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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유 값이 1900원대를 돌파했다. 서민들의 불안감도 함께 고조됐다. |
1908. 코스피 지수? 아니다. 한 달 전 인천의 한 주유소가 내건 휘발유 값이다. 2007년 11월 유가 100달러 시대를 예고하는 고공행진에 이어 10월 중순부터 연속 최고치를 돌파한 휘발유 값이 서민들의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2008년 증산 소식에 국제유가는 하락세를 보임에도 휘발유 값이 떨어지지 않자 서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주말 이후 주유소들이 휘발유 값을 내리면서 업계는 당분간 하락세를 보일 것이라 전망했지만 소비자들의 유가 부담은 쉽게 덜어지지 않을 듯하다. 얼마 전 한 정유업체가 이벤트를 벌였다. 주유하는 고객 중 추첨을 통해 경품을 나눠주는 사은잔치다. 하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업체 관계자는 “무슨 마케팅을 벌여도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말고 기름값부터 내려라’는 식”이라며 “미운 놈은 무슨 짓을 해도 미운 법이 아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고유가 시대에 따른 불만의 칼날이 정유업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소비자시민모임이 소비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휘발유 가격 설문조사에서 95.4%가 ‘비싸다’고 응답했다. 서울 시내 일부 주유소가 1900원대로 휘발유 값을 올리자 ‘차를 처분하겠다’는 운전자도 늘고 있다. 유독 휘발유 값이 심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소장은 “기름값은 이동통신비처럼 절대 다수의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라며 “기름을 넣을 때마다 가격을 확인하고, 카드 영수증에 서명하면서 유가가 피부에 와 닿는 것”이라 설명했다. 또 오를 땐 ‘대폭’ 오르고 내릴 땐 ‘소폭’ 내린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유류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휘발유 유류세는 57% 정도다. 이 소장에 따르면 휘발유가 ℓ당 100원일 때 30원 정도는 원유 비용이다. 국제 유가가 10% 내려도 국내 휘발유 값은 3% 내외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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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정유업체의 휘발유 가격 결정 구조는 영업비밀에 부쳐져 왔다. SK에너지와 GS칼텍스는 기준 가격을 고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GS칼텍스는 공개를 중단했다. 여러 차례 폭리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2007년 2월 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등 국내 4개 정유사가 담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52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고 검찰에 고발당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는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이 정유업체들이 주유소 납품 가격을 실제와 다르게 공시한 것을 들어 ‘백마진’ 관행이라 비판했다. 이처럼 휘발유 값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한국석유공사는 지난 7월부터 시장조사를 통해 정유업체가 제시한 판매가가 아닌 실제 판매가를 공개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의 폭리 의혹은 여전하다. 이버들 에너지시민연대 정책차장은 “가격 문제는 기업의 영업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정유업은 네 개 회사에 의한 과점체제이고, 다른 산업의 기초가 되는 에너지 산업인 만큼 철저한 투명 공개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정부가 조사하는 가격도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며 “공정시장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 상황을 오랫동안 방치한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담합에 따른 검찰의 조사 결과는 무혐의였고, 이를 근거로 정유업체는 홍보전을 펼쳤지만 ‘정유업체=폭리=담합’ 의혹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영업이익률 4.2%에 불과 국제유가가 오르면 정유업체들도 높은 이익을 낼 거라 생각하기 쉽다. 업계 관계자는 “국제유가의 절대적 수준에 따라 이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며 “국내 휘발유 값은 국제유가뿐 아니라 국제 석유제품 가격(싱가포르 현물시장에서 거래되는 석유 가격)에 연동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휘발유 값을 결정하던 우리나라는 1994년부터 국제유가와 환율에 따라 석유제품 판매가격을 정했다. 97년 유가연동제를 폐지하면서 석유제품 가격자유화 체제에 들어선 이후에도 정유업체들은 국제유가에 따라 가격을 매겼다. 당시 유가연동방식이 불합리하다는 시민단체의 문제 제기로 2001년부터 국제 석유제품 가격에 맞춰 기름값을 정해왔다는 것이 조상범 한국석유협회 과장의 설명이다. 조대홍 한국석유공사 과장은 “2000년 이후 수출 비중이 커지면서 국제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국내 가격을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4개 정유사 중 SK에너지와 현대오일뱅크는 국제 석유제품 가격만을 기준으로 휘발유 값을 정하고,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은 국제유가의 변동을 큰 테두리로 국제 석유제품 가격으로 가격을 결정하고 있다. 