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는 ‘규제 프렌들리’?
공정위는 ‘규제 프렌들리’?
▶손해보험협회 회원사 사장단 회의 |
“지금 정부가 52개 품목에 대해 물가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이건 정부가 담합을 공공연하게 조장하는 거 아닌가?” 한 손해보험사 사장이 ‘익명 처리’를 전제로 한 말이다. 그의 말을 해설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물가 관리를 받는 품목은 가격이 비슷하게 유지된다. 물가 당국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업체들이 값을 올리는 폭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이때 해당 품목을 제조하거나 서비스하는 기업들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담합의 굴레를 뒤집어쓸지 모른다.’ 그의 말은 손보사들의 처지를 물가 관리를 받는 업종에 빗댄 것이었다. 손보사들은 “금감원의 행정지도를 받기 때문에 보험가입 금액에 대한 보험료의 비율인 보험료율에서 회사별로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보험료율이 마치 적극적으로 담합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정위의 시각은 손보사들과 큰 차이가 난다. 손보사와 공정위의 입장 차이를 Q&A 형식으로 정리해 보자. Q는 어느 손보사 실무자가 기자에게 설명하고 주장한 내용이다. A는 이에 대한 공정위의 입장으로, 공정위 의결서에서 인용해 정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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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보험업의 소비자는 보험 가입자다. 보험업에 있어서 소비자보호는 무조건 보험료를 낮추도록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보험사가 적정한 보험료를 받아 재무건전성을 유지하게끔 함으로써 많은 보험가입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보험업법을 만들었고, 보험업법을 근거로 세워진 금융감독원이 보험사를 대상으로 행정지도를 벌인다. 공정위는 손보사들이 일반손해보험 상품들의 보험료율을 놓고 담합했다고 의결했다. 일반손해보험이란 자동차보험을 제외한 화재보험, 해상보험 등을 가리킨다. 또 보험료율이란 보험가입 금액에 대한 보험료의 비율을 말한다. 그러나 금감원은 보험개발원을 통해 각 손보사가 보험료율 결정에 참고할 비율을 제시한다. 또 개별 손보사가 보험료율을 타사보다 크게 낮추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금감원의 행정지도는 손보사들의 보험료율이 비슷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측면을 고려할 때 보험료율이 비슷하다는 결과만을 놓고 공정거래법을 적용해 담합했다고 모는 것은 부적절한 것 아닌가?
A 공정거래법에는 보험업에 대해 공정거래법의 적용을 제외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또 보험업법에서 보험 산업의 특수성을 이유로 공정거래법을 배제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금감원이 손보사들을 행정지도한 일은 사실이나, 이는 보험료율 등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 준 것에 불과하다. 손보사들은 담당자 회의를 여러 차례 열어 보험료율에 대해 별도로 합의한 것으로 인정된다. 손보사와 공정위 사이의 평행선은 한 치도 좁혀지지 않았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 손보사들에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의결했고, 손보사들은 공정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공정위의 지난해 9월 의결은 삼성화재, 현대해상 등 10개 손보사를 대상으로 했다. 공정위는 의결서에서 “10개 손보사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일반손해보험의 보험료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순보험료율 등의 범위에 대해 합의함으로써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했다”고 의결했다. 이에 따라 삼성화재 119억원, LIG손해보험 83억원, 현대해상 74억원 등 9개 손보사에 모두 40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동부화재는 109억원의 과징금이 산정됐지만 공정위 조사에 적극 협조한 대가로 전액 면제를 받았다. 9개 손보사들은 과징금을 낸 뒤 잇따라 행정법원에 소송을 냈다. 핵심 쟁점이 바로 앞에서 Q&A로 정리한 ‘금감원의 역할’이다. 공정위는 의결서에서 “금감원은 방향을 제시해 준 것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과징금을 산정하는 과정에서는 “보험 산업 전반에 대한 금감원의 행정지도가 있었던 점”을 고려했다. 그래서 손보사들 전부에 대해 과징금을 20% 덜어줬다. 말하자면 손보사들은 보험료율 결정에 있어서 금감원의 행정지도 비중이 20%를 훨씬 넘는다고 주장하고, 공정위는 20%밖에 안 된다고 반박하는 셈이다. 금감원의 행정지도가 보험료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법정 공방에서 판가름 날 사안이다. 문제는 금감원의 감독을 받는 금융회사는 항상 공정위의 담합에 걸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금감원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정지도를 할수록 손보사들의 보험료율이 일정한 범위 안에 모이게 되고, 이는 공정위의 기준으로 볼 때 담합한 결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규제 업종은 ‘담합’에 걸리기 쉬워 홍대식 서강대 법학부 교수는 “두 기관의 목적이 다른 데에서 역할 상충이 비롯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금감원은 손보사들이 재무건전성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비용을 커버하지 못할 정도로 보험료율을 낮추지 못 하도록 하는데, 여기엔 경쟁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령 제정과 관련해서는 공정위의 의견을 거치도록 하는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이번 건처럼 상시적으로 진행되는 업무에 대해서는 의견 교환이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금융 외에 통신, 방송 등이 공정위의 담합 판정을 받기 쉽다. 