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매원을 향하면서 문득 화투의 ‘비광’이 떠올랐다. 우산을 바쳐 든 한 남자의 발치에 개구리가 팔짝거리고 있는 풍경. 그 그림 속에는 일본의 대서예가 오노 도후(小野道風·894~967)의 일화가 담겨 있다. 젊은 오노 도후는 서예에 도통 진전이 없자 아예 서예를 그만두기로 작심하고 집을 나섰다. 때는 장마철이어서 우산을 쓰고 냇가를 걷고 있는데 그 냇물 속에 개구리 한 마리가 팔짝거리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개구리는 냇가의 급류에 휩쓸려 가지 않기 위해 버드나무 둥치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비에 젖은 버드나무 둥치가 너무 미끄러워 개구리는 번번이 나무 둥치에서 미끄러졌다. 그러나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점프하고 또 점프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버드나무 둥치에 올라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노 도후는 미물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저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인간인 자신이 포기하려 했던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오노 도후는 그 길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붓을 잡았고, 훗날 일본 2000년 역사에서 3대 서예가로 꼽히게 됐다는 이야기다. 비가 내리던 어느 아침, 데라마치 거리에 있는 고매원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은한 묵향과 어우러져 진열된 먹과 붓, 벼루 등 문방사우를 살펴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세계 최고의 먹 가게답게 먹의 종류가 다양하다.
먹 납품으로 벼슬 받은 1대 조상 고매원의 먹은 크게 20종류로 나뉜다. 우선 칠먹(칠묵)으로 소나무 송진을 태워 그 그을음으로 만든 먹이다. 입자가 가장 고운 먹으로 최상급품이다. 이 먹은 아주 검은색이라기보다 담색 계통의 색깔을 낸다. 칠먹의 종류는 ‘죽림칠현’ 등 20여 종에 이르고, 가격도 비싼 것은 한 개에 11만엔(약 110만원) 정도 한다. 그 밖에 송진을 태워 만든 극상유연먹이나 참깨를 태워 만든 호마유연먹 등이 있다. 이들 제품은 모두 한문 혹은 일본어인 히라가나를 쓰기에 적당한 최상품들이다. 그리고 기타 히라가나용 제품이 10여 종 있고 가격도 학생용으로 1만 엔대 이하의 비교적 싼 제품들이다. 먹 구경을 한참 하고 났는데, 코앞의 기둥 위에 현액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시서자오(詩書自娛)’(시와 글을 스스로 즐겨라). 점장인 가노(加納)에게 물어보니 그 옛날 동대사(東大寺)의 2~3대 주지를 역임한 청수공조(淸水公照) 스님의 글귀란다. 동대사는 나라시에 있는 일본 최대의 사찰로 대불의 손바닥에 13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그 크기가 일본 제일이다. 유서 깊은 노포다 보니 걸어놓은 현액 또한 예사롭지 않다. ‘고매원의 먹’이라고 하면 서예하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다. 최상의 품질 때문이다. 좋은 먹이란 종이에 글씨를 썼을 때 그 글씨가 수백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입자가 고와 잘 갈리며, 몇 년이 지나도 부패하지 않는 먹을 말한다. 바로 고매원의 먹이 그러하다. 고매원(古梅園)은 그 본점이 나라시에 있다. 창업은 1577년. 본래 먹은 중국 한나라 때에 유미산이라는 산에서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을 받아 뭉쳐서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러던 것이 한반도를 경유해 고구려 시대 때 일본에 진출한 것이다. 고구려의 스님이었던 담징이 서기 610년 일본에 건너가 나라 지방에 먹의 제조법을 전해준 것이 그 시작이다. 담징이라면 나라의 호오류지(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린 스님으로 유명하다. 그 후 일본에 전해진 먹은 나라 지방을 중심으로 오사카, 오미, 교토 등 간사이 지방은 물론 멀리 후쿠오카의 다자이 후, 시코쿠 지방에까지 퍼져 나갔다.
