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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terview] “창업자는 끝까지 사력 다해야”

[人terview] “창업자는 끝까지 사력 다해야”

보령그룹 창업자 김승호 회장은 올해 경사가 겹쳤다. 10월 1일은 보령제약 창업 50주년이 되는 날이고, 12월 31일(음력 기준)은 77세, 희수(喜壽)를 맞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기업으로도 장수(長壽)를 기념하는 해라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창업 50주년을 기점으로 100년 기업에 도전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김 회장을 이코노미스트가 만났다.
우담바라’는 3000년에 한 번 핀다는 상서로운 꽃이다. 이 우담바라로 추정되는 꽃이 지난 6월 종로구 원남동 보령제약 건물에 피어 한동안 화제가 됐다. 사옥 18층에 위치한 보령제약 창업자 김승호(76) 회장의 집무실에는 이 꽃을 찍어 놓은 액자가 걸려 있다. 한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찍어 김 회장에게 전달한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회장 접견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김 회장께 우담바라 얘기부터 꺼냈다.

-보령제약 터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담바라까지 피었으니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허허. 어쨌든 좋은 일이죠. 길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보령제약이 종로에 터전을 잡은 것부터가 저에게는 행운의 시작이었어요. 당시 종로는 국내 최대 시장이던 동대문시장을 근처에 두고 있어 유통의 중심지였지요.” 보령제약은 종로 5가의 ‘보령약국’이 모체다. 김 회장은 25세의 나이에 종로 5가 124번지에 5평짜리 점포를 얻어 ‘보령약국’ 간판을 걸었다. 약국 이름인 ‘보령’은 그의 고향인 충남 보령의 지명을 딴 것. 군대를 제대한 직후 집안 형이 종로 5가에서 운영하던 홍성약국의 일을 도와줬던 게 인연이 됐다. “개업 당시엔 반 전문가가 돼 있었죠. 약대를 나오진 않았어도 매일 약을 들여다보고 어깨너머로 약을 팔고 하면서 저절로 익힌 거죠. 종로 5가에서 약을 배웠으니 터전도 그리로 잡은 거고요.” 1957년 10월 1일. 약국 문을 처음 연 날이다. 김 회장 부부는 이날 막걸리 한 주전자에 돼지머리를 놓고 개업 고사를 지냈다. 그는 “어설프지만 가슴이 떨리고 진지한 제주(祭主)였다”고 회상했다. “너무 떨렸는지 약국 문을 밀고 들어오는 첫 손님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무슨 약을 사갔는지 정확히 기억을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손님을 배웅하고 난 후 갓난아기처럼 눈물을 흘렸던 건 기억이 납니다. 그날 첫 문을 열었을 때의 그 마음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보령약국 개업 당시 의약품 시장은 질서가 없었다.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수입 완제품이나 부정한 경로로 흘러나온 군수품, 원조 의약품 등이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형편이었던 것. 약값은 일정하지 않았고 자금 면에서 강점을 지닌 도매상들은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도매상으로부터 약을 받아 판매하는 소매상들은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가 힘들었다. 보령약국의 양 옆으로도 이런 대형 도매약국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로서는 살아나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대부분의 약국이 구색을 못 갖추고 있었고 불친절했습니다. 이 약점만 보충해도 손님을 끌 수 있겠구나 싶었죠. 없는 약을 찾으러 오는 손님들에겐 약속을 했어요. 내일 몇 시까지 꼭 구해 놓을 테니 오시라고요. 그래 놓고 자전거를 타고 온 시내를 누비는 겁니다. 결국 약을 찾아내 손님과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죠. 또 손님이 오면 무조건 친절하게 했습니다. 50년대에 이미 서비스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던 겁니다.(웃음) 약값도 적정 마진만 남기고 싸게 팔았어요. 어음보다는 현금 결제를 우선했고요.” 효과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로 5가 보령약국’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서울 변두리나 경기도에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령약국 성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은 ‘자전거 부대’로 불리는 중간도매상들이었다. “짐자전거 뒷자리에다 대나무로 엮은 상자나 빈 약품 박스를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던 자전거 부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조금 과장해 매일 아침 200~300대의 자전거가 약국 앞에 와서 북새통을 이뤘죠. 그들에겐 제약회사에서 약을 사다 변두리 약국에 파는 것보다 언제나 현금으로 약을 구입해주는 보령약국과의 거래가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하는 일이었어요.” 약국 개업 5년 만인 1962년. 보령약국은 이미 국내 최대의 소매약국으로 성장했다. ‘종로 5가를 지나는 행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보령약국에 가는 손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보령약국의 초기 영업 전략은 ‘고객 만족’이라는 아이템으로 후일 서울대에서 스터디 주제로 논의되기도 했다. 한국경영사학회는 사람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윤을 냈던 보령약국 초기 사업수완을 개성상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보령약국은 지금도 종로 5가에서 50년 명성을 지키고 있다. 현재 약국 경영은 그의 동생인 김경호 회장이 맡고 있다.

▶보령그룹 성장의 발판이 된 보령약국 전경.



