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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냄새 맡고 무차별 사재기

돈 냄새 맡고 무차별 사재기

▶미국의 한 농가에서 파놓은 큰 도랑에 옥수수꼴을 넣고 트렉터로 다지고 있다.

밀 값이 단 하루 동안에 22%나 치솟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건은 지난 2월 25일 미국 미니애폴리스 곡물거래소(MGE)에서 발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곳에서 북미산 봄 밀의 3월 인도분 근월물(近月物: 선물 옵션 중 최종 결제일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종목) 가격이 전날 부셸(약 27㎏·국제거래 곡물단위)당 19.25달러에서 4.25달러 올라 23.50달러를 기록했다. 종가로는 역대 최고가다. 그런데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 다음 날 이런 분석을 내놨다. “밀의 전 세계적인 공급 부족을 우려한 세력이 사재기를 한 것은 물론, 이를 계기로 밀 값이 오를 것으로 전망한 투기 세력까지 차액을 노리고 한꺼번에 몰려 ‘사자’ 주문을 하는 바람에 가격이 급등했다.” 여기서 투기 세력은 도대체 누구일까? 마피아나 별도의 검은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곡물이 크게 오를 것으로 예상해 ‘사자’ 주문을 내는 펀드 관리자나 기관, 개인을 가리킨다.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이 같은 투기 수요 때문에 엄청난 자금이 곡물시장으로 몰려 가격의 과도한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올해 들어 농산물 시장으로 몰린 자금은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외신들의 보도다. 게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여파로 미국이 금리를 연달아 내리면서 글로벌 유동성이 좋아지자 곡물 투자, 또는 투기에 투입되는 돈이 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금리 인하로 풀려나간 돈의 일부가 비정상적인 차액을 노린 투기자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달러 가치가 약세를 보이자 손실을 우려한 투자가들이 현물을 다량 매입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곡물 값 이상 상승의 요인으로 꼽힌다. 이 같은 이유로 유가 인상에 거품이 있는 것처럼,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곡물 가격에도 투기 요인으로 인한 거품이 상당히 끼어 있을 수 있다. 선물 전문가들은 하루 22% 상승이라는 기록적인 밀 값 상승이 MGE에서 일어났다는 데 주목한다. 이런 대폭 인상은 주요 곡물거래소 가운데 MGE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곳은 제한 폭이 있어 이 같은 투기성 거래가 힘들지만 이곳은 다르다는 설명이다. 아주 가까운 시기에 현물이 인도되는 근월물의 경우 이곳에선 일일 가격 등락 제한이 없다. 선물 가운데도 3월 물과 같은 근월물은 현물에 해당한다. MGE가 근월물의 일일 가격 등락 제한을 없애자 투기 세력이 여기에 몰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MGE에선 원월물(遠月物) 하루 가격 제한 폭도 다른 곳보다 조금 크다. 하루 60센트였던 것을 90센트로 확대했기 때문이다. 이날 MGE에선 거래가 가장 활발한 봄 밀 선물 5월물은 일일 가격 제한 폭인 90센트가 올라 부셸당 17.0825달러에 거래됐다. 시카고 선물거래소(CBOT)와 캔자스시티 선물거래소(KCBOT)에선 근월물, 원월물 구분 없이 일일 가격 제한 폭이 60센트다. 같은 날 CBOT의 봄 밀 3월물과 KCBOT의 봄밀 5월물은 일일 가격상승 제한폭인 60센트가 올라 각각 부셸당 11.0905달러와 11.6725달러에 거래됐다. 하루 22%라는 기록적인 밀 값 상승은 이 같은 선물거래소별 특성에 기인한 측면도 있는 것이다. 물론 밀 값이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MGE에선 봄 밀 선물 3월물 가격이 올 초부터 132%나 올랐다. 2배 이상 뛴 것이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무려 4배로 올랐다. 다른 곳보다 오름세가 크니 투기 세력이 노릴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곡물 가격이 폭등할 요인은 많다. 우선 올해는 작황이 특히 나빠 세계 밀 시장에서 초과 수요가 예상된다. 우선 주요 곡물 수출국인 호주, 캐나다에서 작황이 좋지 않다.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특히 세계 최대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에선 가뭄으로 밀이 흉년이다.
