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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챔프 먹은 ‘우리는 9988’

월드 챔프 먹은 ‘우리는 9988’

▶우수 중소기업 전시장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고객 열명 중 절반은 국내 업체(코텍)가 만든 슬롯머신 모니터를 보며 ‘잭팟’을 꿈꾼다. 오토바이를 타는 전 세계 인구 중 3할은 국산 헬멧(홍진HJC)을 쓴다. 5대양을 누비는 선박에 설치된 조타기의 65%는 국내 기업(유원산업)이 만든다. 흔히 ‘고데기’로 알려진 머리 전기인두 세계시장 1위도 한국업체(케이아이씨에이)다. 전 세계 알로에 원료 중 절반은 우리나라 기업(유니베라)이 공급한다. 휴대전화 내 정전기를 방지하는 필수 부품을 가장 많이 공급하는 곳도 국내 벤처회사(아모텍)다. 국내 중견업체(수산중공업)가 ‘유압식 브레이커’를 공급하지 않으면 전 세계 굴착기 열대 중 넉 대는 움직일 수 없다. 불에 타지 않는 ‘내화 금고’ 세계시장은 국내 업체(범일금고·선일금고제작·디프로메트) 세 곳이 합작해서 1등이다. 반도체에 레이저를 쏴 표기를 하는 ‘레이저마커’(이오테크닉스), 신발용 접착제(동성엔에스씨), 머리카락 100분의 1 크기의 극세사섬유(웰크론), 자전거용 신발(나눅스), 활넙치(제주해수어류양식수협), 개인 의료용 온열기(세라젬의료기) 등도 우리 업체들이 세계시장 1등이다. 이 업체들은 모두 중소·중견기업이다. 유명세를 탄 곳은 드물다. 회사 이름만 들어서는 ‘뭐 하는 회사일까?’ 할 정도다. 그야말로 묵묵히 세계로 뛰는 기업이다. 이들은 ‘구구팔팔(9988)’ 기업의 표본이다. ‘구구팔팔’은 국내 사업체 중 99%, 종업원 고용 비중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을 일컫는 말이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참여한 중소기업인 신년 인사회에서 한덕수 총리가 건배사로 제안해 화제가 됐다.
해외선 ‘유명’, 국내선 ‘찬밥’
하지만 세계시장 1등 중소기업들은 국내에서 ‘찬밥’ 대우다. 한 중소기업 임원은 이런 말까지 했다. “우리 스스로 자랑스러우면 뭐 합니까? 잘 몰라요, 우리 회사를. 가끔 상이나 수상하면, 보도가 한 번 되고 또 잊혀지지요. 직원들도 어디 가서 회사 설명을 한참 해야 되는 게 싫다고 합니다. 솔직히 김연아 선수나 박태환 선수가 세계에서 1등 하면 나라가 떠들썩하면서, 우리 중소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당당히 1위 한다고 하면 알아나 줍니까? 여기저기 3류 언론사에서 기사 써줄 테니 광고나 달라고 전화 오지.” 심지어 증권시장에서도 ‘저평가’를 받는다. 코텍이 그런 회사에 속할 수 있다. 이 회사는 전 세계 카지노용 모니터 공급 1위 업체다. 세계시장 점유율은 49%가량이다. 1987년 설립 이래 20년 연속 흑자를 본 알짜기업이다. 미국 최대 슬롯머신 공급업체인 IGT의 모니터 공급 비중이 70%에 달한다. 이 회사의 1월 10일 종가는 6950원. 증권사들이 내놓은 적정주가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주가수익비율(PER)은 9.91배. 지난해 말 기준 시장 평균(16.89배)에도 훨씬 못 미친다. 회사 가치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연말 산업자원부는 이 회사가 포함된 ‘세계 일류 상품’ 보도자료를 냈지만 일부 언론에 단신 정도로 처리됐다. 대부분 기업들은 이름 한 자 신문에 올리지 못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산자부로부터 ‘세계시장 1위 기업 리스트’를 건네받았다. 모두 100개 품목이었다. 이 중 57%는 대기업(계열사 포함)이 아닌 중견·중소기업이 주인공이다. 57개 중소기업 중 세계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 28곳이나 됐다. 품목은 다양했다. 부품 후진국이라지만, 휴대전화·조선·가전 분야 부품시장에서 1등을 달리는 기업도 많았다. 우리나라가 잘나가는 산업에 주력해 기술력을 키웠고,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오테크닉스라는 회사가 그렇다. 이 회사는 반도체 후공정 장비인 ‘레이저 마커’ 세계시장 50%를 점유하고 있다. 국내 점유율은 95%에 달한다. 레이저 분야에 특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등에 제품을 공급한다. 자화전자는 세계시장 1위 품목에 세 개나 이름을 올린 기술집약 중소기업이다. ‘자기 엔지니어링’이란 원천기술을 기반으로 전자부품을 제조·납품하고 해외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세계시장 점유율 1위 품목은 컬러브라운관전자선 접속장치(64.6%), 정온도계수 서미스터(27.4%), 코인형 진동모터(63.7%) 등이다. 특히 자화전자는 휴대전화 주요 부품인 코인형 진동모터 특허를 놓고 삼성전기와 2년간 특허분쟁을 거쳐, 결국 양사의 특허기술을 상호 사용하기로 합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화전자는 이미 20년 전 자체 부속연구소를 설립해 매년 매출액의 4% 정도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왔다.
기술 또 기술로 한 우물 파 성공
아모텍은 휴대전화 내부에 정전기를 방지하는 ‘칩 바리스터’라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중소벤처다. 이 부품은 국내 휴대전화 회사는 물론, 지난해 ‘아이팟’으로 유명한 애플사의 ‘아이폰’ 부품 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조선산업 분야에서는 조타기 업체인 유원산업, 해상 거주용 벽체패널 업체인 비아이피, 고압 CO2 소화장치를 만드는 엔케이 등이 각 분야에서 세계시장 1위다. 국부 산업인 조선업과 연계해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대기업과 ‘윈-윈’하는 모델을 보여주는 회사들이다. 이색상품으로 세계를 누비는 중소기업들도 눈에 띈다. 케이아이씨에이는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해외 이·미용 가전시장에서는 유명 업체다. 흔히 ‘고데기’로 알려진 머리 전기인두를 생산하는 이 회사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28.8%다. 매출의 90%가 해외에서 일어난다.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세라믹 히터를 장착한 이 회사 제품은 지속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이 분야 선도국인 일본에까지 진출해 있다. 고온에도 끄떡 없는 내화금고 분야에서는 범일금고와 선일금고제작, 디프로메트 3사가 각각 세계시장을 휩쓸며 우리나라를 이 시장 1위 국가로 올려놨다. 세 회사는 국내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기술과 디자인 경쟁력을 다투는 글로벌 기업이다. 통증 완화에 쓰이는 ‘개인용 온열기’ 시장도 국내 중소업체 3인방이 시장을 100% 장악하고 있다. 세라젬의료기, 미건의료기, 조양의료기는 외국에는 없는 독자적 품목 개발에 경쟁적으로 나서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신발용 접착제 세계 1위 기업(49.8%)인 동성엔에스씨, 자전거용 신발시장 30%를 차지하는 나눅스, 휴대용 노래반주기 시장의 독보적 1위(78.4%) 엔터기술, DMB수신칩 분야 선두를 달리고 있는 피앤피네트워크, 청소용 극세사섬유 제품 분야에서 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는 웰크론(옛 은성코퍼레이션). 모두가 ‘구구팔팔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우리 중소기업이다. 나라 전체로 보면 조연이지만, 때론 조연이 주연보다 주목 받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주연 같은 조연이 많아야 경제 드라마가 잘 풀리지 않겠는가.


