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특별인터뷰] “우물 속 이념에서 창조적 바다로”
[새해 특별인터뷰] “우물 속 이념에서 창조적 바다로”
■ 지난 10년은 이념 실체 찾아낸 ‘발견의 10년’ ■ 문화예술의 힘은 모든 창조력 결정하는 인프라 ■ 통합성과 유연성으로 공동체 살리기 나서야 ■ 이명박 실용주의는 ‘창조 정치’로 나가야 ■ 이념보다 완장 차고 설치는 원리주의자에 피해 ■ 결과의 평등주의론 영원히 선진의 담장 못 넘어 ■ 창조적 자본주의는 욕망 피라미드의 최정점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이코노미스트에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좁은 우물 속의 이념 공간에서 나와 넓고 창조적인 글로벌 바다로 나가는 ‘생각의 교체’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좌-우 쏠림 없는 정치, 양극이 아닌 가운데로 가서 ‘창조 정치’를 하는 것이 경제도 살리고 선진 한국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길이라고 밝혔다.
후기 정보사회를 ‘디지로그’ 사회라고 규정한 이어령 전 장관은 탈이념을 추구한다. 그는 한 사회의 정치·사회·경제 논리나 주의에 속박되지 않고 그 연결 고리를 묶어 시대 문화 전체를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지성인이다. 이 전 장관은 해방 직후 평론가 시절 좌파 문학인들과 불꽃 논쟁을 벌인 전력이 있다. 당시 한 시대를 속박하는 이념 싸움을 치열하게 치르면서 상처도 입었다. 이 때문일까. 그는 평소 ‘생각의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현실 정치엔 눈을 돌리지 않았다. 17대 대선 기간에도 많은 군소 후보가 그의 방을 노크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소위 ‘좌파 정권 10년’에서 우파로의 대이동을 보는 시각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27일 오전 11시 그의 중앙일보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일흔네 살 노 지성인의 식견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점심식사 시간을 포함해 3시간 동안 거칠 것 없이 새 시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다음은 이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새 정권 탄생을 좌에서 우로의 권력 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보의 최소 단위를 원 바이트(bina- ry opposite)라고 부릅니다. 1과 0이지요. 보통 말로 풀면 2치 대립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진짜냐 가짜냐, 혹은 음이냐 양이냐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가면 좌냐 우냐가 됩니다. 그 말의 연원을 캐 봐도 알 수 있지요. 프랑스 혁명 제1기 국민의회는 의장석에서 볼 때 비특권층을 대변하는 공화파가 왼쪽, 그리고 그 반대편 오른쪽에 보수파 의원들이 앉은 데서 생겨난 말이지요. 그래서 200년이 넘은 뒤에도 좌우란 말은 여전히 정치체제를 차이화하는 원 바이트 정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 이데올로기를 좌우의 흑백논리로 단순화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어서 미국에서는 좌파라는 말 대신 리버럴이니 래디컬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일이 많아요. 그러나 해방 직후의 이념투쟁과 남북 분단 그리고 6·25전쟁과 냉전을 겪어 온 한국에서는 좌우라는 이항 대립의 언어가 생사쟁탈권을 쥔 일극의 언어가 되고 그 결과로 수십만, 수백만이 피를 흘리게 되는 민족의 트라우마가 되었던 거죠. 그래서 이 말은 터부시돼 ‘당신은 좌익이오’라고 하면 ‘예’라고 선뜻 대답하거나, 반대로 ‘당신은 우익이오’라고 물으면 내놓고 고개를 끄덕일 사람도 드문 상황이 된 겁니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사람이나 정당, 사회단체를 볼 때 속으로는 모두 좌냐 우냐의 원 바이트의 한 색깔 이데올로기로 단정하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형태를 놓고 ‘우측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하는 것’ 또는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도 그런 문맥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번 대선에서도 아무리 당명을 바꾼다 해도 유권자들은 그 후보자를 좌우의 깜빡이로 보고 투표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혹은 좌우의 트라우마나 금권, 네거티브 홍보 등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밀이 보장된 투표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사적 입장에서 보면 아이로니컬하게도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이념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찾아낸 ‘발견의 10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좌파정권 10년 종식’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니네요. “강은 건너봐야 하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는 평범한 진리, 특히 이념과 현실 사이, 복잡하고 다원화한 21세기의 생활 환경 속에서는 투쟁이나 경직된 이념의 구호만으로는 살기 힘들다는 것을 현장학습을 통해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정치 권력은 한 사람(獨)에게 쏠리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독재와 독선처럼 홀로 독(獨)자가 붙은 말치고 쓸 만한 것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DJ, 노무현 두 대통령의 10년 집권은 경제적으로 ‘개발형 독재’가 ‘이념형 독선’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권력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386운동권이라는 한 세대의 고개를 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독선으로 흐르게 된 거죠. 