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장’ 안에서 첨단산업 꽃피워라
‘모기장’ 안에서 첨단산업 꽃피워라
■ “돈 좀 들어온다고 팍팍 쓰면 되겠나” ■ “현대는 말보다 행동이 앞선다고 믿고 싶다” ■ “경제재건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 “가격 개혁은 엄청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돼” ■ “사회주의 병폐는 거저 놀고 먹는 사람이 많다는 것”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끝났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에 관한 총 8개 항의 역사적 선언을 했다. 이 중 경제분야는 ‘해주 경제특구 추진’ ‘남북한 화물 수송’ ‘철도·고속도로 공동 이용’과 현재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산하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시키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활성화한다’는 선언적 수준에 그쳤던 2000년 정상회담에 비해서는 좀 더 구체화되고 확장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 구체안들이 얼마나 빨리, 구체적으로 실현될지는 남은 과제다. 키는 김정일 위원장이 쥐고 있다. 그래서 김 위원장의 경제관을 안다는 건 중요한 문제다. 김 위원장은 98년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된 이후부터 정치· 군사에서 경제 분야로 관심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되는 북한의 90년대는 9년 연속 경제성장률 마이너스라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98년부터 김 위원장이 ‘강성대국’의 슬로건을 외친 것도 무너진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IT 첨단사업에 대한 투자’ ‘상하이 방문’ ‘신의주 경제특구 지정’ ‘7·1 경제조치’ 등은 이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대안들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이런 시도는 사회주의 체제 유지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2차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정일의 경제관을 집중분석했다.
현대그룹과 북한 간의 사업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1998년 어느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행과 마주 앉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뜸 현대 측 일행에게 “롤(Roll)을 아느냐?”고 물었다.
김 위원장이 말한 ‘롤’은 중공업에서 쓰이는 기계로 원통형으로 생겨 아래위로 돌아가면서 눌러주는 압연 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로 쇳물이 흘러 들어가면 판판한 쇠판이 나오게 된다. 현대중공업은 이미 이 압연 롤을 만들어 포항제철에 납품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일행들은 “잘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김 위원장은 대답을 듣자마자 거침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100억 달러 정도 받고 일반 경제협력 자금까지 합치면 수백억 달러가 북한으로 들어올 것 같은데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 중이다. 산업의 쌀은 ‘철’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무산제철소에 가서 설비를 현대화시킬 궁리를 했다.” 김 위원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현장 관리자가 롤을 새로 바꾸는 데만 20억 달러가 들어간다고 하더라. 내가 그 얘길 듣고 호통을 쳤더니 금세 2억 달러로 줄더라. 내 말 한마디에 20억 달러가 2억 달러로 주는데 돈 좀 들어온다고 팍팍 쓰면 되겠나. 현대가 하면 뭐든지 싸게, 빠르게 하니까 현대가 와서 좀 도와 달라. 북한의 산업설비를 전체적으로 보고 좀 진단해 달라.”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현대 측 모 인사의 증언이다. 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현대그룹에 대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눈치였고, 현대가 해서 안 되는 일이 없으니 북한에 자문을 해 달라고 간곡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제철소뿐만 아니라 자동차산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김 위원장의 부탁으로 정 명예회장을 비롯한 몽헌 회장과 그 일행은 평양에서 60㎞ 정도 떨어진 자동차 공장 부지에 가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은 첩첩산중에 굴을 뚫어 만든 중장비 공장 부지였다. 자동차 공장을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부지였다.
