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도 기업도 ‘왜 이러지?’
| ▶환율 급등으로 해외 송금을 해야 하는 개인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 |
지난해 말부터 꾸준히 오름세를 보인 원-달러 환율이 2월 말부터 이상 급등세를 보였다. 정부 개입으로 3월 17일 달러당 1029.20원의 고점을 찍은 후 하락하고 있지만 안정세로 돌아섰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3월 17일 월요일 아침 대한민국 곳곳이 술렁거렸다. 마치 숭례문 화재, 안양 초등학생 살인사건에 모두 함께 비탄을 느끼듯 너도나도 “이러다 우리 경제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쏟아냈다. 환율이 결국 2년 2개월 만에 네 자릿수를 기록하자 당장 달러 실수요자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장 먼저 울상을 짓는 이는 기러기 아빠들. 서울 강남구 반포동에 사는 C씨는 지난해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아들 둘을 조기 유학 보냈다. 유학을 반대하는 부인과 몇 년 동안 씨름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매달 400만원씩 송금하는데 지난달보다 환율이 80원이나 올라 부담이 커졌다”며 “아이들이 어려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킬 수도 없고, 주가는 계속 떨어져 살기가 팍팍한데 환율까지 올라 유학 보낸 것 자체에 회의가 든다”고 말했다. 외국 여행과 출장이 잦은 이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달 초 미국 뉴욕에 다녀온 박성혜 씨는 “늘 하던 대로 신용카드로 쇼핑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생각보다 카드 값이 많이 나왔다”며 당분간 외국에 나가는 일을 자제해야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여행업계는 예비 신혼부부들의 문의가 빗발친다고 한다. 신혼여행 기간을 줄이거나 여행경비를 최소화하겠다는 고객은 물론 환율에 따라 다른 나라로 여행지를 바꾸겠다는 예비 신혼부부도 있다는 것이다. 업계는 불안한 국제경제와 환율 급등에 한동안 관광 수요가 크게 줄 것이라 전망했다. 선물환 매입으로 환헤지를 한 해외펀드 투자자도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해외펀드 상품 중 절반 정도는 환매할 때 미리 계약된 환율로 원화를 돌려받는 ‘선물환 계약’을 한다. 대부분 투자자는 세계적으로 달러가 약세를 보이자 환율이 더 내려갈 것으로 보고 미리 헤지를 통해 환율 변동 위험을 없앴다. 하지만 오히려 환율이 급등하는 바람에 환차익을 볼 기회를 놓쳤다. 미국발 글로벌 증시 하락으로 펀드 수익률이 떨어진 상태라 투자자들의 상실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개인처럼 일일이 하소연은 못하지만 기업이 입는 타격도 크다. 기업체들은 지난해 말 2008년 환율 예상치를 대략 900원대로 잡았다. 삼성전자는 925원, LG전자는 900원보다 아래였다. 이들 기업은 일단 경영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자재 값이 올라 머리를 싸맨 항공, 철강, 식품업체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대한항공은 이종희 총괄사장이 고유가와 환율 상승으로 지난주 비상경영을 선포해 환율 급등의 심각성을 보여줬다.
