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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했나, 세상이 바뀌었나

내가 변했나, 세상이 바뀌었나

한때 미국을 등졌었던 세 남자가 있다. 김지하 시인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 이인영 국회의원, 1980년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임종수씨(현재 광주광역시청 공보계장). 이들에겐 19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과 미국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한쪽은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뒤 양민을 학살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방조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결국 군사정권은 종식됐지만 미국은 여전히 건재하다. 미국은 그들에게 여전히 제국주의국가일까? 1980년대와 2008년의 미국, 그들에게 미국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꼽혔던 김지하씨는 미국 구석구석과 아시아, 유럽 등을 둘러본 뒤 해외방문기 ‘예감’을 지난해 출간했다. 뉴스위크 한국판과의 전화인터뷰에서 김지하씨는 먼저 70, 80년대 자신의 미국관부터 설명하려 했다. 당시엔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운동가가 제3세계적 관점에서 미국을 비판했다. 세계를 패권으로 지배하려는 군사·경제 대국으로 미국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김씨의 미국 비판도 그런 일반론의 범주였다. “나는 반미주의자가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지레 짐작했을 뿐 내가 반미 발언을 했거나 미국더러 물러가라 말한 적이 없다.” 주한미군이 물건을 훔친 한국 아이를 학대한 사건이 터져 ‘한미행정협정(SOFA)’을 체결하라는 시위에 참여한 것이 다였다. 반미 주장이라기보단 “정당한 분노 표출에 가까웠다”고 그는 설명했다. 김씨를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긴 독재정권이 그에게 미국행을 권할 때도 한사코 거절했다. 6·3세대 대표주자인 김중태씨가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을 때 “사람이 변했다”는 느낌이 와닿은 탓도 있다. “김중태씨는 세계 자본주의 구조에 비판적이지도 않고 용감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미국에 가면 정치생명이 끝날까 봐 경계했다. 패권주의 국가에 의해 세뇌 당한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가본 미국은 19세 학생운동 시절 생각처럼 경제공항에 휘청대거나 쉽게 망할 나라로 보이지 않았다. 애틀랜타에서 LA까지 자동차로 1주일 동안 미국을 동서로 횡단하면서 바라본 광활한 대지 위에 선 거대한 자연과 인공구조물들은 미국에 대한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내가 미국을 제대로 모른 채 껍데기만 보고 산 게 아니냐”는 자괴감이 들었다. 물론 넘쳐나는 노숙자 등 문명의 그림자도 눈에 들어왔다. 미국여행 결과 “미국도 비판할 게 많지만 제국주의로 못 박는 건 단견”이란 생각에 미쳤다. 김씨는 “미국이 고정 불변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 변화상을 잘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나 힐러리 같은 인물이 미국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현실도 미국 기준에선 혁신에 가깝다. “북·미 관계가 경천동지할 지경으로 급진전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미국 스스로가 정치·경제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는 “나는 좋고 상대는 나쁘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더 세련되고 보편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아시아적 정신과 미국의 서양 물질문명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파트너십을 구축했으면 한다.” 이인영 국회의원(통합민주당)은 통일·반미 학생운동의 구심점인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 연합)의 전신인 전대협 초대 의장을 지냈다. 반미·자주의 선봉에 섰던 80년대 학생운동권의 대표주자는 국민의 친미 여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어려워진 경제 탓도 있다.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야 그나마 돌파구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국민이 있다”고 그가 말했다. 물론 ‘퍼주기’ 오해를 받았던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 보수 언론들의 흠집내기 공세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결국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발전 모델은 ‘작은 미국’화로 가는 것인데 그게 좋은지 북유럽형이 좋은지 속단할 수는 없다”고 판단을 미뤘다. 2004년 총선으로 국회에 등원한 그는 국회의원 자격으로 미국을 세 차례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과거엔 미국 정치인을 모두 한통속이라 여겼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민주당 정권과 공화당 정권은 북핵 문제나 외교 현안을 푸는 방법론이 다르다. 상대적으로 클린턴 정부가 부시 정부보다 대결보다 대화와 평화적인 방법을 선호한다고 여겼다.” 그는 미국의 장점에 대해 언급했다. “미국은 경제·사회·기술·학문 등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평가했다. “무한 경쟁과 적자 생존 법칙”을 단점으로 꼽았다. 미국이 자유와 기회의 땅이란 통념에 관해 이 의원은 “언제부턴가 그런 기회가 제한돼 왔기 때문에 요즘 변화 기치를 내건 버락 오바마가 신드롬을 낳고 있는 것”이라고 입장을 달리했다. 그는 미국이 강대국이자 선진국인 점은 분명하지만 “패권을 지향한다면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북한과 갈등을 빚게 될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참여 움직임도 문제 삼았다. 미국이 북한과 국경을 맞댄 특수상황에 있는 한국과 그렇지 않은 일본과 영국을 동일 선상에 놓고 판단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8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이 체제경쟁을 벌였던 시절이다. 이 의원은 “미국식 시장경제의 대안으로 사회경제에 관심을 두긴 했지만 지금은 사회경제는 불가능하고 시장경제에 기초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영을 현실적으로 거부하긴 어렵다는 상황인식이다. 최근 퇴조하는 한총련의 활동에 대해선 “학생운동이 재정비를 통해 시대적으로 대중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한총련의 구호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반향도 미미한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비판은 하되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광주시청 공보계장 임종수씨는 일찍이 반미주의자였다. 1980년 12월 광주미문화원 방화 혐의로 2년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전남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임씨는 같은 해 5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했거나 적어도 방조했다고 믿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땐 전남도청 앞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항쟁 당시에도 우리는 미국이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넣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믿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전까지 미국을 한국의 맹방이자 자유민주주의를 떠받드는 국가로 여겼다. 하지만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후 미국에 대한 환상과 믿음이 깨져나갔다. 미국에 속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미국은 자신들의 작전지휘권 안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응했다.” 친미 감정이 반미 감정으로 돌변했고, 적개심과 분노가 치밀었다. 21세 젊은 청년의 눈에 미국은 약소국을 침탈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둔갑했다. “그 시절엔 콜라도 먹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고 돌이켰다. 결국 가톨릭농민회 소속 회원들과 함께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그는 현재 고3, 중2에 재학 중인 두 딸과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둔 가장이다. 아직 아이들에게 해외 어학연수 기회를 주지 못해 여건이 된다면 외국에 아이들을 내보내고 싶어 하는 “보통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나아가 아이들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유학가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아이들이 미국 문화와 교육을 마음껏 누린 뒤 국가에 기여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임씨는 과거 자신이 외쳤던 ‘반미’를 반성할 생각은 없다. 방화사건이 있었던 당시엔 반미가 정당했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양민 학살을 최소한 묵시적으로 방조했고 도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다. 방화사건 이후 28년이 지나는 동안 한·미 관계는 많이 변했다. 임씨가 바라보는 현재의 미국은 이렇다. “이념의 시대에서 실용의 시대로 넘어왔다. 인간사회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지배하고, 국가 관계도 그렇다. 한국이 교역 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경제적 여건이 상당히 개선됐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닐 게 아니라 이젠 ‘노’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복리를 위해선 미국과 선택적인 교류가 불가피하다.”