“이런 곳에선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는 현대 일행의 말을 듣고 김 위원장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그는 “대우 김우중 선생도 다녀가고 통일교 문선명 선생도 다녀갔는데 진행된 건 하나도 없었다”며 “현대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기업임을 믿고 싶다. 자동차도 제철소도 현대전자 컴퓨터도 다 들여와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 기업이 살면 주식 개설부터 외국 자본 유치까지 준비해 달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현대 측은 김 위원장을 설득했다. “제철소와 자동차, IT산업이 되려면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북한이 현재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지 않나. 일단 관광사업으로 돈을 벌고 큰 투자가 안 들어가는 제조업 공단부터 시작해 인프라를 먼저 갖추자.”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공단 지역으로 신의주를 추천했던 북측 제안에 현대 측은 개성을 밀어붙였다. 신의주는 너무 춥고 거리도 멀 뿐 아니라 당장 중국 수출을 바라볼 것도 아니니 남측과 가까운 개성으로 정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김 위원장 최측근인 김용순 노동당 비서(2003년 사망)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펄펄 뛰었다. 개성은 판문점과 가까운 북측의 군사전략 요지라 군부 측 반발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현대 양반들의 뜻을 들어주라”며 밀어붙였다. 김 위원장은 첨단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현대의 요구를 우선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진정으로 원한 건 관광도, 봉제업도 아닌 제철과 자동차, IT산업이었던 것이다. 98년 북측이 현대 측에 제안한 구체적 사업내용이 ▷평양에 10만kw 중유 발전소 건설 ▷개인용 컴퓨터 조립공장 설비 투자 ▷자동차 5000대 후불조건으로 납입해 제3국에 재수출 등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은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98년 정권 출범 이후 “정보기술과 컴퓨터산업 등 첨단기술 발전에 힘을 집중해 최단 기간 내에 경제의 비약적인 도약을 이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99년 3월 전국 과학자·기술자대회를 개최하고 같은 해 11월 내각에 전자공업성을 신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2000년 5월 중국 중관춘(中關村)의 IT단지를 방문해 롄샹(聯想) 그룹의 컴퓨터 공장을 참관한 후엔 IT산업을 중심 산업으로 하는 정책을 더욱 강조했다. 북한이 올해 4월 최고인민회의 제11기 5차 회의에서 채택한 국가예산 가운데 과학기술 부문 지출을 그 전해에 비해 무려 60.3%나 늘린 것만 봐도 그의 IT산업에 대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으로 휘청거렸다. 현대가 김 위원장에게 순차적으로 해주겠다고 약속한 제철소도, 자동차도, 현대전자의 컴퓨터도 물 건너갔다. 이번 2차 남북 정상회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밝힌 “김 위원장은 개성공단 건설이 당초 북측 기대와 달리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최근 기자와 만난 민간남북경제교류협의회(민경협)의 고위층 인사 A씨도 김 위원장의 내심을 읽을 수 있는 증언을 했다. A씨에 따르면 북측의 주요 경제관련 부서 중 하나인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련)의 장관급 고위 관계자가 “우리는 10만 명의 IT 인재를 가지고 있으나 활용할 방법이 없다”며 “개성공단에 첨단 사업을 가진 대기업은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중소기업뿐인 것에 대해 불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북측 장관급 인사의 말은 김 위원장의 생각과 같다. 김 위원장의 지시를 직접 받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노동당, 내각,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등 권력·행정·공안기구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문건을 자신이 직접 읽고 결재한다. 그가 1주일에 처리하는 문건의 분량은 대략 500쪽 이상이다.(외교관 출신 탈북자 고영환 증언) “평안북도에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는 뜨락또르(트랙터) 160대를 주겠다.…60마력짜리와 81마력까지를 몇 대씩 주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것을 잘 타산(계산)하여 제기해야 하겠다.” 2000년 1월 평안북도 경지정리 현장을 방문한 김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트랙터 몇 대, 몇 마력까지 직접 챙길 정도다.