환율 1000원대로 오르면…
월 400만원 송금하던 기러기 아빠는 □ 송금액 약 40만원 늘어 생활 부담
외국에서 신용카드 썼더니 □ 50만원 가방이 55만원으로
예비 신혼부부는 □ 유럽 신혼여행도 마음대로 못 가 해외펀드 투자자는 □ 환헤지로 환차익 기회 날려 수입업체는 □ 수입원가 급등으로 울상
수출기업은 □ 원자재 값 상승으로 채산성 확대 효과 상실
소비자물가는 □ 환율 1% 오르면 0.07%P 증가 환율 10원 오르면… 대한항공 □ 연간 170억원 손실
아시아나항공 □ 연간 15억원 손실
대한제분 □ 연간 45억원 손실
CJ제일제당 □ 연간 30억원 손실
삼성토탈 □ 연간 364억원 손실 |
환율이 10원 오르면 대한항공은 170억원, 아시아나항공은 15억원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대한항공은 올해 초 환율 예상치를 920원으로 잡아 환율이 1000원이 되면 손실이 1360억원에 이른다. 아시아나항공도 예상치가 910원이기 때문에 환율이 1000원으로 오르면 손실은 135억원 늘게 된다. 식품업계도 최근 1년 사이 두 배로 오른 밀가루 값에 환율까지 올라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대한제분은 환율이 10원 오르면 밀 수입비용이 연간 45억원, CJ제일제당은 30억원 정도 더 발생한다. 석유화학업체도 기초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올라 고민이다. 연간 400만t의 나프타를 수입하는 삼성토탈은 환율이 10원 오르면 비용이 연간 364억원 더 든다. 고철, 슬래브 등을 수입하는 철강업체도 환율 급등의 영향을 피해 갈 수 없다. 정유업체는 원유 수입 비용이 늘어난 데다 결제 과정에서 금융비용까지 치러야 한다. 원유 계약에 대한 거래 대금을 최종적으로 은행에 결제하는 데 6개월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초 환율(902원)과 3월 현재 환율을 비교하면 손실 규모가 크다. 정유업체 관계자는 “외화 부채가 많아 환율 1원에 수십억원대 손실을 보는데 소비자들 원성에 가격을 올릴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도 몸살을 앓고 있다. 가죽제품을 수입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설마 환율이 1000원을 넘을 줄은 몰랐다”면서 “950원을 넘어갈 때도 비싸다고 생각해 결제를 미뤄왔는데 지금 결제해야 할지 더 내리기를 기다려야 할지 혼란스럽다”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영세기업들은 문을 닫을 위기라고까지 말한다. 원자재 값에 환율까지 올라 생산비는 점점 오르는데 납품단가는 그대로기 때문이다. 제조업체들뿐 아니라 외국과 콘텐트 판권 계약을 맺은 미디어 관련 회사들도 손실을 입었고, 여행업체들도 울상이다. 여행비를 고객에게 먼저 받고 실제 현지 업체에 달러로 지급하는 데 1~3개월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수출기업은 환율 급등에 웃어야 하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수출업체 중에서 수입 의존도가 높은 기업은 환율 상승에 따른 가격 인하보다 비용 상승 효과가 더 크기 때문이다. 미리 선물환 매도를 한 기업들도 환차손을 볼 수밖에 없다. 기업이 대부분 900원대에서 환헤지를 하기 때문에 1000원대로 들어서는 순간 환헤지는 효력을 잃는다. 특히 공격적으로 환헤지를 하는 조선업체 등 중공업체들은 환율이 100원 오르면 환차손만 수천억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환율이 오르면 물가 상승을 초래하고, 소비와 투자는 줄어 결국 내수 부진에 이르게 된다. 원자재 가격 상승, 고유가에 환율까지 오르면 수입 물가가 급등하고 이는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수출업체들도 “힘들다” 전문가들은 환율이 1% 오르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0.07%포인트 오를 것으로 분석한다.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환율 상승의 가장 큰 긍정적 영향은 수출 채산성 확대, 수출기업의 투자와 고용 증대인데 중국, 미국 등 해외시장이 좋지 않아 대외 거래가 원활하지 못하다”며 “결국 환율 상승이 수출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 전망했다. 정부의 747정책(연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강국)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환율 급등으로 정책 실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GNI)이 2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소식에도 국민의 표정은 어둡다. 체감경기가 좋지 않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GNI는 경제성장률, 환율, 물가 등 여러 요인에 따라 결정되는데 현재와 같은 환율 상승이 계속되면 1만 달러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연평균 환율 1000원, 소비자물가 상승률 3.5%,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4.7%를 적용하면 올해 GNI는 1만9528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분석했다. 정부가 7%에서 1% 낮춘 GDP 증가율 전망치 6%를 적용해도 1만9900달러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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