한·미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 주요 사건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
평양 주민들은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를 불태웠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에 이어 일어난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됐다.

광성보 전투(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지역 지휘관이던 어재연 장군과 휘하 장졸 350명이 강화도 손돌목에 침입한 미국 로저스 제독의 아시아 함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사진은 노획한 조선군 장수 깃발인 ‘수자기’(帥字旗) 앞에 선 미국 군인들.

노근리 사건(1950년)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기병사단 7기병연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교에 접근하던 한국인 피란민 중에 조선인민군이 있다고 보고 공군기로 기총사격했다. 수백 명의 민간인이 피살당했다. 1999년 AP통신이 발굴·보도해 이슈가 됐다.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이다. 미국이 유협진압에 쓰일 한국군 병력 이동을 승인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80년대 반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1982년)
문부식, 김은숙 등 부산 지역 청년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했다. 인근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 수백 장의 반정부 유인물이 뿌려졌으며, 세계 언론도 반미 무풍지대 한국의 반미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1985년)
서울대, 연세대 등 서울 지역 대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미문화원을 점거,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대한 미국의 사과와 리처드 워커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사에 ‘점거 농성’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일으켰다.

미선·효순 사망 사건(2002년)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가 한창 무르익던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효촌면 시골길에서 조양중학교 2학년생인 신효순, 심미선양이 주한 미군 2사단 장병이 몰던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촛불시위 등 전국적인 반미 운동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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