주식 투자 가이드


숨은 보석 못 알아보는 ‘야박한 주가’
코텍, 이오테크닉스, 웰크론, 아모텍, 아이레보, 엔터기술, 다물멀티미디어, 디아이. 각 분야에서 세계시장 1위인 국내 중소벤처 상장사들이다. 모두 앞선 기술력과 지속적인 연구개발(R&D)로 그 자리에 섰다. 공통점은 또 있다. 주가가 의외로 싸다는 점이다. 카지노 모니터 시장 세계 1위인 코텍은 올해 다소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주가가 저점에 형성돼 있다. 무려 8년간의 기술개발 끝에 반도체 레이저 표시 장비를 개발한 이오테크닉스는 2006년에만 860억원의 매출과 4300만 달러의 수출을 거둔 곳. 증권가의 무관심 속에 현재 주가는 1만2000원. 이오테크닉스의 PER은 15.5(1월 10일 기준)에 머물러 있다. 극세사 클리너 분야에서 세계시장의 25%를 점유하는 대표적 기술 수출기업인 웰크론도 시가총액이 290억원에 불과하다. 디지털 도어록 시장 66%를 차지하는 아이레보는 지난해 스웨던 도어록 업체가 경영권을 인수한 곳. 현재 주가는 2000원대 초반으로 연중 최저가 수준이다. 멀티미디어용 반도체칩 설계전문업체(팹립스)인 다물멀티미디어는 지난해 10월 상장했지만, 올해 영업이익이 예상치에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 속에 증권가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1월 10일 현재 주가는 공모가 대비 반 토막 이하인 상태다. 세계 1등이지만 평가는 너무 야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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