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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조각 되는 어음 중소기업 울고 있다

휴지조각 되는 어음 중소기업 울고 있다

기업들의 원활한 자금 유통을 위해 도입된 어음. 그런데 지금 어음이 중소기업을 옥죄는 애물단지가 됐다. 일반인들조차 ‘어음’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부도수표’라고 할 정도다. 어음 남발에 따른 중소기업의 연쇄부도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최근엔 어음 위·변조 사건 등 최첨단 신종 범죄까지 등장하고 있다. 어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된 전자어음제나 구매자금대출제 또한 적지 않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우리 경제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기업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어음 문제를 집중 취재했다. 한 푼이 아쉬운 중소기업들이 휴지조각이 된 어음을 구기며 울분을 토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되지 않겠는가.
“어음만 떠올리면 울화통이 터진다.” 센서·제어기기 전문기업 오토닉스 박환기(54) 대표는 어음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음 탓에 골머리를 앓았던 처참한(?) 기억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82년. 박 대표는 방직용 자동 컨트롤 박스사업체를 운영했다. 주요 납품처는 대구지역 섬유기계 제조업체들. 그러나 이들 업체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불어 닥친 불황의 여파로 줄줄이 도산했던 것. 박 대표에게도 한파는 가혹했다. 납품 대금으로 받은 수많은 어음이 휴지조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때 납품 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대략 1억원가량. 근근이 살림살이를 꾸리는 중소기업엔 큰돈이었다.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어떡해서든 자금난을 해소하려 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돈줄이 꽉 막힌 박 대표는 부도 일보직전까지 내몰렸다. 빚쟁이들이 집까지 압류했고, 회사 곳곳엔 빨간 딱지가 붙었다. 어음 때문에 빚어진 참사였다. “방만경영으로 초래된 위기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열심히 만들어서 납품한 제품 대금을 어음으로 받았다는 이유로 이처럼 고생을 했으니, 어음이 싫을 수밖에….”
어음 부도내고도 외제차 타는 사업주
하지만 이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98년 외환위기 시절에도 박 대표는 어음부도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 납품기업 대부분이 경영부실로 퇴출되면서 어음이 부도처리 됐던 것이다. 이때는 부도어음이 수억원에 달했다. 업계의 알짜기업으로 손꼽히는 오토닉스는 현재 협력업체들과 어음거래를 하지 않는다. 100% 현금결제를 원칙으로 한다. 어음으로 받은 고통을 어음으로 되돌려주기 싫어서다. 이를테면 결자해지(結者解之) 경영학이다. 김의태(58) 동대문운동장상가 협동조합 감사는 요즘 불철주야라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다. 매일 날밤을 새운다. 업무가 많아서가 아니다. 부도어음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2004년 김 감사는 액면가 1억5000만원의 어음을 받는 조건으로 사업가 A씨에게 1억4700만원을 빌려줬다. 어음은 A씨의 유일한 담보였다. 내심 걱정됐지만 “틀림없다”는 A씨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믿음의 대가는 처참했다. A씨는 연락을 끊고 잠적했고, 어음은 부도처리됐다. 할인(현금화)을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던 것. 김 감사는 어쩔 수 없이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그럼에도 아직 1억5000만원은 받지 못하고 있다. 채무자 A씨가 “돈이 없다”며 완강히 버틴 까닭에 법적으로 이기고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A씨는 외국산 고급 차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돈이 없다고 주장한다. 입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 졸지에 어음만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소송에서도 이겼는데…. 어음만 보면 허탈해진다.” 어음의 폐해가 심각하다. 위험수위를 훌쩍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어음의 연쇄부도는 이제 흔한 일이다. 김의태 감사처럼 고의 부도어음에 ‘한 방’ 먹은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엔 어음 위·변조 등 신종범죄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컬러복사기만 있으면 어음 위·변조가 가능하다. 첨단 과학기술이 부른 ‘화’다. 어음결제 비중이 여전히 높은 중소기업들은 애간장이 탄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제조업체의 경우, 납품 대금 중 42.1%를 어음으로 받는다. 가죽·가방 업계와 자동차 업계의 어음결제 비율은 각각 58.9%, 64.9%에 달한다. 특히 이들 업계에서 전량 어음으로 납품하는 비율은 각각 11.2%, 18.8%에 이른다. 10건 가운데 1~2건은 무조건 어음으로 거래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어음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2007년 중소제조업체 532개를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사업체의 78.3%가 어음제도 ‘폐지’를 원했다. ‘어음제도의 존속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업체는 21.7%에 그쳐 큰 대조를 이뤘다. 10개 중소기업 가운데 무려 8개 업체가 어음제도 폐지를 바라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중소기업들이 폐지를 요구하는 어음은 진성어음이다. 