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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성과에 대한 안목이 중요”

“장기 성과에 대한 안목이 중요”

▶1944년 부산 생 경북고·서울대 섬유공학과 졸 70년 코오롱 입사, 산자사업본부장·원사사업본부장·구미공장장 역임 98년 코오롱유화·코오롱제약 사장 2002년 환경재단 감사(현) 2005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위원 2005년 건국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현) 2006년~ 코오롱 대표이사 사장 겸 ㈜KTP 대표이사

이 달의 패널은 부실기업 해결사로 통하는 배영호 코오롱 사장이다. CEO 11년 차인 배 사장은 코오롱유화·코오롱제약의 경영을 함께 맡아 유화를 크게 성장시켰고 부도 위기의 제약은 살려냈다. 8년 만에 친정 기업에 복귀한 ‘구원투수’ 배영호의 한국적 지배구조론.
65:35. 배영호 코오롱 사장이 제안하는 장기 경영성과와 단기 경영성과 간의 이상적인 조합이다. 단기 매매차익을 추구하는 주주들만 위한다면 단기 성과에 치중할 수도 있겠지만 기업으로 계속 존속하려면 장·단기 성과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의 황금률이랄까? “전문경영인은 단기 성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기 매매차익을 노리는 주주 위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주 가치야 회사가 돈을 벌면 저절로 올라가게 돼 있으니 고객, 구성원 등 이해관계자들을 두루 살펴야죠. 가령 주주에게 무리하게 배당을 하느라 회사가 어려워지면 구성원들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희생을 누가 보상합니까?” 배 사장은 포브스코리아 서베이에서 이해관계자로서 노조의 중요도에 대해 10점 만점을 줬다. 고객과 같은 수준이었다. 이런 입장에 대해 그는 “노조는 내부 구성원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고객, 주주 못지않게 구성원이 중요하며, 노조도 마찬가지란 설명이다. “1996년 노사 갈등이 심했던 코오롱 구미공장의 공장장을 맡고서 노조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현대중공업, GM대우 같은 회사가 노사관계 안정 이후 거둔 성과, 현대자동차가 해마다 노조의 파업으로 입는 손실 등을 생각하면 노사 상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공장 근로자들이 많은 제조업체는 생산이 안정돼야 합니다. 주주 가치는 노사가 상생하면 올라가고 노사관계가 불안하면 떨어지게 마련이죠.” 그가 공장장으로 있던 구미공장 노조는 당시 강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임 초기 노조원들이 공장장실을 점거하고 철야농성을 벌였다. 신참 공장장 길들이기였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양말 바람으로 진을 치고 있는 노조원들 틈에 앉았다. 손엔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어차피 내 방에서 밤을 새울 작정이라면 터놓고 얘기나 하자”는 신임 공장장의 제안에 노조원들은 마음을 열었다. 이후 그가 공장장으로 있었던 3년여 동안 구미공장은 한번도 생산 차질을 빚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공장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중고 자전거를 한 대 사 수시로 30만 평이나 되는 현장을 돌았다. 그러다 노조 사무실에 들러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곤 했다. 그런 그에게 직원들은 ‘자전거 공장장’이란 별명을 선물했다. 배 사장은 노사 상생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고 그러자면 CEO가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사 상생의 길에 신뢰란 이정표를 세우라는 것이다. “노조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가 제때 투자를 안 해서 망했다 치자. 나는 나이가 있으니 그 전에 떠날 거다. 그때 가서 어떻게 할 거냐? 이기적으로 대응하면 같이 망한다. 공멸하는 거다.” 신뢰받는 CEO가 되겠다는 것은 CEO로서 그의 취임 일성이었다. 노사 간의 신뢰를 그는 부부 사이의 믿음에 비유했다. CEO가 남편이라면 노조위원장은 부인이라는 것. 남편이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도 애먼 데 있다가 왔다는 오해를 산다면 평소 부인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평소에 이런 신뢰를 쌓기 위해 그는 노조위원장을 포함해 세 명의 사원 대표에게 매달 경영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면 부인이 살림을 살듯이 사장은 벌고 노조는 절약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시장에 가서 콩나물 값도 깎는데 남편이 팁이나 뿌리고 다니면 되겠어요? 사장이 노조위원장에게 경영 상황을 설명하는 건 남편이 부인에게 직장 얘기를 하는 것과 같아요. 말하자면 남편이 부인에게 ‘특별 보너스가 나왔으니 당신 옷 한 벌 해 입어라’거나 반대로 ‘회사가 어려워 이번에 보너스를 반납했으니 외식을 줄이자’고 하는 겁니다.”