기준 가격에 업체별로 등락 시기와 비용을 고려해 산정하는 방식이다. SK에너지 고위관계자는 “국내 석유제품 가격이 적정한지 판단하려면 원유시장의 수요와 공급, 각 제품시장의 수요와 공급 두 구조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며 “국제유가가 오르면 정유업체의 이익이 따라 오른다는 논리는 금값이 오르면 금 세공사가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어 “97년부터 석유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정유업체들끼리 담합하더라도 정제된 석유제품을 수입해 파는 수입업자들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덧붙였다. 원유를 수입해 석유로 만드는 정유업은 원유제품 가격과 석유제품 가격의 차이인 정제마진으로 이익을 얻는다. 국제 석유제품 시장에서 수요보다 공급이 많으면 석유제품 가격이 떨어지는데 이때 정유업체들의 정제마진도 내려간다. 만약 국제시장에서 업체들이 정제설비를 한꺼번에 늘리면 공급 경쟁이 치열해져 투자한 만큼 제값을 받지 못한다. 석유협회의 조 과장은 “석유제품 수요가 급등하는 미국의 드라이빙 시즌(5월 말~9월 초)에 일부 정유시설이 가동을 중단해 국제 석유제품 가격이 급격히 올랐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국제 석유제품 가격은 여러 변수에 의해 오르내린다. 이런 변수를 생각지 않고 국제유가와 국내 휘발유 값의 흐름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2004년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전년 대비 정유업체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큰 폭으로 늘었지만 완만한 오름세를 보이는 국제 석유제품 가격에 비해 국제유가가 계속 큰 폭으로 오르자 두 가격의 차이 즉, 정유업체의 정제마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06년 5개 정유사의 총 매출은 70조6444억원이다. 영업이익률은 4.2%로 2조 9400억원 정도다. 이 가운데 정유부문은 매출 57조2121억원, 영업이익 8994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률은 1.6% 정도. 석유화학, 석유개발, 윤활유 등 비정유부문의 15.2%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 이선근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정유부문의 영업이익은 제조업 평균 영업이익률인 5.3%(2006년 기준)를 훨씬 밑돈다”며 “외형 규모는 크지만 마진을 보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 정유업체가 중동, 동남아시아 등에서 원유를 들여오면 세금과 각종 수수료를 제하게 된다. 석유협회에 따르면 이 몫이 ℓ당 80%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 20% 안에서 운임, 보험, 정제, 비축, 운송, 광고, 인건비, 마진을 모두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협회 측의 설명이다. 들여온 원유는 증류탑에서 정제 과정을 거쳐 LPG, 가스, 휘발유, 등유, 경유, 벙커C유 등으로 나뉜다. 조 과장은 “휘발유 원가를 밝히라고 시민단체 등이 요구하지만 일부러 공개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원가 자체를 알 수 없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휘발유는 연산품(같은 원료를 같은 공정으로 가공했을 때 나오는 종류가 다른 두 가지 이상의 생산품)이기 때문에 회계학상으로 원유 총원가는 알 수 있어도 휘발유만 따로 원가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조 과장은 “쇠고기 안심 한 근의 원가를 내놓으라는 것과 같은 격”이라며 “원가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논리만으론 불만 덜기 힘들어” 한 정유업체 임원은 “논리적인 수치를 제시해도 소비자들의 불만을 덜기는 힘들 것”이라며 “에너지 사업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반 정유사 분위기를 줄여나가겠다”고 밝혔다. 에너지 자원이 국가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중요해진 현 시대에서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겠다는 포부다. 외국의 석유회사들은 석유개발회사(ENP)로 알려진 반면 우리나라는 에너지 앤드 마케팅(E&M)으로 불린다. 엑손 모빌,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 RDShell(로열더치셸) 등 ENP는 주로 탐사, 시추, 생산 분야에 강한 경쟁력이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의 영업이익률은 60% 정도다. 수입, 정제, 판매, 마케팅에 초점을 둔 우리나라 정유업체는 영업이익률 5%를 넘기도 힘든 실정이다. 국내 정유업체들도 앞다퉈 비정유부문에 투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SK에너지는 올해 1조6500억원을 들여 세 번째 고도화 시설을 짓고 있다. 고도화 설비는 벙커C유 등 가격이 싼 중질유를 다시 정제해 휘발유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으로 만드는 시설이다. 고도화 설비 비율은 2007년 1월 현재 기준 미국 76.3%, 일본 39.8%지만 우리나라는 10월 현재 24.3%에 불과하다. SK에너지 관계자는 “고유가 시대에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 소비자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SK에너지는 올해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5400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GS칼텍스는 현재 보유한 캄보디아, 태국 등 4개의 탐사 광구 외에 러시아, 중동, 중앙아시아 등의 10여 개 광구에 투자할 계획이다. 강태화 GS칼텍스 과장은 “지난 9월 신촌에 휘발유 대신 수소를 충전할 수 있는 수소스테이션을 열었다”며 “에너지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전문인력 확보, 연구개발(R&D) 등에 대규모로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98년 휘발유 값이 600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엄청 비싸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유류세 인하와 가격 공개를 말하기 전에 기름을 아껴 쓰겠다는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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