“실리 얻는다면 무엇이든 한다” 김 위원장은 94년 사망한 김일성 주석에 이어 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총서기로 선출됐다. 이어 98년 4월 9일 국방위원장에 올랐다. 2003년 9월 3일 제11차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된다. 김정일 정권 출범과 함께 국제사회의 가장 큰 주목을 끈 부분이 바로 ‘실리주의’를 표방한 북한의 부분적 경제개혁 조치들이다. ‘경제 재건’은 지난 10년간 김 위원장을 가장 괴롭힌 화두였음에 틀림없다. 북한은 90년부터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천안문 사건(89년)을 시작으로 냉전 종식(90년), 한국-소련 국교 수립(90년), 소련 붕괴(91년), 한국-중국 국교 수립(92년), 김일성 사망(94년)에 이은 대재해와 기근은 북한을 끊임없이 추락시켰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고립되면서 중국과 소련의 원조도 끊기고 주민들은 기근과 기아에 시달렸다. 북한의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다. 북한은 이 기간에 4개의 ‘곤란’과 4개의 ‘저하’를 기록했다. 4개의 ‘곤란’은 식량난, 에너지난, 원재료난, 외화난이고 4개의 ‘저하’는 기업 가동률, 노동 생산성, 기술 수준, 상품 공급 능력 저하였다. 이것을 극복할 방안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수혈밖에 없었다. 김 위원장에게 개혁 개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더불어 3년간 공식적 지도자가 없는 ‘유훈 통치’ 시기(95∼97년)만 해도 김 위원장은 자신이 경제사업에 말려들면 혁명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하면서 경제를 철저히 외면했었다. 하지만 그는 98년 정권을 잡으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군사에 쏠려 있던 관심을 경제부문으로 넓혀 나가기 시작한 것. 98년 1월 자강도에 대한 현지지도를 시작으로 그해 총 79회의 공식 활동 중 9회를 경제부문에 할애했다. 99년에는 경제부문에 대한 현지지도가 23회로 늘어나 27회인 군부대 방문 횟수와 거의 대등해졌다.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실현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7·1 조치는 개인경작지 확대, 식량 및 생필품 배급제의 단계적 폐지, 물가와 환율·급여의 인상과 현실화, 평균주의 배격 등 시장경제 요소들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이 조치는 인플레 상승과 소득분배 불균형에 따른 양극화 심화 등 각종 부작용도 초래했지만 근로자들의 생산성 증가, 산업시설 확충, 식량증산 등 경제와 주민생활 회복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김 위원장의 실리주의는 ‘사회주의 원칙의 틀 안에서 경제 실리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한다’는 방식으로 점점 구체화됐다. 2002년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 ‘금강산 관광지구법’ ‘개성공단지구법’ 채택과 같은 경제특구 방식의 대외 개방조치들, 2005년 12월 ‘중소 탄광 개발 및 운영 규정’을 발표해 규모와 업종에 관계없이 기관·기업소·단체들이 국가의 허가 밑에 자체로 탄광을 개발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점, 외국 기업에 금광 개발의 투자까지 허용한 조치, 북·일 수교를 통한 배상금 확보를 위해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직접 일본인 납치 문제를 시인하고 피해자들을 일본으로 송환한 조치 등을 봐도 알 수 있다.
‘우리 식대로 하자’ 실현될까 그는 98년부터 북한의 엘리트 관료들에게 시장경제 교육을 꾸준히 시키기도 했다. 경제관료와 김책공업종합대학 연구진,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 등을 해외 각지로 보내 자본주의 경제학과 상법, 시장경제이론, IT분야 연구 협력 및 증권거래소 견학 등을 시켰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알고 도입하지는 취지였다. 그는 2001년 1월 상하이의 천지개벽을 보고 북한에 경제특구를 본격적으로 발족시킬 것도 결심한다. 중국계 네덜란드 실업가 양빈과 접촉, 그를 특별행정구역의 초대 총독으로 앉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입법·행정·사법권을 50년 동안 특별행정구역 장관에게 이양하고 북한 정부는 외교·국방 외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계획이었다. 2002년 9월 북한 정부는 이 계획을 중국 정부와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고 발표했다. 결국 일주일 후 중국 공안은 양빈을 탈세 혐의 등으로 구속하면서 특별행정구역에 대한 김 위원장의 꿈은 무너졌다. 철저하게 고립된 지역에 자본주의 도시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나오는 돈만 챙기려 했던 김 위원장. 특별행정구역 건설은 북측으로선 파격적 시도였다. 조동성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98년부터 ‘강성대국’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건 어떤 방법으로든 경제 발전을 빨리 이룩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며 “김 위원장은 무너진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일정 정도는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개혁·개방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진 않고 있다. 지난 10년간 각종 논문과 중국 방문 등에서 발언한 김 위원장의 코멘트만 정리해 봐도 그가 개혁·개방에 대해 얼마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97년 12월 25일 당 중앙위 간부와 대화 중 “외국의 투자와 외자도입, 이것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2000년에는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중국 모델에는 흥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스웨덴 모델이 재미있다”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개혁·개방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2001년 중국 상하이 방문 때는 “가격 개혁은 엄청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하면 배가 전복되고 만다”고 말했다. 다시 체제 위협에 대한 불안감을 표시한 것이다. 2004년에는 “일부 자본주의 나라 사람들은 마치 우리 공화국이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 정책전환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오도하고 있다”며 체제 유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줬다. 