용각산· 겔포스 신화 창조 1963년 11월 11일. 약국 성공에 용기를 얻은 그는 자본금 50만원을 투자해 도산위기에 빠져 있던 동영제약을 인수했다. “약국 경영 7년을 하다 보니 유통 판매업보다 생산업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생산업은 산업적 측면에서도 국가에 더 보탬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당시 유한양행이 가장 큰 제약회사였죠. 동아제약도 있었고요. 그들에 비하면 후발업체였던 셈인데…. 시작부터 힘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번듯한 공장을 세울 자금도, 훌륭한 설비를 들여올 여유도 없었다. 꿈은 장대하고 가진 건 없는 가난한 제약업계 사장일 뿐이었다. “동영제약은 설립 몇 년 만에 도산위기에 빠진 회사였어요. 사실 그 회사로부터 인수한 건 ‘동영제약’이라는 상호와 제약업 허가뿐이었죠. 사무실은 대충 만들었어도 공장이 문제였어요. 우리 집 마당이라도 써야겠더라고요. 종로구 연지동 193의 7번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주소입니다. 50여 평 정도의 집 안에다 블록으로 어설프게 공장을 짓고 정제기와 다의기, 분쇄기를 들여와 설치했어요.”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한때 크게 유행했던 보령제약 ‘용각산’의 TV 광고 문구다. 이 히트상품은 자기 집 마당에서 약을 짓던 그의 열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용각산은 해방 전에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제품이었는데 일본에서 공급받을 길이 없어지자 20여 년간 국내에서 잊혀져 왔던 제품이었습니다. 기술제휴를 통해 국내 생산에 성공한다면 암거래를 없애는 동시에 국내의 잠재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67년 6월 26일. 일본인 기술자들이 입국해 기술 자문을 한 지 20여 일 만에 보령제약이 만든 용각산이 탄생했다. 첫 생산량은 5만 갑이었다. “20여 명 정도였던 당시 영업사원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바쁘게 뛰어다녔죠. 신바람 났었는데…. 1년이 채 안 돼 15만 갑 판매라는 기대 이상의 실적을 올렸으니까요. 주문 폭주로 공장을 풀 가동시켜야 했죠.” 용각산이 태어난 해인 67년 10월. 보령제약은 1980여만원의 매출을 기록해 전년 대비 3배 이상 성장했다. 제약업계의 기틀과 규모를 제법 갖춘 셈이다. 이후 심장약 ‘구심’, 아이들의 필수약품이었던 ‘기응환’이 나란히 성공을 거두면서 보령제약은 생약 전문제제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972년 3월. 회사는 또 하나의 전기를 맞게 된다. 프랑스의 비오테락스와 기술제휴로 세계적인 위장약이었던 ‘겔포스’ 생산에 돌입한 것. 당시 위장약으로는 한독약품의 훼스탈과 동아약품의 베스타제, 일동제약의 암포젤엠 등이 있었다. 겔포스는 위장약 후발주자였던 것. 하지만 고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생산 첫해에 6000여만원에 그쳤던 겔포스 매출은 불과 4년 후인 79년엔 무려 10억원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80년에는 16억원을 넘어섰다. 발매 5년 만에 소화기관용 약품 분야에서 국내 생산실적 랭킹 2위로 올라선 것. 그는 메모광이었다. 전 세계가 다 회사의 새로운 시장이고 아이디어 창고라는 생각을 했다. 국내든 해외 출장이든 보고 들은 것을 메모지에 빼곡히 쓰는 습관 덕택에 출장 한 번 다녀오면 메모지 정보가 쌓였다. 그가 겔포스를 발견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여기에 영업사원들의 적극적 노력과 탁월한 광고, 담뱃갑 형태의 박스 등이 겔포스 신화창조에 힘을 보탰다. 겔포스는 지금까지 보령제약의 스테디 상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50년 기업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그는 77년 안양공장 수해 사태를 들었다.