이는 상거래 대금 결제를 위해 발행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하청업체로부터 물건을 납품 받고 현금 대신 발행하는 게 바로 진성어음이다. 이런 까닭에 상업어음, 물품대금 어음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음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상거래와 관련된 것들이다. 김인석 키움증권 IB사업본부 파트장은 “어음에는 견질어음, 기업어음, 표지어음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상거래와 관련 있는 어음은 주로 진성어음”이라며 “진성어음의 폐지와 어음법 자체의 철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어음 받고 120일 넘어야 현금화
그렇다면 진성어음(이하 어음)의 문제는 무엇일까. 대표적인 어음 폐해 중 하나는 연쇄부도 가능성이다. 어음은 복수기업 간 배서, 양도가 가능하다. 한 개 어음의 부도시, 연쇄파산이 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외환위기 시절, 중소기업들이 고구마 줄기 엮이듯 도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영 상태가 좋으면서도 어음 부도로 ‘흑자도산’하는 기업이 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어음결제 기간이 지나치게 장기화돼 있다는 점이다. 물건을 납품해도 어음 결제까지 무척 오래 걸린다는 얘기다. 당장 현금이 필요한 중소기업으로선 치명적이다. 중소기업중앙회 통계에 따르면 제조업의 경우, 평균 38.4일이 지나서야 어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 어음이 결제될 때(현금화)까진 평균 87.9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납품 후 현금을 받는 데까지 총 126.3일이 걸린다는 얘기다. 섬유업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업계의 평균 어음 수취일은 41.2일, 어음 결제까지 걸리는 기간은 90.2일이다. 총 131.4일을 견뎌야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현금으로 결제해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음거래마저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동대문 도매상 B씨의 사례다. 그는 20여 년째 백화점, 대형마트에 신발류 등 각종 물건을 납품하고 있다. 처음부터 백화점, 대형마트가 납품처였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도매상과 치열한 경쟁 끝에 간신히 납품할 수 있게 됐다. B씨는 “백화점, 마트에 물품을 납품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러나 B씨는 항상 결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납품 후 45일간 어음을 주지 않는 게 업계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물품이 다 팔릴 때까지 현금은커녕 어음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45일을 기다려 간신히 어음을 받아도 결제기간은 최소 3개월, 많게는 6개월. ‘처음부터 현금으로 달라고 하면 되잖느냐’는 물음에 그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백화점, 대형마트에 납품하기 위해 줄 서 있는 도매상들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음 대신 현금으로 결제해 달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퇴출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음 받는 게 잘리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종합광고대행사 윌윈 커뮤니케이션의 김무현 대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김 대표는 최근 H학원의 광고를 대행했다. 이 학원은 어음을 10개월 안팎으로 끊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직전 광고대행사는 “현금으로 결제해 달라” “현금 대신 신용카드로 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가 퇴출 당했다. “현금 결제하면 깔끔하고 좋다. 하지만 어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어음을 발행하는 쪽에서 봤을 때, ‘현금 주지 않아도 계약만 해주면 OK다’고 흔쾌히 말하는 대행사는 수없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굳이 현금 결제를 하겠는가.” 김 대표는 이를 영세기업의 애환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중소기업의 먹고 살기 위한 과당경쟁이 물건을 납품 받는 업체의 배짱만 키워놓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갑’과 ‘을’의 관계다. 이에 따라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쥐락펴락하고, 중소기업은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일 수밖에 없다. 이는 좀 더 하위 납품단계로 내려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A사가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하고 대금으로 어음을 받고, A사는 다시 자신들에게 납품하는 업체에 어음을 끊어주는 악순환의 고리가 굳건하게 형성돼 있는 것이다. 박길준 연세대 명예교수는 “어음의 폐해는 본질적으로 대기업, 중소기업 그리고 하위 납품업체들의 ‘힘의 차이’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이 같은 바게닝 파워(Bargaining power)를 바로잡는 게 급선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어음부도액 하루 평균 150억원 선