이러던 그가 2006년 중국 남방 방문 때는 “중국 남방의 발전상을 이 눈으로 직접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개혁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현성일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그의 저서『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에서 북한의 개혁 개방에 대한 한계점을 시사했다. ‘북한의 변화가 국가의 이익이 아닌 정권의 이익을 근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진정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가의 재정·원자재·에너지·식량의 공급 능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기업들과 주민들이 그나마 의지하고 있는 시장과 개인 이익 추구를 차단할 경우 주민 불만이 더욱 증폭될 것은 불 보듯 자명하다는 해석이다. 그렇다고 국정 가격과 공식 환율, 생활비를 훨씬 웃도는 물가와 비공식 환율, 인플레이션을 방치할 경우 계층 간 갈등과 빈부격차, 권력층의 부패가 확대됨으로써 심각한 사회·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 유지와 시장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다. 김 위원장의 개혁 개방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금강산 온정리에 가 보면 ‘우리 식대로 하자’는 붉은 글씨의 플래카드를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우리 식’을 성공시켜야 할 시험대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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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과 북한 간의 사업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1998년 어느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행과 마주 앉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뜸 현대 측 일행에게 “롤(Roll)을 아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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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북측이 현대에 제안했던 사업 ▶ 평양에 10만㎾ 중유 발전소 건설 ▶ 개인용 컴퓨터 조립공장 설비 투자 ▶ 코크스(cokes) 100만t 사업건 ▶ 자동차 5000대 후불조건으로 납입해 제3국에 재수출 ▶ 하루 100t 규모 광천수 공장 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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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 얻는다면 무엇이든 한다” 김 위원장은 94년 사망한 김일성 주석에 이어 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총서기로 선출됐다. 이어 98년 4월 9일 국방위원장에 올랐다. 2003년 9월 3일 제11차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된다. 김정일 정권 출범과 함께 국제사회의 가장 큰 주목을 끈 부분이 바로 ‘실리주의’를 표방한 북한의 부분적 경제개혁 조치들이다. ‘경제 재건’은 지난 10년간 김 위원장을 가장 괴롭힌 화두였음에 틀림없다. 북한은 90년부터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천안문 사건(89년)을 시작으로 냉전 종식(90년), 한국-소련 국교 수립(90년), 소련 붕괴(91년), 한국-중국 국교 수립(92년), 김일성 사망(94년)에 이은 대재해와 기근은 북한을 끊임없이 추락시켰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고립되면서 중국과 소련의 원조도 끊기고 주민들은 기근과 기아에 시달렸다. 북한의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다. 북한은 이 기간에 4개의 ‘곤란’과 4개의 ‘저하’를 기록했다. 4개의 ‘곤란’은 식량난, 에너지난, 원재료난, 외화난이고 4개의 ‘저하’는 기업 가동률, 노동 생산성, 기술 수준, 상품 공급 능력 저하였다. 이것을 극복할 방안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수혈밖에 없었다. 김 위원장에게 개혁 개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더불어 3년간 공식적 지도자가 없는 ‘유훈 통치’ 시기(95∼97년)만 해도 김 위원장은 자신이 경제사업에 말려들면 혁명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하면서 경제를 철저히 외면했었다. 하지만 그는 98년 정권을 잡으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군사에 쏠려 있던 관심을 경제부문으로 넓혀 나가기 시작한 것. 98년 1월 자강도에 대한 현지지도를 시작으로 그해 총 79회의 공식 활동 중 9회를 경제부문에 할애했다. 99년에는 경제부문에 대한 현지지도가 23회로 늘어나 27회인 군부대 방문 횟수와 거의 대등해졌다.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실현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7·1 조치는 개인경작지 확대, 식량 및 생필품 배급제의 단계적 폐지, 물가와 환율·급여의 인상과 현실화, 평균주의 배격 등 시장경제 요소들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이 조치는 인플레 상승과 소득분배 불균형에 따른 양극화 심화 등 각종 부작용도 초래했지만 근로자들의 생산성 증가, 산업시설 확충, 식량증산 등 경제와 주민생활 회복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김 위원장의 실리주의는 ‘사회주의 원칙의 틀 안에서 경제 실리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한다’는 방식으로 점점 구체화됐다. 2002년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 ‘금강산 관광지구법’ ‘개성공단지구법’ 채택과 같은 경제특구 방식의 대외 개방조치들, 2005년 12월 ‘중소 탄광 개발 및 운영 규정’을 발표해 규모와 업종에 관계없이 기관·기업소·단체들이 국가의 허가 밑에 자체로 탄광을 개발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점, 외국 기업에 금광 개발의 투자까지 허용한 조치, 북·일 수교를 통한 배상금 확보를 위해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직접 일본인 납치 문제를 시인하고 피해자들을 일본으로 송환한 조치 등을 봐도 알 수 있다.
