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가니 경영이 보인다
책 따라가니 경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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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독오거서형
“한 달에 10권은 읽어야 사장이지.” 경영자 중에는 무서운 독서광들이 적지 않다. ‘경영자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듯 이들의 열독은 지칠 줄 모른다. ‘홈플러스 신화’의 주역 이승한 삼성테스코 사장은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책벌레’ 경영자로 소문이 자자하다. 한 달에 평균 100권 이상은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이 엄청난 책을 모두 정독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눈코 뜰 새 없는 경영 일선에서 이 정도 섭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지인들과 직원들 모두 그의 폭발적인 독서량에 기가 질려 혀를 내두를 정도다. 후발주자로 출발해 단숨에 국내 할인점 업계의 2위까지 올라선 저력도 어쩌면 이런 가공할 독서량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이 사장이 이처럼 다독을 즐기는 이유는 시장의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의 독서 스타일은 세상의 온갖 상품과 트렌드를 간파해야 하는 할인점 사업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독서법은 한마디로 ‘박이정(博而精)’이다.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중요한 책은 정독하는 것이다. 그는 신간이 나오면, 우선 제목과 목차를 보고 통독할 것인지, 정독할 것인지를 신속하게 결정한다. 이장우 이메이션코리아 사장도 1년에 200권이 넘는 책을 독파하는 독서광으로 명성이 드높다. 한 분야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100권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의 책 욕심은 하늘을 찌른다. “100권을 읽고도 이해할 수 없는 분야는 200권은 읽어야 하고, 그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가 되고 싶다면 1000권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책으로 산을 쌓아 ‘득도’하라는 얘기다.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지만, 일단 100권 정도를 읽고 나면 그 다음엔 책 제목만 봐도 내용이 보이는 ‘매직 아이’가 생긴다고 한다. 삼성 경영혁신의 주역으로 ‘한국의 잭 웰치’로 불리는 손욱 전 삼성SDI 사장은 문학·역사·철학 책을 각각 200권은 독파해야 한다는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600권’을 경영자의 독서 목표로 제시할 만큼 재계의 독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1980년대 초, 삼성전자 기획실 근무 시절엔 마쓰시타 관련 서적만 무려 150권이나 독파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수독오거서’를 고집하는 경영자들의 공통점은 철저한 시간관리를 한다는 사실이다. 일과를 포기하고 책을 읽을 수 없을진대 휴식과 자투리 시간까지 쪼개서라도 양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간을 아껴 효율적으로 쓰는 습관이 몸에 배게 마련이다. 예컨대, 이장우 사장은 지방 출장을 갈 때 비행기를 타지 않고 KTX를 탄다. 탑승 절차가 간소해 그만큼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독 경영자들은 보다 많은 책을 읽는 방법론도 개발했다. 손 전 사장의 경우, 여러 권의 책을 놓고 목차에서 모르는 부분만 찾아 따로 읽어 동시에 읽는 독법을 찾아냈다. 예컨대 경영서적의 경우 겹치는 대목이 많고, 같은 분야라면 내용이 연결된 경우 종합적으로 읽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손에 잡히는 책이라고 모두 정독하려든다면 몇 권 읽지도 못하고 지쳐버리고 만다는 것이 손 전 사장의 얘기다.
▶직원전파형인 최태원 회장, 심영섭 대표, 권경현 사장.(왼쪽부터) |
■ 직원전파형
“당신들도 한번 읽어봐.” 최태원 SK 회장은 미래경영과 리더십 관련 책과 분야별 전문서적을 탐독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독서열은 선친인 고 최종현 회장의 영향이 크다. 선친은 경영에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강조했고, 최 회장은 이를 책에서 얻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책에서 얻은 지식을 전파하는 데도 최 회장은 공을 들이고 있다. 임직원과 대화하거나 토론할 때 경영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신입사원과의 대화’에서는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전문성을 익혀나가는, 패기와 도전을 배울 수 있는 책”이라며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을 추천했다. 그룹 회장이 어려운 경영서적이 아닌 만화책을 추천하자 신입사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사내에 ‘초밥왕’ 읽기 열풍이 일기도 했다. 『미스터 초밥왕』은 신라호텔이 사내교육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홀 서빙부터 시작해 초밥의 달인에 오른 주인공의 장인정신과 서비스 정신을 배우자는 취지에서였다. 경영자가 무슨 책을 읽는지는 임직원들의 관심사임에 틀림없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경영자와 쉽게 만나 수시로 의견을 나눌 수 없는 대다수 임직원에게 경영자가 읽은 책이나 읽고 있는 책은, 경영자가 지금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심중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경영자가 읽는 책이 전 직원의 필독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경영자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경영철학이나 방향, 사업비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책을 추천하는 것이다. 시시콜콜, 구구절절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얘기를 책을 통해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영섭 우림건설 대표는 책을 추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심 대표는 매월 2000여 권의 책을 임직원과 외부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물론 자신이 읽고 충분히 좋은 책이다 싶은 것을 골라서 준다. 그냥 책만 주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감명 깊은 구절을 편지지에 친필로 써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짧은 기간에 업계 12위의 성장 신화를 일궈낸 것도 이런 정성스러운 독서경영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적극적으로 사내에 독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CEO도 많다.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의 권경현 사장은 2002년 처음 부임했을 때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책을 파는 기업인데도 이렇다 할 독서 지도 프로그램조차 없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직원들인데도 정작 책을 즐겨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자장면 집 종업원이 자장면에 질린 격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매달 한 차례씩 독서강좌를 열고, 매주 팀장들과 독서 토론회를 운영했다. 