물론 어음 만기일 이전 금융기관을 통한 할인(어음을 현금화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 역시 녹록지 않을 때가 많다.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들의 어음은 언제든지 할인이 가능하다. 명동 사채시장에서도 환영 받는다. 그러나 그런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어음 당좌개설 업체 1만570개 가운데 신용등급 A 이상을 받은 기업은 단 8.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투기등급(BB+이하) 기업이 어음을 발행한 비중은 무려 77.8%에 달했다. 어음을 발행하는 기업 10개 가운데 8개 업체가 투자부적격 등급에 속해 있다는 얘기다. 금융권에서 어음을 할인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투기등급에 속한 기업들의 할인율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컨대 투기등급에 속하는 유력기업 D사의 월 금리는 2.5%. 연리로 따지면 30%에 달한다. D사의 액면가 1000만원 어음을 할인하면 무려 300만원이 깎이는 셈이다. 이 때문에 때론 중소기업이 납품 원가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윈윌 커뮤니케이션 김무현 대표는 “할인율이 너무 커서 남는 게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며 “금고 안에 보관돼 있는 어음이 적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또 있다. 투기등급 기업들이 결제능력 이상으로 어음을 남발, 부도어음이 속출하기 십상이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신용등급 A 이상 업체가 발행한 어음의 부도율은 평균 0.06%에 불과하다. 하지만 BB등급 이하부터는 BB등급(2.02%), B등급(4.70%), CCC등급(8.87%), CC등급(15.79%), C등급(16.08%) 순으로 부도율이 급상승한다. 월별 어음 부도액도 상당하다. 2008년 1월 현재 어음 부도액은 5361억원, 2·3월은 각각 3154억원, 5452억원에 달했다. 하루 150억원 가까운 어음이 부도나는 셈이다. 부도어음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만 죽을 지경이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실제 어음 발행 규모를 보면, 투기등급 기업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며 “어음 부도율이 심각한 이유도 이 같은 투기등급 기업들이 어음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결국 손해는 물건을 납품하는 위치에 있는 중소기업이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석 키움증권 파트장도 “어음은 경기 민감도가 높기 때문에 경기 침체시 할인이 어려워진다”며 “이는 중소기업의 자금난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라고 밝혔다. 숱한 폐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어음제도는 사실 효율적이고 편리한 지급수단이다. 잘 운영될 경우 장점도 많다. 담보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의 신용창출과 현금화의 수단으로 제격이다. 계속적 거래 관계에 있는 기업 간 신용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상환 가능성도 괜찮은 편이다. 배서·양도에 의해 유통이 가능, 기업의 유동성 관리에도 적합하다. “어음을 폐지하기보다는 장점을 살리는 차원에서 개선해야 한다”고 일부 전문가가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중소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명실상부한 성장동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음제도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제도의 효율성을 제고해야 한다”며 “이에 따라 어음 대체수단 이용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 대안으로 그는 ▶어음 발행시 당좌개설 요건 강화 ▶어음 발행인에 대한 신용 조사·평가 ▶위·변조 부도에 대한 제재 강화 등을 제시했다. 김 연구위원은 “어음 폐지는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라며 “대기업, 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행위를 바로잡으면 어음의 장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비뚤어진 상거래 관행을 무슨 방법으로 바로잡느냐는 것이다. 허정 다인회계법인 회계사는 “수십 년째 이어져 온 불공정 거래 관행을 하루아침에 뿌리 뽑는다는 생각 자체가 오류”라며 “최소한 상거래에 활용되는 어음은 폐지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태복 국민대 초빙교수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진정으로 상생하기 위해선 공정한 하도급 관계가 설정돼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이에 따라 어음 관행을 철폐하는 대신 현금결제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음제도 개선책이 여럿 나오고 있지만 과연 잘 활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근본 원인을 치료하지 않고 개선책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어음제도 개선책은 적지 않은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전자외상매출채권은 법인세 공제혜택이 있지만 적용대상이 제한돼 어음을 대체하는 효과가 적다. 전자어음은 분실·도난의 위험이 없고, 위·변조가 불가능하다는 점 등 수많은 장점이 있지만 실명거래에 따른 영업 비밀 노출 우려로 활성화에 제약이 따른다. 전자어음 이용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적 인센티브도 부족한 편이다. 매출채권 보험의 문제점도 적지 않다. 가입 대상 및 한도가 제한돼 그 효과가 일부 기업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기업구매자금 대출은 구매기업에 자금을 빌려줘 어음을 대체하자는 제도인데, 구매기업이 자금을 어디에 쓰는지 통제하기 어렵다. 