새 정부의 선택지는 이제 독재도 독선도 아닌 독창(獨創)일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정치, 창조적 경제만이 살길이겠지요.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을 차떼기당이라고 하고 ‘선진화’를 선거 이슈의 하나로 삼고 있는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후진기어를 넣고 앞으로 달려가는 자동차’라고 비웃겠지요. 동학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사에 고착해 에너지만 소모하면서도 자신들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에요.”
-새 정권 교체의 가장 큰 의미를 무엇이라 보십니까. “한마디로 탈이념화죠. 조선조 때는 주자학, 한말에는 일본 군국주의,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분단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했어요. 식민통치, 6·25전쟁 같은 파워 폴리틱스(politics)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은 자연히 이념 과다의 세계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거리나 학원가의 플래카드 하나만 봐도 우리는 그동안 관념적 구호를 먹고 살았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아이들에게 사람의 옆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이따금 눈을 두 개 그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관념적 사고 때문에 자기가 본 그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루이 14세의 옆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받아 본 중국 황제가 “불쌍하도다. 법국의 황제는 얼굴이 반쪽밖에 없구나”라고 탄식한 그 유명한 일화만 가지고도 설명이 됩니다. 어째서 중국이 서양보다 화약이나 인쇄술 그리고 바스코 다 가마의 선박보다 수십 배나 큰 정화(鄭和)의 대함대를 거느리고도 영국의 함포 한 방에 무릎을 꿇었는지를요. 경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문화 등 한국의 국력은 세계 10위권에 오를 만큼 높아졌는데 안타깝게도 그 의식 면에서는 동학란 때 전봉준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우물 속의 이념 공간에서 넓고 창조적인 글로벌한 바다로 나가려는 개방적 사고가 가장 시급한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경제 살리기’가 과거와 같은 ‘경제 제일주의’로 복고하는 것이거나 국민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는 편가르기가 아니라 리처드 플로리더의 주장대로 온 국민을 창조적 계층으로 만들어 통합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경제 살리기’를 화두로 내걸었습니다. 우선 과제는 무엇입니까. “규제를 풀고 기업 친화적인 분위기로 투자를 활성화한다고 해서 금세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의 기업환경을 개선하는 극히 제한적인 시도일 것입니다. 지금 세계 경제는 에너지, 자원, 환경 그리고 출산 문제 등 대부분이 지구 규모의 난제들과 맞물려 있습니다. 남의 나라가 바이오 에너지 산업에 손을 대면 자동차 기름이 아니라 이번에는 식탁의 먹는 기름 값이 오르지요. 중국에서 고철을 수입하면 한국의 맨홀 뚜껑이 없어집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유럽에 확산되어가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사상가들은 누구나 경제학을 필수로 연구했지요. 자연과학을 기초로 삼았던 데카르트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애덤 스미스, 칸트, 헤겔 등이 모두 그랬지요. 마찬가지로 냉전 종식 후 20세기 말에서 21세기에는 종교 문제나 엔터테인먼트 같은 문화의 소프트 파워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제는 문화학을 연구하지 않고는 공학은 물론 경제학도 경영학도 불가능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화예술의 힘은 바로 모든 창조력을 결정하는 인프라이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는 얼마 전 하버드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기념강연을 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란 말을 사용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경제 살리기’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철학 기반 위에서 실현되도록 해야지요.”