CEO와 노조는 부부 사이 같은 믿음 있어야
코오롱 그룹에서 그는 해결사로 통한다. 80년대 뉴욕지사에서 돌아와 맡은 산업자재 사업은 당시 가동률이 40%를 밑돌았다. 주종인 타이어코드 납품 거래의 70%를 금호타이어에 의존해 이 회사의 경영 상황에 사업부의 운명이 달린 탓이었다. 그는 정공법으로 세계 최고의 타이어 회사인 굿이어(Goodyear)를 뚫었다. 나중엔 코오롱의 라이벌인 효성의 형제 기업 한국타이어마저 거래처로 만들었다. 타이어코드 사업은 이제 효자 소리를 듣는다. 98년 경영을 맡은 코오롱제약은 당시 19억원 적자에 이직률이 40%를 오르내리는 중환자였다. 사업 정리설이 도는 회사에 부임하자마자 그는 293명의 임직원 전원에게 100만원씩 격려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나를 믿고 따라 달라”고만 했다. 그는 정리해고 대신 사업구조를 조정했다. 그 덕에 매출이 30%씩 신장하는 우량 기업이 됐다. 월말에 몰려 있는 눈속임 매출도 줄였다. 이후 매출은 줄었지만 영업이익이 크게 늘었고 그에 따라 부채비율, 반품률, 현금회수 기간도 줄어들었다. 팔려고 해도 임자가 나서지 않던 코오롱제약의 사업 개선 과정은 지금도 업계에서 성공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코오롱은 분기에 한 번 이사회를 연다. 세 명의 사외이사 중 두 명은 공대 교수이고 나머지 한 명은 전직 은행 임원이다. 배 사장은 “사외이사의 핵심적인 역할은 해당 기업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투자 건 등 이사회 안건에 대해 사전에 사외이사에게도 알리지만 사외이사들은 아무래도 전문 지식 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결정을 내린다기보다 투명경영에 반하는 일들을 지적하는 게 사외이사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 골프의 원 포인트 레슨이랄까요?”
퇴직 은행 간부는 사외이사로 훌륭
그는 퇴임 CEO와 은퇴한 은행 간부들을 사외이사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퇴임 CEO가 특정 기업에 대해 깊이 알고 있다면 기업을 담당했던 은행 간부는 여러 기업에 대해 많이 알기 때문이다. 사외이사의 비율에 대해서는 비용을 감안하면 최대 절반 정도가 적당하다고 밝혔다. 사외이사 비율에 비례해 투명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집행임원과 기존의 사외이사들도 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비유해 보죠.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밀수품은 아마 전체 물품의 10%가 안 될 겁니다. 그렇다면 전수 조사를 하느니 무작위로 골라 조사하고 적발됐을 때 엄벌하는 게 타당합니다. 제도의 효율을 감안해야 한다는 거죠. 무릇 제도를 만들 땐 제도 자체의 순기능과 비용을 함께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배 사장은 뉴욕 근무 당시 미국의 유명 백화점 메이시스 직원에게서 직접 들은 실제 사례를 소개했다. 도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메이시스는 경비원을 쓰기로 했다. 경비원 인건비는 그러나 도난 피해 액수를 웃돌았다. 결국 이 백화점은 경비원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기업 논리라고 했다. “사외이사 비율이 높으면야 기업설명회(IR)를 할 때 유리하겠죠. 그러나 사외이사가 과반수를 차지하더라도 용기가 없으면 제동을 걸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누가 맡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회사를 아끼는 사람 그래서 반대할 건 반대하는 사람, 관철이 안 되면 사표라도 던지는 사람이라야 돼요. 제도 자체보다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사전적 규제를 완화하고 대신 사후적 감독을 강화하는 것은 마침 경제를 살리겠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내세운 공약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후적 감독 중심으로 규율 체계를 다시 짜는 것은 사회의 자연스런 진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주주총회가 거의 유명무실하다. 주총이 제 기능을 하려면 주주들의 질도 높아져야 한다. 배 사장은 “장기 보유자냐 단기 보유자냐를 떠나 주식회사의 주인으로서 주주들도 장기적으로 주인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은 주주는 주식을 보유할 자격이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 “회사의 주인이라면 회사가 건강하게 클 수 있도록 해줘야죠. 회사가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줘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소액주주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나 이익을 공유하려는 노조도 마찬가지예요. 