 원로 교수들이 학계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다. 예일 출신들은 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과 음악 등 예술 분야에서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정치학 분야에서는 서강대 신윤환·유석진·김재천 교수가 있고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이삼성 한림대 교수, 신욱희 서울대 교수, 조정관 한신대 교수 등이 정치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경제학 분야에는 국내외 학계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박준용 성균관대 교수를 비롯해 황윤재·김재영·박상인 서울대 교수, 김창식·이인표·최병일 이화여대 교수, 이우헌 경희대 교수 등이 포진해 있다. 박준용 교수는 올해 2월 한국계량경제학회 2007년 회장으로 선임됐다.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우헌 교수는 MBC 대선 보도 자문단에 포함돼 대선 후보들의 경제 정책을 검증하고 스크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 예일대 학풍은 시장 실패 해결을 위해 정부가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장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며, 국제경제학과 계량 경제학 분야에서 높은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경영학에서는 신동엽 연세대 교수, 인류학 분야에서는 정종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이 유명하다. 신 교수는 예일대에서 조직행동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의 권위자며, 정종호 교수는 중국 사회와 중국인의 변화에 학문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발전과 빈부격차, 그 대안들을 분석하는 데 탁월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사회학 분야에서는 진승권·최샛별 이화여대 교수, 박영신 연세대 전 교수 등이 있으며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조수철 서울대 의대 교수 등이 있다. 정신과 전문의인 조수철 교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베토벤 전문가로 이름이 높으며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자연과학에서는 이일항 인하대 정보통신대학원 교수, 강석진(수학)·김영훈(수학)·이은(화학) 서울대 교수, 김용철 연세대 천문학과 교수 등이 있다. 특히 이일항 교수는 영국 왕립 전기전자공학회(IEE) 등 세계적인 권위의 저명 학회 4곳에서 ‘펠로’로 추대돼 화제를 모았다. 강석진 서울대 수학과 교수는 축구광으로 잘 알려져 있고 최근 수학의 대중화를 위한 서적을 출간, 고정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문사이기도 하다. 음악 분야에서는 박경옥 한양대 교수, 배일환 이화여대 교수, 손인경 연세대 강사, 이민정 건국대 교수, 유시연 숙명여대 교수, 작곡가 김지영씨 등이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지영씨는 프랑스 유명 연주자인 요요마가 주관하는 실크로드 프로젝트 등에 참가했으며 김미희 예술종합대학 교수는 우리나라 연극 비평에서 손꼽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잊을 수 없는 나의 모교 |
“담쟁이 덩굴 캠퍼스에서 여한 없이 공부”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 ▶ 약력 1968년생, 예일대학원 정치학 박사, 현 고려대 국제학부 조교수 | | 방 열쇠를 받아 들고 들어선 기숙사 앞뜰에는 수도원에서나 볼 법한 담쟁이가 빽빽이 깔려 있었다. 불안감과 기대감으로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선잠을 깨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마치 중세의 성곽과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들이었다. 예일대에서의 첫날은 시간을 거슬러간 느낌으로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어언 8년 가까운 시간을 대학원 생활과 교수 생활을 거치면서 예일에서 보내게 되었다. 예일대의 학생 규모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학부의 경우 일년에 1300명 정도만 선발하니까 한국의 주요 대학 규모의 3분의 1도 채 안 되는 셈이다. 대학원 역시 한 학년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필자가 다녔던 정치학과 대학원에는 14명 정도가 입학했고, 많이 뽑는 해에도 20명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규모가 작은 만큼 인간적으로는 더 각별하고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이미 수많은 경쟁을 뚫고 엄격하게 선발된 학생인 만큼 학생 서로 간의 경쟁을 강조하기보다는 자유로운 학풍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학원생들에게는 어느 교수 밑에서 공부하느냐고 묻기보다는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work with)는 질문을 종종 던진다.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준 학자로서 대접해 주는 것이다. 학부의 거의 모든 생활은 12개로 나뉜 칼리지(College)라고 불리는 기숙사를 통해 이뤄진다.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보다 폭넓은 지식을 공유하고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예일의 힘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도서관은 자신의 취향에 맞춰 현대식 시설부터 고전적인 서재와 같은 열람실을 마치 뷔페식당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시험 기간이면 도서관 자리 하나 맡기 위해 새벽부터 뛰어다니던 한국의 대학생활에 비해, 안락한 소파에 푹 파묻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학문을 하는 큰 즐거움이었다. 단지 아무리 읽어도 줄지 않을 만큼의 책과 논문을 과제로 받았던 것을 뺀다면. 지금 생각하면 무식이 용감이라고 그때는 그냥 막무가내로 공부했던 것 같다. 정신 없이 진행되는 세미나에서 “과묵한 동양학생”이 발언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와 집중을 요했다. 가끔은 몇 마디를 하기 위해 두 시간을 조마조마하게 버티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수업을 마치기도 했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과 단타 위주로 타점을 올리는 나름의 요령을 터득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눈치가 늘어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수업에 대한 감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한 것은 학위 과정이 거의 끝난 뒤였다. 강단에 서서 수업을 진행하는 지금에 와서 문득문득 “아, 그때 그 얘기가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쨌든 여한 없이 공부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 좋은 교수진과 환경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한다. 교과서에서 보던 낯익은 이름들을 학교에서 직접 마주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정치학계의 전설과 같은 로버트 달(Robert Dahl)이나 후안 린츠(Huan Linz) 교수는 칠십이 훨씬 넘은 고령에도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세미나를 하고, 포도주를 들고 와서 대학원생들과 나눠 마시며 수업을 진행하던 데이비드 엡터(David Apter) 교수도 기억에 남는다. 필자가 늘 고맙게 여기는 것은 주위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인복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도교수였던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교수는 학내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소문난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겸손하면서도 진지한 대가들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네에서 초등학교 축구 코치로 더 알려진 폴 케네디(Paul Kennedy) 교수는 봄, 가을이 되면 철새 구경(bird watch)을 가자고 종종 e-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다니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클린턴 대통령과 힐러리 여사가 학창시절 자주 다녔다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상화된 대통령 투어도 흥미 있는 일이었다. 인구 5만 명의 유럽 소국인 안도라에서 온 20대 동료 유학생은 재학 중 유엔대사로 발령을 받아 종종 수업에 들어오지 못했다. 본인이 쓰는 비용이 안도라 중앙은행에서 결제되는 이 VIP 친구는 귀국 후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분명 안도라 대통령이 될 것으로 모두 기대하고 있다. 예일에서 보낸 8년 동안 대학원에 갓 입학한 유학생에서 강단에 선 교수로 신분이 여러 차례 격상돼 왔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처음 도착한 기숙사 방에서 희망과 불안이 교차된 심정으로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창 밖을 내다보던 그 모습이 또렷이 남아 예일에서의 유학생활을 상기시키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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