-이명박 정부가 내건 ‘실용주의’를 어떻게 보십니까. 성과주의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태어나기도 전의 아이를 놓고 관상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실용주의가 북한이라면 몰라도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 일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흑묘백묘론’의 실용성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실용주의는 실리적 성과만을 따지는 ‘리얼 정치’, 이념만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의 ‘도덕 정치’를 뛰어넘어 우리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창조 정치’로 나가야지요. 지금까지 한국을 이끌어 온 엔진은 반식민주의, 반공, 반독재, 반부패, 반미, 반일, 반동과 같이 ‘반’자가 붙은 네거티브 투쟁논리였습니다. 이른바 화성론(火成論)이 이끌어온 역사입니다. 그러나 불은 탈 것이 없어지면 스스로 재와 함께 소멸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물은 떠내려 보낼 대상이 없어도 스스로 땅 속에 스며 들어 풀과 나무의 뿌리를 적셔 꽃을 피웁니다. 화성론의 투쟁에서 수성론(水成論)의 창조로 사회 분위기와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양식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의 빈곤 이상으로 한국인들은 마음도 고픕니다. 그동안 편가르기로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고조되고 이념 싸움으로 지식인들의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지고 말았지요. 통합성과 유연성으로 사회 살리기, 공동체 살리기를 병행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명분과 의리, 이념에 휩싸여 있습니다. 탈이념화가 가능한 얘기일까요. “일본 옴주교, 알카에다의 자폭 테러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그 종교를 광신하는 일부 원리주의자(fundamentalism)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주의자들은 좌에도 있고 우에도 있고 무슬림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해방 직후부터 우리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목청이 크고 완장을 차고 설치는 원리주의자에 의해 피해를 본 것이지요. 소수자에 의한 사회의 쏠림 현상과 다수자에 의한 침묵의 공동이 오늘의 이 황폐한 사회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미디어의 다양화로 침묵하던 대중들이 자신의 입을 열기 시작했으며 거꾸로 원리주의자들의 목청은 차츰 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사회의 쏠림 현상은 다양성으로 변하게 됩니다. 평등과 자유는 다같이 필요한 덕목이지만 서로 이율 배반하는 모순을 더 지니고 있지요. 평등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그리고 자유는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원리지요.”
-평등은 경쟁을 제어하려 하고 자유는 경쟁을 촉발하려고 하죠.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요. “평등을 내세우는 정치원리와 자유를 내세우는 경제원리가 충돌하고 그러다 결국 원리 자체를 고집하는 일방통행의 원리주의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냉전의 추위였지요. 그러나 이 두 원리에 박애(fraternite·형제애)라는 문화의 원리가 끼게 되면 물과 불의 사이에 있는 쇠가마처럼 그 모순과 갈등은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파워로 바뀝니다.”
-‘중산층 혁명’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평등과 자유의 모순에서 나오는 현상일까요. “한국사회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사회의 계층구조가 다이아몬드형을 하고 있었지만 IMF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는 살아남았지만 실직자는 늘어나게 됐죠. 그래서 중산층이 장구의 조림통처럼 졸아들고 만 것입니다. 다이아몬드형에서 장구형으로 옮겨가는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현상은 절대적 빈곤층보다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이지요. 붕괴되고 있는 중산층은 중소기업, 자영업자, 지식인과 고급 기술자들로 구성돼 있어 블루칼라와는 달리 사회적인 임팩트도 광범위하게 파급됩니다. 그래서 중산층의 동요는 낫과 망치를 든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달리 사회에 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거지요. 최근 영국 국방부가 확률을 이용해 작성한 ‘30년 뒤의 인류의 미래 세계’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이 생생한 숫자로 제시돼 있습니다.”