이익을 과도하게 사회에 환원하거나 구성원들에게 보상해 줬다가는 기업의 체질이 약해지고 맙니다. 결국 CEO의 균형 감각이 중요합니다. 주주 환원, 구성원에 대한 보상, 장기 투자를 위한 유보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거죠.” 성장과 분배도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0년, 20년을 내다본다면 주주, 구성원, 회사가 3분의 1씩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일종의 황금분할인 셈이다. 그는 도요타가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4년 연속 임금을 동결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2세 승계는 경영 능력이 제1 조건
87년 타이어코드 사업을 맡은 지 일 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았지만 그는 임원 승진 인사에서 탈락했다. 따지러 간 그에게 이상철 당시 사장은 “임원 늦게 달면 오래 할 수 있어 좋다”고 달랬다. 승진 누락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다. 그 해 승진자들이 이듬해 구조 조정으로 대부분 옷을 벗었기 때문이다. 배 사장은 메모광이다. 그의 수첩은 일종의 매뉴얼이다. 크고 작은 회의의 안건, 업무 지시에 공장 간 날짜도 적는다. 공장 방문 주기를 조절하기 위해서다. 해외 출장 준비물을 적은 면엔 명함, 때수건, 여분 안경과 더불어 효자손이라고 씌어 있었다.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들도 상황별로 적혀 있다. 그가 한 번도 생신 선물을 잊은 적이 없다는 고모·고모부의 생일도 표시돼 있다. 경북 김천에서 자란 그가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다니는 동안 얹혀 지낸 고마운 분들이다. 배 사장은 전문경영인이지만 우리나라 실정엔 전문경영보다 소유경영 체제가 더 맞는다는 입장이다. 소유경영인의 장기 성과에 대한 안목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조화로운 경영입니다. 대주주는 전문경영인을 선임해 권한을 위임하고 장기 성과를 챙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물론 전문경영인이 잘못하면야 교체해야겠죠. 전문경영인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게 마련입니다.” 대주주 2세의 경영권 승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 자신이 2세인 이웅열 회장에게 발탁돼 CEO가 됐다. “독일에선 3~4대 경영승계도 합니다. 경영권 승계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2세에게 과연 경영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검증됐느냐죠. 물론 검증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누가 검증하느냐는 문제도 있고, 실제 경영을 맡겨봐야 검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새 정부의 규제 완화에 자못 기대가 큰 것 같았다. 외환위기 당시 재벌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 기업집단에 대한 규제가 강화됐지만 규제를 해야 성과가 나느냐 풀어야 나느냐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처럼 답이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이 ‘마마보이’를 만듭니다. 아이가 스스로 하도록 해야죠. 공부 잘하는 아이는 부모가 해외여행을 다녀도 공부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자율적으로 성장해야 출세도 해요. 기업도 규제가 풀려야 해외시장에서 마음껏 경쟁할 수 있습니다.” CEO로서의 꿈은 “코오롱, 좋은 회사죠”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38년 전 대학 문을 나서 그가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코오롱은 손꼽히는 좋은 회사였다. 코오롱유화·코오롱제약 사장을 하고 돌아오니 사세가 크게 기울어 있었다. 섬유산업의 쇠퇴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사양 산업이란 없습니다. 사양 기업이 있을 뿐이죠. 친정 회사를 잘 치료해 건강해진 후 박수 받으면서 떠나고 싶습니다. ‘배 아무개가 CEO로 있을 땐 우리 회사가 제대로 굴러갔다’는 소리를 후배들에게서 듣고 싶습니다. 은퇴 후 여행 길에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코오롱에 몸담았었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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