‘우리 식대로 하자’ 실현될까 그는 98년부터 북한의 엘리트 관료들에게 시장경제 교육을 꾸준히 시키기도 했다. 경제관료와 김책공업종합대학 연구진,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 등을 해외 각지로 보내 자본주의 경제학과 상법, 시장경제이론, IT분야 연구 협력 및 증권거래소 견학 등을 시켰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알고 도입하지는 취지였다. 그는 2001년 1월 상하이의 천지개벽을 보고 북한에 경제특구를 본격적으로 발족시킬 것도 결심한다. 중국계 네덜란드 실업가 양빈과 접촉, 그를 특별행정구역의 초대 총독으로 앉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입법·행정·사법권을 50년 동안 특별행정구역 장관에게 이양하고 북한 정부는 외교·국방 외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계획이었다. 2002년 9월 북한 정부는 이 계획을 중국 정부와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고 발표했다. 결국 일주일 후 중국 공안은 양빈을 탈세 혐의 등으로 구속하면서 특별행정구역에 대한 김 위원장의 꿈은 무너졌다. 철저하게 고립된 지역에 자본주의 도시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나오는 돈만 챙기려 했던 김 위원장. 특별행정구역 건설은 북측으로선 파격적 시도였다. 조동성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98년부터 ‘강성대국’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건 어떤 방법으로든 경제 발전을 빨리 이룩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며 “김 위원장은 무너진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일정 정도는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개혁·개방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진 않고 있다. 지난 10년간 각종 논문과 중국 방문 등에서 발언한 김 위원장의 코멘트만 정리해 봐도 그가 개혁·개방에 대해 얼마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97년 12월 25일 당 중앙위 간부와 대화 중 “외국의 투자와 외자도입, 이것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2000년에는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중국 모델에는 흥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스웨덴 모델이 재미있다”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개혁·개방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2001년 중국 상하이 방문 때는 “가격 개혁은 엄청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하면 배가 전복되고 만다”고 말했다. 다시 체제 위협에 대한 불안감을 표시한 것이다. 2004년에는 “일부 자본주의 나라 사람들은 마치 우리 공화국이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 정책전환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오도하고 있다”며 체제 유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줬다. 이러던 그가 2006년 중국 남방 방문 때는 “중국 남방의 발전상을 이 눈으로 직접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개혁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현성일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그의 저서『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에서 북한의 개혁 개방에 대한 한계점을 시사했다. ‘북한의 변화가 국가의 이익이 아닌 정권의 이익을 근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진정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가의 재정·원자재·에너지·식량의 공급 능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기업들과 주민들이 그나마 의지하고 있는 시장과 개인 이익 추구를 차단할 경우 주민 불만이 더욱 증폭될 것은 불 보듯 자명하다는 해석이다. 그렇다고 국정 가격과 공식 환율, 생활비를 훨씬 웃도는 물가와 비공식 환율, 인플레이션을 방치할 경우 계층 간 갈등과 빈부격차, 권력층의 부패가 확대됨으로써 심각한 사회·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 유지와 시장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다. 김 위원장의 개혁 개방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금강산 온정리에 가 보면 ‘우리 식대로 하자’는 붉은 글씨의 플래카드를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우리 식’을 성공시켜야 할 시험대에 올라 있다.