금융처럼 정책당국의 규제를 받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홍 교수는 “규제 업종이라 할지라도 자극을 줘 경쟁 체제로 바꿔나가야 한다”며 “공정위의 이번 담합 판정과 과징금 부과는 그런 외부 충격으로서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둘째 쟁점은 ‘제도 변화와 이에 따른 행위 변화 사이의 시차’를 얼마나 고려해야 하는가다. 일반손해보험은 1994년부터 자유화되기 시작해 2002년에는 완전 자유화됐다. 공정위는 일반손해보험이 완전 자유화된 2002년 이후에도 손보사들이 과거처럼 일정한 보험료율에 머물렀다며 이를 담합으로 판정했다. 이에 대해 손보사의 한 관계자는 “보험료율이 과거 단일했다가 차츰 다양해지는 과정”이라며 “손보사들로부터 2002년부터 당장 완전 자유화된 모습을 보이라고 하는 건 무리”라고 주장했다.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하면서 ‘일반손해보험 상품 판매 시장에서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다시 하면 안 된다’고 주문했지만, 2007년과 2008년 손보사들의 보험료율도 이전 5년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보사들에게 기존 보험료율에 안주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보험료율 경쟁을 억제하는 담합까지 가긴 힘들다”고 말했다. 손보사에 따라 보험료율을 큰 폭으로 낮춰 시장점유율을 키우겠다는 전략을 택할 수 있고, 그런 전략은 다른 손보사들이 기존 보험료율에 머물수록 잘 먹히는 구조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번 공정위의 의결을 둘러싼 다른 쟁점은 과징금이다. 손보 업계 관계자는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조치에 수긍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손보 업계 주장과 이에 대한 공정위 지철호 대변인의 답변을 Q&A로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Q 담합은 부당이득을 얻기 위한 것 아닌가? 공정거래위원회는 손해보험사들이 일반보험 상품을 놓고 담합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부당이득은커녕 손해를 봤다. 일반손해보험 중 대표적인 상품은 일반화재보험과 공장화재보험인데, 일반화재보험의 경우 손보협회 회원사들은 5년간 원수보험료 약 6150억원에서 영업손실 95억원을 입었고, 공장화재보험은 원수보험료 약 8300억원에서 390억원 영업손실을 봤다. 손해 보는 담합도 있나?
A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행위에 대한 과징금은 부당이득 환수와 함께 행정제재적 측면이 있다. 즉 경제 질서를 위반한 행위에 대한 제재로 과징금을 부과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당이득이 없는 경우 과징금을 부과할 수 없다면, 극단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업종에서는 항상 담합을 해도 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인권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과징금을 산정하는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정위는 기본적으로 담합과 관련한 매출액에, 위반행위의 중대성에 비례하는 부과기준율을 곱해 과징금을 산정한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우선 ‘위반행위의 중대성’을 판단하는 데 주관이 개입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위반행위의 중대성은 ‘매우 중대’, ‘중대’, ‘중대성이 약한’ 등 3등급으로 구분되고, 각 등급엔 일정한 비율 구간이 할당된다. 각 공정위는 이번 건과 관련해 “손보사들이 ‘중대한’ 위반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다”며 중간 아랫부분 수준의 부과기준율을 적용했다.
“손해봤는데 과징금까지 물라니…” 더 근본적인 결함으로 지적되는 부분이 매출액의 일정 비율을 과징금으로 떼어간다는 것. 이렇게 할 경우 이번에 과징금을 맞은 손보사들처럼 적자를 내고 과징금도 무는 ‘억울한 처지’가 나올뿐더러, 과징금 제도도 실효를 거두지 못할 공산이 크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이 선임연구위원은 “위반행위로 얻은 부당이득이 클수록 과징금도 더 부과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그렇게 하는 편이 위반행위 억제라는 과징금 제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집단시책 중심에서 경쟁촉진 중심으로, 사전적 규제 중심에서 시장친화적인 제도 및 법 집행으로 전환하겠다.” 공정위가 지난 3월 28일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 계획이다. 공정위는 이를 위해 출자총액제한을 폐지하고 담합을 철저히 감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담합 조사·판정과 과징금 부과가 이전보다 더 강도 높게 이뤄진다면, 기업들은 과연 공정위가 ‘시장친화적’이라고 여길까.
“금감원 행정지도 있었다” 판례 금융감독원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 충돌과 관련해 종종 인용되는 대법원 판례(2002두12052)가 있다. 2005년 1월 대법원은 동양화재 등 11개 손보사들이 공정위의 자동차보험료 담합 판정에 불복해 승소한 행정소송의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금감원이 행정지도를 통해 사실상 자동차보험료 변경에 관여했고, 그 결과 보험료가 동일하게 유지된 사정을 참작했다”고 판단 이유를 설명했다. 공정위 판정과 소송은 손보사들이 2000년 4월부터 적용되는 자동차보험료를 종전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행위와 2000년 8월부터 적용되는 자동차보험료를 같은 비율만큼 올리기로 결정한 행위를 대상으로 삼았다. 이 대법원 판결은 손보사의 가격 결정이 금감원의 영향 아래에 있을 경우엔 공정위의 담합 판정이 부적절하다는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 판결을 이후 사건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긴 어렵다. 이후 손해보험 시장이 자유화됐고, 사안마다 금감원의 행정지도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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