가령 물품 대금 지급에 사용하지 않고 운영자금으로 쓰거나 투자를 해도 파악하기 쉽지 않다. “다른 어음은 몰라도 진성어음만큼은 폐지해 현금결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어음 결제를 현금으로 대체하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 포스코, SK, LG, KT는 100% 현금결제의 대표적 기업들이다. 협력업체들의 자금 수요가 증가하는 시기엔 어음 결제일을 앞당기는 사례도 적지 않다. CEO가 직접 나서 현금결제를 밀어붙이는 경우도 눈에 띈다. 극세사(가는 실) 클리너 업계의 절대강자 웰크론 이영규 대표는 “어음만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호반건설 장동열 대표도 내실경영을 목적으로 협력업체 공사대금을 전액 현금결제하고 있다. 협력업체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신도리코도 우상기 창업회장의 ‘현금결제’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경우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거나 기업 CEO의 확고한 경영 원칙에 따라 현금결제를 하는 것이다. 제도가 아니라 기업 사정에 따라 결제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현금결제가 우리 기업 전반에 확산되기는 어려운 게 지금의 현실이다. 어음과 달리 현금결제는 할인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자금운용에 큰 도움이 된다. 당장 급한 자금도 유통 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거래시장의 효율성과 투명성이 높아지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어음 폐지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어음 폐지를 추진하기 위해 은밀히 연구용역을 맡긴 바 있다. 하지만 모든 정권은 어음 폐지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만큼 어음을 없애는 것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금융실명제 도입처럼 혁명적인 방법으로 어음을 없앨 수는 없을까. 중소기업을 살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어음 폐지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중소기업인들은 오늘도 어음 폐지를 요구한다.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과연 ‘어음 절(切)하고 현금과 통(通)하라’는 명제를 실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어음 발행 규모 얼마나 되나


총 발행 액수 “며느리도 몰라”
2007년 어음 총 교환금액은 1경9744조원이다. 교환금액은 증권결제원에서 현금화된 어음의 양을 말한다. 이 때문에 어음 교환금액과 발행금액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어음의 총 발행금액은 얼마일까. 아쉽게도 어음의 발행금액은 집계가 불가능하다. 한국은행도 발행금액에 대한 통계자료가 없다. 이는 97년부터 적용된 새로운 회계기준 때문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받을 어음과 외상매출금을 ‘외상매출채권’으로 통합, 받을 어음에 대한 통계를 따로 잡을 수 없다. 한국금융연구원 김동환 연구위원은 “어음의 총 발행 규모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음의 유통경로를 찾기 힘들다”며 “이 때문에 위·변조 어음이 손쉽게 유통되고, 고의 부도어음이 속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음 총 발행 규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중소기업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어음의 종류

진성어음 어음은 발행하는 사람이 일정한 금전 지급을 약속하거나 제3자에게 지급을 위탁하는 유가증권이다. 외상을 입증해 주는 서류라고 생각하면 쉽다. 어음의 유형은 다양하다. 진성어음은 상거래 대금 결제를 위해 발행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하청업체에 물건을 납품 받고 현금 대신 발행하는 게 진성어음이다. 종종 상업어음, 물품대금어음으로 불린다. 진성어음은 세금계산서가 첨부돼 있다. 액면 규모도 다소 작다. 상거래를 수반하기 때문에 123,456,789원 등 구체적 금액이 기입된다.

융통어음 단순히 운전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발행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빌린 대가로 발행되는 어음이다. 발행인의 신용을 수취인이 이용, 융자를 받는 게 목적이다. 외형상 진성어음과 융통어음의 구분은 쉽지 않다. 발행인 정보, 액면가로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융통어음은 10,000,000원 등 큰 단위의 금액만 기입된다.

견질어음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 거래에 대해 약정을 한 사항을 반드시 준수할 것을 약속하는 담보제공용 어음. 통상 대상가격의 20~30% 정도 금액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고, 아니면 아예 무기명 백지어음으로 발행하기도 한다. 금융기관이 기업에 대출할 때 담보력을 보강하기 위해 기업으로부터 위임 받은 어음으로 일종의 백지어음 성격을 갖는다. 기업이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거나 자금 회수에 의문이 생기면 이를 교환해 자금화한다.
기업어음(CP) 융통어음 중 신용평가기관 2개 이상에서 투자적격 평가를 받은 기업에서 발행하는 것을 기업어음이라고 부른다.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공인 받은 융통어음이라 할 수 있다. 신용 상태가 양호한 기업이 상거래와 관계없이 운전자금 등 단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기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하는 만기 1년 이내의 융통어음으로 상거래에 수반되는 상업어음(Commercial bill)과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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