활빈당식 구제로는 민심 못 얻어
-선진 한국을 위한 새 정부의 ‘창조 정치’는 어떻게 이뤄야 할까요. “워낙 큰 문제라 비유를 통해 설명할 수밖에 없군요. 미국에 12%의 빈민층이 있다는 것은 통계 숫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감하고 체험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카트리나 허리케인으로 뉴올리언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겼을 때 자동차가 없어 피난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은 채 재난을 당한 사람이 10만 명이나 됐습니다. 미국 국민은 통계 숫자가 아니라 이 허리케인 효과를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바로 이웃에 많은 빈민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창조 정치는 이렇게 관념적인 통계 숫자를 카트리나 효과처럼 구체적인 생활 감각으로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데 있습니다. 증여 경제와 창조 경제는 그냥 가진 자의 것을 못 가진 자에게 나눠주거나 그것을 빼앗아 나눠주는 활빈당식 구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뱀 머리는 전체 몸과 꼬리에 비해 10%도 채 되지 않지요. 퍼센트 숫자의 비율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90%를 위해서는 10%를 버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구렁이가 담을 넘으려면 10%의 머리가 먼저 넘어가야 몸도 꼬리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뱀의 머리가 꼬리보다 앞서는 것은 아닙니다. 뱀이 똬리를 틀면 머리도 꼬리도 선후의 차이 없이 한 덩어리의 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10%의 머리와 90%의 꼬리가 연속돼 있는가, 단절 분리돼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기회의 평등책을 쓰지 않고 결과의 평등주의를 내세운 정책으로는 우리는 영원히 선진의 담장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창조 정치가 빈익빈 부익부를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근원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창조의 자본주의는 즐거움의 자본주의와 똑같습니다. 창조의 보상은 바로 즐거움이기 때문이지요. 물질은 종속적인 것으로 즐거움과 행복이 앞섭니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노동은 수단이 아니라 자기 목적적인 활동으로 변합니다. 기업 노동이 아니라 기업 활동이라고 하듯이 정치 역시 정치 노동이 아니라 정치 활동이라고 합니다. 정치든 경제든 창조적 자본주의는 매슬로가 말하는 욕망의 5단계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는 것이지요. 등 따습고 배부른 생리적 욕망에서 발 뻗고 편히 자는 안전 욕망, 그리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소속 욕망의 3단계를 지나면 말을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대로 남에게 평가를 받고 싶은 인지의 욕망을 갖게 됩니다. 창조의 자본주의는 바로 이 인지 욕구에서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최종 단계의 욕망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성장으로 1단계에서 3단계의 과정을 성취해 냈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할 일은 자기가 인정받는 4단계의 욕망과 가치실현을 하는 5단계의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는 욕망을 성취해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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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정보사회를 ‘디지로그’ 사회라고 규정한 이어령 전 장관은 탈이념을 추구한다. 그는 한 사회의 정치·사회·경제 논리나 주의에 속박되지 않고 그 연결 고리를 묶어 시대 문화 전체를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지성인이다. 이 전 장관은 해방 직후 평론가 시절 좌파 문학인들과 불꽃 논쟁을 벌인 전력이 있다. 당시 한 시대를 속박하는 이념 싸움을 치열하게 치르면서 상처도 입었다. 이 때문일까. 그는 평소 ‘생각의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현실 정치엔 눈을 돌리지 않았다. 17대 대선 기간에도 많은 군소 후보가 그의 방을 노크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소위 ‘좌파 정권 10년’에서 우파로의 대이동을 보는 시각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27일 오전 11시 그의 중앙일보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일흔네 살 노 지성인의 식견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점심식사 시간을 포함해 3시간 동안 거칠 것 없이 새 시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다음은 이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새 정권 탄생을 좌에서 우로의 권력 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보의 최소 단위를 원 바이트(bina- ry opposite)라고 부릅니다. 1과 0이지요. 보통 말로 풀면 2치 대립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진짜냐 가짜냐, 혹은 음이냐 양이냐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가면 좌냐 우냐가 됩니다. 