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철강기업 동국제강이 창립 53주년을 맞았다. 1954년 조그만 철선(鐵線) 제조회사로 출발해 매출 3조원이 넘는 대기업이 된 동국제강은 창업주 장경호 회장부터 장상태, 장세주 회장으로 이어지는 3대 오너 경영으로 지속 성장하고 있는 국내 대표적 장수기업이다. 현재 동국제강그룹 계열사는 해외법인을 포함해 모두 25개다. 동국제강과 유니온스틸 등 주력 기업 외에도 물류기업(동국통운·국제통운), 기계제조기업(국제종합기계), IT기업(DK유아이엘·DK유테크·DK유엔씨) 등이 있다. 동국제강은 5년 연속 매출 신기록을 기록하고 있다. 2001년과 2006년을 비교하면 매출은 70% 성장, 당기 순이익은 1327% 성장하는 성과를 보였다. 70년대와 90년대 1, 2차 오일쇼크와 외환위기를 거치며 사라져 갔던 수많은 민간 철강회사의 쇠락 속에서도 동국제강은 건재하다. 막대한 초기 투자비와 경기 변동 영향을 크게 받는 철강기업임에도 생존을 넘어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동국제강의 심오한 ‘내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최근 서울 을지로 사옥에서 만난 동국제강 관계자는 “직원들은 창업자 고 장경호 회장의 불심(佛心) 덕에 회사가 성장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1세기 기업 성장의 원천이 불심이라니? 직원들이 작고한 지 32년이 지난 창업자의 불심을 아직까지 언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장경호 회장은 기업인이기 이전에 불교인이었다. 17세 때 막내동생의 죽음을 목격하고 불교에 귀의한 그는 기업을 경영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절에 들어가 100일 수행 정진에 들어갔었다. 1925년 통도사에서 첫 안거를 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잡았고 수시로 금강산 미하연, 통도사, 청도 운문사 등에서 안거와 정진을 했다. 이후 그는 대중 포교당인 대원정사를 설립하고 73년엔 대원불교대학까지 설립했다. 사재 30억원을 털어 대한불교진흥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의 불심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그의 둘째아들 장상문씨가 89년 불교진흥원 이사장에 취임한 뒤 불교방송을 개국하기도 했다. 장 회장은 1929년 대궁양행을 설립해 가마니 사업을 시작했다. 1935년에는 남선물산을 세워 수산물 도매업 등을 했다. 그러다 남선물산 창고에 신선기(伸線機)를 설치해 철사와 못을 생산하던 재일교포가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자 장 회장에게 신선기를 넘기게 된다. 이때 동국제강의 모태가 된 조선선재가 탄생했다. 한국전쟁 후 재건사업으로 못 수요가 폭발하자 조선선재는 큰 돈을 벌게 된다. 이후 장 회장은 1954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동국제강을 설립하면서 처음으로 민간 제철소 시대를 열었다. 장 회장의 불심은 기업 경영에서도 빛을 발했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근면과 검소, 절약으로 내실경영을 하라는 불교철학을 경영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것. 조선선재를 운영할 때 돌아다니는 못 하나도 허투루 버리는 것을 허용치 않던 그는 지남철을 들고 다니며 못을 줍곤 했다. 그가 생전에 가지고 다녔던 지남철은 지금도 동국제강 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그의 청빈함에 대해 김용주(전 전남방직 회장)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그 흔한 양복도 한 번 안 입고 검소한 무명 한복으로 사업에만 열중했다. 그는 일본인이 만들어 파는 수건이 비싸다고 우리 손으로 짠 무명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정도였다.” 현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도 검소했던 조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할아버지는 휴지를 쓰고 나면 한 통에 모아두었다가 햇볕 나는 날에 마루에 깔아 말리셨다. 그리고는 말린 휴지를 다시 접어 휴지통에 쌓아 놓으셨다. 어린 우리들이 ‘할아버지, 더러워요’하고 말하면, ‘이렇게 절약해야 복이 오는 거지, 이런 노력 없이 복이 오는 게 아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 땅의 유마 대원 장경호 거사』中) 그가 말한 대로 복을 쌓은 덕일까. 1963년 동국제강은 부산 용호동 공장을 확장하면서 대규모로 현대화된 생산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50t 용광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제강설비를 이용해 철강 중간소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6년 베트남에 철강재를 1000만 달러어치 수출하기로 미국과 합의하면서 베트남 특수가 일었고, 동국제강 역시 활기찬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 호황은 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고 철근 수요가 폭발함에 따라 동국제강은 국내 5대 기업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덕에 1964년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사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장 회장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국내 최초 항구적 무파업 선언 그는 박 대통령에게 “종합제철소 건설은 민간기업이 하기에는 역부족인 사업이며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욕심만으로 종합제철소 건설을 무리하게 추진했다면 지금의 동국제강 역사는 다시 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창업자의 앞날을 보는 혜안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장경호 회장의 뒤를 이은 건 장상태 회장이다. 창업자의 셋째아들인 장상태 회장은 당시 부흥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다 1956년 동국제강에 입사, 64년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2세 경영’을 시작했다.