인구 13억 명인 중국에서 식량 확보는 곧 집권 공산당의 정권 안보와 직결된다. 중국이 비축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세계 곡물 재고율은 연 소비량 대비 1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권하는 18~19%에 못 미친다. 곡물 사재기가 계속될 것이란 전망의 근거다. 이렇게 공급 부족이 예상되는데도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에선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으로 곡물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여기엔 중국과 인도도 포함된다. 바이오 에너지 개발로 전 세계적으로 곡물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는 점도 인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곡물이 식량에서 연료로 개념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 등에선 이미 에탄올 등 연료 생산을 위한 곡물 재배가 일반화하고 있다. 계속되는 고유가로 곡물을 이용해 만드는 에탄올도 충분히 수지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이 산업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뛰어들고 있다. 이렇게 인상 요인이 풍부하니 곡물에 투기세력이 몰릴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지난달 25일의 밀 값 22% 폭등의 직접적인 요인은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 있는 카자흐스탄에서 비롯됐다. 이 나라는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11배가 넘는 270만km2다. 경작 가능지가 한반도 전체와 비슷한 20만km2나 된다. 61만km2의 초지는 별도다. 세계 6위의 곡물생산량을 자랑한다. 인구는 1500여만 명에 불과하다. 당연히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의 하나다. 그 가운데도 봄 밀은 주요 수출품이다.
곡창지대 카자흐스탄발 공급 위기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그런 카자흐스탄의 아흐메트잔 예시모프 농업장관은 수도 아스타나에서 열린 각의에서 3월 1일자로 밀에 수출관세를 매겨 반출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관세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국내 물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밀의 수출을 통제하겠다”며 이같이 발표했다. 카자흐스탄에선 식품가격 상승이 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지난해 12월 물가가 20% 가까이 올랐다. 2003년 3월 이후 최고치다. 이는 달리 말하면 지난해 11월 주요 곡물 수출국이던 러시아에 이어 이번엔 카자흐스탄까지 밀 수출을 줄이겠다는 뜻이 된다. 유럽의 곡창이라던 우크라이나도 지난해 11월부터 밀·옥수수·콩 수출한도를 설정했다. 상황이 이러니 카자흐스탄의 수출관세 부과 파장이 만만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국내용 발표였지만 파장은 전 세계로 번져나가 밀 값이 하루에 22%나 오른 것이다. 최근 들어 밀은 물론 다른 곡물도 덩달아 뛰고 있다. 이날 옥수수 선물 가격은 5월물이 부셸당 5.54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근월물인 3월물은 이보다 13센트 싼값에 거래됐다. 이에 따라 농산물 가격이 물가상승을 주도하는 이른바 ‘애그플레이션’(agflation·농업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이런 현상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까지 낳고 있다. 곡물 값 상승이 주도하는 물가인상 때문에 이달 지방선거를 앞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 사이 ‘요플레’는 40%, 카망베르 치즈는 32%나 올랐다. 세계식량계획(WFP)은 농산물 값 급등으로 원조용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울상이라고 FT가 지난달 25일 보도했다.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중동국가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지만 웃는 사람도 있다. 캐나다에선 곡물 가격 급등으로 농가 수입이 전년에 비해 12% 이상 늘어 역대 최고인 363억 달러를 기록했다. 특히 곡물에서 나온 소득은 전년도보다 25% 늘어 181억 달러에 이르렀다. 농산물 관련 기업의 주가가 오르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 농산물 관련 기업이나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농산물 펀드’도 성황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하지만 한국경제에 악재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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