사장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처음에 달가워하지 않던 팀장들도 서서히 독서와 토론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나중엔 말하지 않아도 팀장들이 팀원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직원들이 책과 가까워지자 책을 관리하고 고객을 응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권 사장은 고객들에게도 “자녀가 책 읽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강조한다. 준오헤어의 강윤선 사장도 직원들 사이에서 독서전도사로 정평이 난 경영자다. 강 사장도 처음에는 자신만 열심히 책을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직원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상식 수준의 지식에도 둔감하다는 느낌을 받고, 큰일이다 싶었다. 헤어디자이너는 장시간 고객의 머리를 만지며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객의 얘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고객에게 유익한 얘기를 많이 해줄 수 있으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 사장은 그때부터 자신의 독서습관을 직원들에게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도록 한 다음, 반드시 A4 용지 두 장 정도의 독후감을 받아냈다. 인터넷에서 서평을 긁어 짜깁기한 리포트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김치형 SK가스 사장은 중국 사업을 고민하다 중국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적 경험을 제공하는 책을 한 권 찾아냈다. 『음담패설』이란 이 책은 거침없는 음모와 담대함으로 세상을 제패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 사장은 “상황판단 능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는 다양한 매뉴얼을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분명하다”며 “세계가 하나의 시장을 이루고 있는 글로벌 시대에는 상대방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이 책을 직원들에게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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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창조·응용형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허영호 LG이노텍 사장은 독서의 양은 많은 편인데 점점 기억되는 양이 감소해 정독하면서 참고할 부분은 책 첫 페이지 공백에 해당 페이지를 기록해 두거나 목차에 표시해 두고 별도로 메모한다. 허 사장은 책에서 배운 지혜를 임직원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2001년 침체한 조직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펄떡이는 물고기처럼』(스티븐 C 런딘)이라는 책을 대량 구입해 전 사원에게 나눠주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2002년에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를 가지고 과정을 개발해 운영했다. 이를 통해 전 구성원 사이에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심영섭 우림건설 대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브루노 바우만 지음)을 읽고 나서 인간한계의 극점과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이를 경영에 접목시켰다고 한다. 서두칠 동원시스템즈 부회장은 한국전기초자 사장 시절, 책에서 혁신의 추진력을 얻은 대표적인 경영자다. 1997년 당시 그는 600억원 적자 상태인 회사를 송두리째 바꾸는 대수술을 감행하고 있었다. 초기에 여기저기서 변화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갈등의 순간, 평소 독서를 즐기던 그는 우연히 하버드대 교수 존 코터가 쓴 『변화의 리더』를 읽고,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방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3년 만에 300억원 흑자기업으로 전환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자신이 검증한 성공스토리를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란 책으로 엮었다.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의장도 독서광이자 메모광이다. 의대 출신인 그가 급격하게 커진 안철수연구소를 효과적으로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서의 힘이었다. 그의 경영 바이블은 짐 콜린스가 쓴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다. 이 책은 안 의장에게 한번 흥하다 사라지는 기업이 아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100년 기업이 되는 전략을 가르쳐 주었다. 안 의장 역시 나중에 『영혼이 있는 승부』라는 성공스토리를 집필하기도 했다.
■ 명상·바이블형
“나만의 정신적 지주를 세운다.” 책은 생각의 동반자며, 정신의 산책이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번 은둔 휴가를 떠난다. ‘숨어 지내는’ 장소는 태평양에 인접한 미국 서북부 지방의 한 호숫가에 위치한 작은 2층짜리 별장이다. 그는 이 휴가를 ‘생각 주간(Think Week)’이라고 이름 붙였다. 1980년대 할머니 집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전략을 구상했던 것이 시초가 됐다. 그 뒤 그가 ‘생각 주간’을 통해 내놓은 전략들은 MS와 세계 정보기술(IT)업계에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 이때는 MS의 고위직 임원은 물론 가족까지도 접근금지다. 이때 그의 하루 일과는 간단하다. 하루 두 끼 식사하는 것과 임직원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는 것, 그리고 5시간 정도 잠자는 것을 빼면 하루 종일 책 속에 파묻혀 산다. 좋은 책을 발견했다 싶으면 꼬박 18시간이나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그의 책장은 세계 고전문학 작품들로 빼곡하다. 첨단 디지털 시대를 주도한 빌 게이츠지만, 그가 정말로 즐겨 읽는 책은 IT 전문서적이나 경영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의 성공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문학 없이는 내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컴퓨터도 있을 수 없다.” 그가 인문서적을 탐독하는 이유다.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는 빌 게이츠처럼 ‘생각 주간’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외부 출입을 좀체 하지 않는 이 회장에게는 자택이 빌 게이츠의 호숫가 별장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 최신 과학기술잡지와 함께 이 회장이 심취하는 것이 바로 책이다. 미국의 많은 성공한 경영자는 개인 서고가 있을 정도로 독서를 좋아하며 경영과 관련된 베스트셀러보다 문학이나 시집 등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18세기 신비주의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책을 충전을 위한 명상집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 경영자들은 성생활이나 은행계좌보다 개인 서고를 더 개인적인 장소로 만들어놓고 있다. 나이키 창업자인 필 나이트의 개인 서고는 본사 옛 사무실 옆에 있지만 서고 안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독서와 사색에 빠지며 경영전략을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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