장상태 회장은 국내 첫 후판공장 설립, 부산신철(현 한국특수형강) 설립, 동일제강 인수, 한국철강·한국강업 인수, 연합철강·국제기계·국제통운 인수, 기업 상장, 직류전기로 도입, 포항 후판공장 준공, 국내 첫 항구적 무파업 선언, 부산제강소 포항 이전, 일본 가와사키제철(현 JFE스틸)과의 포괄적 협력 체결 등 굵직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회사는 1994년 선언한 항구적 무파업 약속을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내고 있다. 이런 노사화합의 뿌리도 창업자의 정신에 기인한다는 평가다. 장경호 회장은 평소 여섯 아들을 불러놓고 “나와 너희들은 경영자의 위치에 있지만 인연이 있어 이 기업을 맡아 관리하고 있을 뿐임을 명심하라. ‘나(경영자)와 너(근로자)’의 경계를 없애는 것만이 공존하는 길임을 알라”고 강조해 왔다. 동국제강 한 관리직원의 회고다. “80년 사북사태가 나면서 동국제강도 엄청난 노사분규에 시달렸다. 공장 내에 파업을 결의하자는 붉은 삐라가 돌아다녔을 정도였다. 관리직원들은 ‘우리가 먼저 보시한다는 생각을 갖자’고 뜻을 모았다. 우리가 손을 내밀면 공장 근로자들도 마음을 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간식시간이면 따끈따끈한 빵을 주기 위해 관리직원들이 시내까지 승용차를 몰고 가 빵을 사왔고 공장 근로자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수시로 설문조사를 하며 소통을 해나갔다. 항구적 무파업 선언은 이런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도 장경호 회장은 직원들을 내치기보다 끌어안았다. 97년 11월 어느 날 장 회장은 과장급 이상 간부들과 전 임원을 한 자리에 불러 “40년 경영을 해봤지만 듣도 보도 못한 놈을 처음 겪으니 답답하다. 여러분들이 협의해 좋은 결론을 내달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이 얘기를 들은 참석자들은 다음날 전부 사직서를 써서 회장에게 제출했다. 사표를 받아 든 회장은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사람을 내쫓나. 나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먹고사는 방법을 내라고 했지 누가 사표를 내라고 했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후 장 회장은 일본에 가서 사업 구상을 하고 돌아온다. 이후 동국제강은 중국 철강 제조업 진출, 일본 가와사키제철과 포괄적 협력 체결 등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아냈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 때 회사를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동국제강에서 사람이 나갔을 때는 철강 유통업이 가장 잘됐다는 93, 94년이었다. 모두 개인 의지에 의해서였다.
2008년 그룹 매출 7조원 목표 동국제강은 2000년 용호동 시대를 마감하고 포항 시대를 시작했다. 이해 4월 장상태 회장이 별세했다. 이때 처음으로 포항제철 사장을 역임한 김종진씨를 부회장으로 영입,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취임 1년 만인 2001년 7월 헬기를 타고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소를 방문하려다 안타깝게도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장상태 회장의 장남인 장세주 회장이 취임하면서 다시 오너 체제로 돌아간다. 장세주 회장은 1978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 경리부·일본지사·인천제강소장·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98년 부터 대표이사를 맡아 왔다. 입사 22년 만인 2000년 사장으로 승진하고 1년 만인 2001년 회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는 2004년 7월 동국제강 창립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CI(기업 이미지 통합)를 선포하면서 2008년 그룹 매출 7조원 달성 목표를 내걸었다. 2005년 휴대전화 부품 제조업체인 유일전자(현 DK유아이엘)와 시스템통합업체인 탑솔정보통신(현 DK유엔씨)을 인수하는 등 IT영역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창업자 장경호 회장이 철강이라는 신산업을 미리 예견하고 불심에 바탕을 둔 기업정신으로 착실한 자본축적 및 투자를 해왔다면 장상태 회장은 사업의 집중화와 개혁을, 3세대 장세주 회장은 신규사업 진출과 글로벌로 승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동국제강의 미래가 낙관적이기만 할까. 세계 철강 경기는 언제까지 호황을 누릴지 알 수 없다. 대량화와 가격 경쟁력으로 공습하고 있는 중국 철강업과의 한판 경쟁도 남아 있다. 특별한 독자 기술없이 2차 가공 철강업이 주력인 동국제강으로선 호락호락한 환경이 아닌 것이다. 하루빨리 신성장동력을 찾지 못하면 세계 철강 시장 속에서 존재가 자꾸 줄어들 수 있다. 동국제강은 2005년 말 브라질에 150만t 생산능력의 슬래브 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지난해는 세계 3대 철강사인 일본의 JEF스틸과 전략적 제휴를 강화했고 올해는 당진에 연산 150만t의 후판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앞으로 3년간 후판을 중심으로 1조원 상당의 투자가 진행되는 셈이다. 최근 몇 년간 동국제강의 발 빠른 행보가 향후 100년 기업으로의 도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지수다. 이는 3세대 장세주 회장이 후대를 위해 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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