서기 1400년 나라 지방에 흥복사라는 거찰이 세워지면서 나라 지방에서 생산된 먹이 쓰였고, 나라 고매원도 그 연장선에서 창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매원에서 배포된 자료에는 그렇게 되어 있으나 일본의 고대사에 능통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고매원의 먹이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는 서기 748년 일본 최대의 사찰인 동대사가 처음 세워지면서 그 대불의 눈에 눈동자를 찍을 때,즉 화룡점정에 처음 쓰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매원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1577년, 마쓰이 도진(松井道眞·1528~1590)이라는 사람이 처음 가게 문을 열면서부터다. 1577년 고매원의 1대 조상은 일본에서 최초로 가장 양질의 먹을 생산해 조정에 헌납하면서 ‘토좌연’이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국가에 먹을 납품하는 최초의 어용상인이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2대인 마쓰이 도게이(松井道慶·1578~1661) 시대에 처음으로 고매원이라는 상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매원이라는 상호는 그의 집안에 오래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그의 집에 놀러온 시인, 묵객들이 정원에 핀 오래된 매화나무에 핀 꽃을 감상하다가 ‘고매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6대인 송정원태(松井元泰·1689~1743)는 1739년 막부의 허가를 받아 규슈의 나가사키로 내려간다. 거기에서 청나라에서 건너온 정단목(程丹木), 왕군기(王君奇) 등 시인, 묵객들과 교류하면서 청나라에서 먹을 만드는 법을 새로 배우게 된다. 이것이 일본에서 근대적인 먹이 재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들은 먹 제조법 외에도 글씨와 그림, 대화록 등을 남겼는데 그것이 ‘고매원 묵담’ ‘묵화’ ‘고매원 묵보’(전 4권) 등이다. 또 먹을 제조하는 그림도 남겨 후세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이어 제7대인 송정원휘(松井元彙·1716~1782)는 어버지의 명을 받아 홍화먹(紅花墨)을 일본 최초로 만들어 낸다. 홍화란 노란색 꽃이 피는 엉겅퀴처럼 생긴 국화과에 속하는 1년생 식물로 우리가 뼈를 다쳤을 때 먹는 홍화씨가 바로 그 꽃의 열매다.
|
▶(왼쪽부터) 최고 품질로 인정 받는 먹. 역사와 전통이 숨쉬는 붓. 고매원 상점 내부 . |
홍화 열매는 어혈이 들었을 때 달여먹기도 하지만, 그을음을 받아 먹을 만드는 데도 쓰인 것이다. 송정원휘는 먹을 새로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아 홍화먹 외에도 신선먹을 비롯, ‘죽림칠현’ ‘음중팔선’(飮中八仙), ‘현지우현’(玄之又玄) 등 오늘날에도 그 제조법 그대로 제조되는 신품종의 먹을 만들어냈다. 이때부터 고매원의 먹은 그 이름을 떨치면서 ‘먹=고매원’이라는 등식으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이후 세월이 흘러 1868년 일본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모든 백성이 평등해지고, 과거의 관직이 폐지되었지만, 고매원은 여전히 궁내성의 어용상인으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품질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1대 송정원순(松井元淳·1862~1931) 시대에 들어서는 그 자신이 나라시의 명예시장이 되면서 회사 내에 영업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현재는 15대 송정순차(松井純次·60세) 사장이 가게를 이끌어 가고 있다. 고매원의 먹은 그 비법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먹과 아교, 물의 배합비율에 그 비밀이 있고, 벡제 시대 때의 제조 원칙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노하우를 가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토의 고매원은 지점이다. 본점은 나라시 쓰바키 마치에 있고, 공장도 거기에 있다. 교토 고매원 근무자는 영업사원 5명이 전부이고 본점에는 기술자를 포함, 20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다. 고매원의 상술은 단 하나, ‘세계 최고의 품질’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먹 가게로서는 가장 오래됐기 때문에 교토나 나라 지방에 관광 온 관광객들이 기념으로 하나씩 사 가거나, 서예의 대가들이 늘 고정적으로 고매원의 먹을 주문해 쓰기 때문이다. 이따금 학교나 서예단체에서 대량 주문이 오기도 하는데 그 경우도 대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사훈은 ‘언제나 좋은 품질로’다. ‘온고이지신’(溫故以知新·옛것이 늘 새롭다) 마음으로 한결같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