그 말의 연원을 캐 봐도 알 수 있지요. 프랑스 혁명 제1기 국민의회는 의장석에서 볼 때 비특권층을 대변하는 공화파가 왼쪽, 그리고 그 반대편 오른쪽에 보수파 의원들이 앉은 데서 생겨난 말이지요. 그래서 200년이 넘은 뒤에도 좌우란 말은 여전히 정치체제를 차이화하는 원 바이트 정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 이데올로기를 좌우의 흑백논리로 단순화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어서 미국에서는 좌파라는 말 대신 리버럴이니 래디컬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일이 많아요. 그러나 해방 직후의 이념투쟁과 남북 분단 그리고 6·25전쟁과 냉전을 겪어 온 한국에서는 좌우라는 이항 대립의 언어가 생사쟁탈권을 쥔 일극의 언어가 되고 그 결과로 수십만, 수백만이 피를 흘리게 되는 민족의 트라우마가 되었던 거죠. 그래서 이 말은 터부시돼 ‘당신은 좌익이오’라고 하면 ‘예’라고 선뜻 대답하거나, 반대로 ‘당신은 우익이오’라고 물으면 내놓고 고개를 끄덕일 사람도 드문 상황이 된 겁니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사람이나 정당, 사회단체를 볼 때 속으로는 모두 좌냐 우냐의 원 바이트의 한 색깔 이데올로기로 단정하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형태를 놓고 ‘우측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하는 것’ 또는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도 그런 문맥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번 대선에서도 아무리 당명을 바꾼다 해도 유권자들은 그 후보자를 좌우의 깜빡이로 보고 투표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혹은 좌우의 트라우마나 금권, 네거티브 홍보 등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밀이 보장된 투표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사적 입장에서 보면 아이로니컬하게도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이념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찾아낸 ‘발견의 10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좌파정권 10년 종식’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니네요. “강은 건너봐야 하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는 평범한 진리, 특히 이념과 현실 사이, 복잡하고 다원화한 21세기의 생활 환경 속에서는 투쟁이나 경직된 이념의 구호만으로는 살기 힘들다는 것을 현장학습을 통해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정치 권력은 한 사람(獨)에게 쏠리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독재와 독선처럼 홀로 독(獨)자가 붙은 말치고 쓸 만한 것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DJ, 노무현 두 대통령의 10년 집권은 경제적으로 ‘개발형 독재’가 ‘이념형 독선’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권력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386운동권이라는 한 세대의 고개를 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독선으로 흐르게 된 거죠. 새 정부의 선택지는 이제 독재도 독선도 아닌 독창(獨創)일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정치, 창조적 경제만이 살길이겠지요.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을 차떼기당이라고 하고 ‘선진화’를 선거 이슈의 하나로 삼고 있는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후진기어를 넣고 앞으로 달려가는 자동차’라고 비웃겠지요. 동학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사에 고착해 에너지만 소모하면서도 자신들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에요.”
-새 정권 교체의 가장 큰 의미를 무엇이라 보십니까. “한마디로 탈이념화죠. 조선조 때는 주자학, 한말에는 일본 군국주의,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분단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했어요. 식민통치, 6·25전쟁 같은 파워 폴리틱스(politics)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은 자연히 이념 과다의 세계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거리나 학원가의 플래카드 하나만 봐도 우리는 그동안 관념적 구호를 먹고 살았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아이들에게 사람의 옆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이따금 눈을 두 개 그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관념적 사고 때문에 자기가 본 그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루이 14세의 옆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받아 본 중국 황제가 “불쌍하도다. 법국의 황제는 얼굴이 반쪽밖에 없구나”라고 탄식한 그 유명한 일화만 가지고도 설명이 됩니다. 어째서 중국이 서양보다 화약이나 인쇄술 그리고 바스코 다 가마의 선박보다 수십 배나 큰 정화(鄭和)의 대함대를 거느리고도 영국의 함포 한 방에 무릎을 꿇었는지를요. 