김정일의 ‘모기장 이론’ |
“쉬파리 못 들어오게 하면 괜찮아” 김정일(65) 국방위원장은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논문은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군의 위치와 역할’. 재학시 주요 논문은 ‘현대 수정주의의 발생에 대하여’ ‘현대 제국주의의 특징과 침략적 본성에 대하여’ 등 다수다. 이 중 경제 관련 논문으로는 ‘대안의 사업체계는 독창적인 사회주의 경제관리체계’가 있다. 특히 그는 중국과 동유럽의 변화가 북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면서 북한의 경기 침체가 가속화됐던 1980년대 후반부터 개혁·개방의 위험성과 체제 수호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94년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논문에서 ‘지금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고 제국주의자들의 원조·협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적었다. 그는 사회주의 붕괴 원인이 사회주의 이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주성과 사회주의 원칙 포기, 사상 사업의 무시 등에 있다고 분석했다. 동구권 붕괴가 북한에는 오히려 사회주의 원칙 고수의 중요성과 개혁·개방의 위험성을 깨우쳐 준 ‘교훈’으로 작용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90년대 말 북한이 최악의 경제난을 거치면서 그의 관점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 ‘금강산 관광지구법’ ‘개성공단지구법’ 채택과 같은 경제특구 방식의 대외 개방조치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경제관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체제 수호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북한의 극심한 경제위기와 식량난은 그로 하여금 시장경제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이를 제도권 안으로 흡수해 체제를 유지하려는 불가피한 수동적 조치였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그가 주장한 ‘모기장 이론’이다.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불건전한 사상요소에 오염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도는 그들 속에서 사상 교육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모기와 쉬파리가 들어오지 못하게 모기장을 쳐놓으면 문을 열어 놓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김정일 선집(9) 평양: 조선로동당 출판사 1997) 개혁·개방은 하겠으나 체제 유지가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체제를 수호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바람의 차단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외개방 조치들이 실패한 데서 증명됐다. 단지 지리적 위험도가 적다고 판단되는 영토의 일부를 빌려주고 그 대가만 받겠다는 것은 경제발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여기에 김정일의 딜레마가 있다. |
말로 본 김정일의 경제관 변화 ▶“사회주의는 현대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자기 궤도에서 탈선되고 사회주의의 역사적 업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말살한 사회주의 배신자들의 ‘개혁’ ‘개편’ 정책에 의해 붕괴됐다.” (1995년 12월 25일 로동신문에 발표한 담화) ▶“외국의 투자와 외자도입, 이것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문제다.”(1997년 당 중앙위 간부와 대화 중) ▶“전후 복구시기에도 우리는 관광업과 외자도입이란 말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는 절대로 남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1998년 1월 자강도 현지지도 중) ▶“중국 모델에는 흥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스웨덴 모델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태국은 군주제를 유지하면서 독립을 유지하고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태국 모델에도 관심이 있다.”(2000년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 ▶“가격 개혁은 엄청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하면 배가 전복되고 만다.”(2001년 1월 상하이 방문시) ▶“더 잘살기 위해서는 경제개혁을 배워야 한다.”(2002년 러시아 방문 중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역 전권대표에게) ▶“남조선 기업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그 효율적인 첩경을 잘 지도해 주어야 한다.” “사회주의 병폐는 거저 놀고 먹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2003년 6월 개성공단 착공 직후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에게) ▶“일부 자본주의 나라 사람들은 마치 우리 공화국이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 정책전환’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현실을 오도하고 있다.”(2004년 11월 ‘조국’에 실린 내용) ▶“중국 남방의 발전상을 이 눈으로 직접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하이테크 분야의 빛나는 발전이 인상적이었다.”(2006년 1월 선전 방문시 후진타오 국가주석 주최 환영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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