보령그룹은… 김승호 회장이 1957년 종로 5가에 설립한 ‘보령약국’이 모체다. 1963년엔 보령제약을 세우면서 40여 년간 용각산, 겔포스엠, 구심 등 국민적 스테디셀러 치료제를 생산해 왔다. 1979년 자회사로 보령장업(현 보령메디앙스)을 설립해 누크 등 유아용품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종합 커뮤니케이션회사 킴즈컴, 종합 유통회사 ㈜보령, 첨단 생명공학 산업을 주도하는 보령바이오파마, 정보통신전문업체 BR네트콤, 건강기능식품 생산업체인 ㈜보령수앤수 등을 차례로 설립, 제약에서 정보통신 분야까지 7개 계열사를 둔 종합그룹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보령제약 매출액만 1800억원에 달한다. 그룹 총 매출은 3700억원으로 2009년까지 1조원을 돌파한다는 목표다.
보령그룹 50년
1957년 보령약국 개업 1963년 보령약품㈜ 창립(동영제약 인수) 1966년 보령제약㈜으로 사명 변경 1967년 성수동 공장 신축 ‘용각산’ 생산 발매 1969년 심장약 ‘구심’ 생산 발매 1974년 안양공장 신축 1975년 위장 장애 개선제 ‘겔포스’ 생산 발매 1979년 보령장업㈜ 창립 1982년 보령중앙연구소 설립 1983년 보령제약,매출액 200억원 돌파 (제약업계 10대 메이커 진입) 1986년 보령장업 반월공장 신축, 킴즈컴 창립 1988년 보령제약, 증권거래소에 주식 상장 1990년 ㈜보령 창립 보령바이오파마 창립 보령제약 반월 KGMP 신축공장 준공(안양공장 생산시설 이전) 1994년 보령빌딩 준공(종로구 원남동 66-21) 1996년 비알네트콤 창립 1997년 보령장업, 보령메디앙스㈜로 사명 변경 2000년 보령제약 국내 최대 항암제 발효 공장 신축 2005년 보령수앤수 창립 2006년 보령제약그룹 역사관 ‘중보보령관’ 개관(충남대학교 국제교류관)
“30년 만에 가장 많은 비가 왔던 해였어요. 밤새 내린 비가 안양천 지류인 호계천을 범람시켰고 거센 물줄기는 하천 변에 위치한 보령제약 공장으로 쏟아져 들어왔죠. 비가 그친 다음날 아침 공장으로 달려갔는데…. 참담했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죠.” 안양공장 피해액은 12억원으로 집계됐다. 수해를 당하기 직전인 76년 보령제약 매출이 14억원 규모. 아무도 보령제약의 재기를 장담하지 못했던 그 상황에서 200여 명의 직원은 묵묵히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모두들 장화로 갈아 신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제품들을 주워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던 것. 그 역시 직원들과 함께 장화를 신었다. 용각산과 겔포스를 기억하는 소비자들의 성금 답지도 이어졌다. 1년이 걸릴 것이라는 복구 작업은 불과 3~4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그 일을 겪고 나니 사람이 노력해서 못할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히려 그해 매출은 전년보다 높았어요. 직원들이 재기를 위해 배로 뛰었기 때문이죠. 제 개인적으로도 큰 깨달음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복지재단 사업에 혼신 다할 것” ‘또박또박 하다.’ 주변에서 그는 이런 평을 자주 듣는다. 반세기 기업을 굳건히 지켜온 것도 그의 이 또박또박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지름길 없이 정도를 걷자’ ‘사람 된 도리를 하고 살자’ ‘기본에 충실하자’라는 그의 인생 철학도 이를 대변한다. 골프를 칠 때도 그는 잔재주보다는 정석대로 치는 방식을 택한다. 평생에 한 번 하기도 힘들다는 홀인원을 세 번이나 기록한 것도 운보다는 차곡차곡 쌓은 실력이 빛을 발한 경우였다. “구력이 35년쯤 되죠. 80년 3월 일본 니혼CC(컨트리클럽)에서 처음 하고 83년 5월 안양CC, 89년 9월 여주CC에서 한 번씩 했어요. 그때가 제 골프의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글도 세 차례 했지요.”(웃음)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 대웅제약 윤영환 회장, 중외제약 이종호 회장 등 제약사 창업자들이 그의 주 라운딩 상대였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필드에 나가는 횟수가 좀 준 편이란다. 그는 슬하에 딸만 넷을 두었다. 장녀 김은선(49) 부회장이 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넷째 은정(38)씨는 보령메디앙스 부사장으로 있다. 집 마당 놀이터를 약 만드는 장소로 내주었던 어린 딸아이가 성장해 지금 아버지를 돕고 있는 것.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겠지만 김은선 부회장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경영자라는 게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한 자리죠. 가업을 잇게 한 부회장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부회장은 잘하고 있어요. 가끔 저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기본을 걷자는 주의인데 그 애는 변신과 혁신을 과감하게 꾀하는 스타일이죠. 2세대 경영은 어쩌면 부회장 같은 스타일이 더 먹힐지 모르죠.” 김은선 부회장은 2005년 보령제약이 발표한 5개년 중장기 경영혁신 비전인 ‘inno-BR’(혁신 보령)을 주도하고 있다. ‘inno-BR’은 한동안 정체기를 겪었던 보령이 구조조정과 R&D 강화를 통해 재기를 모색하는 혁신 프로그램으로 김 부회장은 맨 앞에서 뛰고 있는 것이다. 보령그룹은 올해 안에 사회복지재단 설립을 계획 중이다. 건강·영유아·노인복지 등 3개 분야가 재단의 핵심사업이다. 토털헬스케어 기업을 추구하는 그룹의 장기 비전과도 맞물려 있다. 그는 내년부터 이 재단 사업에 혼신을 다할 생각이다. “기업이 존재하는 한 창업자는 그 기업을 위해 끝까지 사력을 다할 사회적 책임이 있는 겁니다. 제가 싫다고 안 할 수 없습니다. 족쇄가 채워져 있는 거죠.”(웃음) 희수를 앞둔 그에게 정년은 없어 보였다. 10월 1일 50주년 창립 행사에 선보일 그의 경영에세이 제목은 ‘끝은 생각하지도 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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