경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문화 등 한국의 국력은 세계 10위권에 오를 만큼 높아졌는데 안타깝게도 그 의식 면에서는 동학란 때 전봉준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우물 속의 이념 공간에서 넓고 창조적인 글로벌한 바다로 나가려는 개방적 사고가 가장 시급한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경제 살리기’가 과거와 같은 ‘경제 제일주의’로 복고하는 것이거나 국민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는 편가르기가 아니라 리처드 플로리더의 주장대로 온 국민을 창조적 계층으로 만들어 통합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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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는 ‘경제 살리기’를 화두로 내걸었습니다. 우선 과제는 무엇입니까. “규제를 풀고 기업 친화적인 분위기로 투자를 활성화한다고 해서 금세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의 기업환경을 개선하는 극히 제한적인 시도일 것입니다. 지금 세계 경제는 에너지, 자원, 환경 그리고 출산 문제 등 대부분이 지구 규모의 난제들과 맞물려 있습니다. 남의 나라가 바이오 에너지 산업에 손을 대면 자동차 기름이 아니라 이번에는 식탁의 먹는 기름 값이 오르지요. 중국에서 고철을 수입하면 한국의 맨홀 뚜껑이 없어집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유럽에 확산되어가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사상가들은 누구나 경제학을 필수로 연구했지요. 자연과학을 기초로 삼았던 데카르트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애덤 스미스, 칸트, 헤겔 등이 모두 그랬지요. 마찬가지로 냉전 종식 후 20세기 말에서 21세기에는 종교 문제나 엔터테인먼트 같은 문화의 소프트 파워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제는 문화학을 연구하지 않고는 공학은 물론 경제학도 경영학도 불가능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화예술의 힘은 바로 모든 창조력을 결정하는 인프라이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는 얼마 전 하버드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기념강연을 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란 말을 사용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경제 살리기’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철학 기반 위에서 실현되도록 해야지요.”
-이명박 정부가 내건 ‘실용주의’를 어떻게 보십니까. 성과주의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태어나기도 전의 아이를 놓고 관상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실용주의가 북한이라면 몰라도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 일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흑묘백묘론’의 실용성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실용주의는 실리적 성과만을 따지는 ‘리얼 정치’, 이념만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의 ‘도덕 정치’를 뛰어넘어 우리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창조 정치’로 나가야지요. 지금까지 한국을 이끌어 온 엔진은 반식민주의, 반공, 반독재, 반부패, 반미, 반일, 반동과 같이 ‘반’자가 붙은 네거티브 투쟁논리였습니다. 이른바 화성론(火成論)이 이끌어온 역사입니다. 그러나 불은 탈 것이 없어지면 스스로 재와 함께 소멸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물은 떠내려 보낼 대상이 없어도 스스로 땅 속에 스며 들어 풀과 나무의 뿌리를 적셔 꽃을 피웁니다. 화성론의 투쟁에서 수성론(水成論)의 창조로 사회 분위기와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양식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의 빈곤 이상으로 한국인들은 마음도 고픕니다. 그동안 편가르기로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고조되고 이념 싸움으로 지식인들의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지고 말았지요. 통합성과 유연성으로 사회 살리기, 공동체 살리기를 병행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명분과 의리, 이념에 휩싸여 있습니다. 탈이념화가 가능한 얘기일까요. “일본 옴주교, 알카에다의 자폭 테러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그 종교를 광신하는 일부 원리주의자(fundamentalism)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주의자들은 좌에도 있고 우에도 있고 무슬림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해방 직후부터 우리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목청이 크고 완장을 차고 설치는 원리주의자에 의해 피해를 본 것이지요. 소수자에 의한 사회의 쏠림 현상과 다수자에 의한 침묵의 공동이 오늘의 이 황폐한 사회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미디어의 다양화로 침묵하던 대중들이 자신의 입을 열기 시작했으며 거꾸로 원리주의자들의 목청은 차츰 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사회의 쏠림 현상은 다양성으로 변하게 됩니다. 평등과 자유는 다같이 필요한 덕목이지만 서로 이율 배반하는 모순을 더 지니고 있지요. 평등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그리고 자유는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원리지요.”
-평등은 경쟁을 제어하려 하고 자유는 경쟁을 촉발하려고 하죠.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요. “평등을 내세우는 정치원리와 자유를 내세우는 경제원리가 충돌하고 그러다 결국 원리 자체를 고집하는 일방통행의 원리주의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냉전의 추위였지요. 그러나 이 두 원리에 박애(fraternite·형제애)라는 문화의 원리가 끼게 되면 물과 불의 사이에 있는 쇠가마처럼 그 모순과 갈등은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파워로 바뀝니다.”
-‘중산층 혁명’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평등과 자유의 모순에서 나오는 현상일까요. “한국사회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사회의 계층구조가 다이아몬드형을 하고 있었지만 IMF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는 살아남았지만 실직자는 늘어나게 됐죠. 그래서 중산층이 장구의 조림통처럼 졸아들고 만 것입니다. 다이아몬드형에서 장구형으로 옮겨가는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현상은 절대적 빈곤층보다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이지요. 붕괴되고 있는 중산층은 중소기업, 자영업자, 지식인과 고급 기술자들로 구성돼 있어 블루칼라와는 달리 사회적인 임팩트도 광범위하게 파급됩니다. 그래서 중산층의 동요는 낫과 망치를 든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달리 사회에 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거지요. 최근 영국 국방부가 확률을 이용해 작성한 ‘30년 뒤의 인류의 미래 세계’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이 생생한 숫자로 제시돼 있습니다.”
활빈당식 구제로는 민심 못 얻어
-선진 한국을 위한 새 정부의 ‘창조 정치’는 어떻게 이뤄야 할까요. “워낙 큰 문제라 비유를 통해 설명할 수밖에 없군요. 미국에 12%의 빈민층이 있다는 것은 통계 숫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감하고 체험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카트리나 허리케인으로 뉴올리언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겼을 때 자동차가 없어 피난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은 채 재난을 당한 사람이 10만 명이나 됐습니다. 미국 국민은 통계 숫자가 아니라 이 허리케인 효과를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바로 이웃에 많은 빈민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창조 정치는 이렇게 관념적인 통계 숫자를 카트리나 효과처럼 구체적인 생활 감각으로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데 있습니다. 증여 경제와 창조 경제는 그냥 가진 자의 것을 못 가진 자에게 나눠주거나 그것을 빼앗아 나눠주는 활빈당식 구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뱀 머리는 전체 몸과 꼬리에 비해 10%도 채 되지 않지요. 퍼센트 숫자의 비율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90%를 위해서는 10%를 버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구렁이가 담을 넘으려면 10%의 머리가 먼저 넘어가야 몸도 꼬리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뱀의 머리가 꼬리보다 앞서는 것은 아닙니다. 뱀이 똬리를 틀면 머리도 꼬리도 선후의 차이 없이 한 덩어리의 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10%의 머리와 90%의 꼬리가 연속돼 있는가, 단절 분리돼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기회의 평등책을 쓰지 않고 결과의 평등주의를 내세운 정책으로는 우리는 영원히 선진의 담장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창조 정치가 빈익빈 부익부를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근원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창조의 자본주의는 즐거움의 자본주의와 똑같습니다. 창조의 보상은 바로 즐거움이기 때문이지요. 물질은 종속적인 것으로 즐거움과 행복이 앞섭니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노동은 수단이 아니라 자기 목적적인 활동으로 변합니다. 기업 노동이 아니라 기업 활동이라고 하듯이 정치 역시 정치 노동이 아니라 정치 활동이라고 합니다. 정치든 경제든 창조적 자본주의는 매슬로가 말하는 욕망의 5단계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는 것이지요. 등 따습고 배부른 생리적 욕망에서 발 뻗고 편히 자는 안전 욕망, 그리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소속 욕망의 3단계를 지나면 말을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대로 남에게 평가를 받고 싶은 인지의 욕망을 갖게 됩니다. 창조의 자본주의는 바로 이 인지 욕구에서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최종 단계의 욕망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성장으로 1단계에서 3단계의 과정을 성취해 냈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할 일은 자기가 인정받는 4단계의 욕망과 가치실현을 하는 5단계의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는 욕망을 성취해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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