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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거든 ‘일로 한판 붙자’

나이 묻거든 ‘일로 한판 붙자’

일본은 지난해부터 이른바 ‘단카이노세다이’(團塊の世代)의 은퇴가 시작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기술인력 부족 현상이 심화할 것을 우려하고, 일본 정부는 민간기업들이 정년연장이나 정년폐지 정책에 적극 동참하도록 촉구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단카이세대’는 일본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경제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가 1976년 펴낸 『단카이의 세대』라는 책 이름에서 비롯됐다. ‘단카이’(團塊)는 불쑥 튀어나온 덩어리라는 뜻이다. ‘단카이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1949년 사이에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세대로 약 700만 명. 작년부터 육십 줄에 들어서기 시작한 이들은 일본 생산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제법 큰 ‘덩어리’다. 오사카에는 ‘마이스타-60’이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의 입사자격은 60세 이상이다. 600명 직원의 평균 나이가 64.5세. 모두 숙련기술자다. 이 회사는 도쿄, 오사카 일대의 공장과 기업 등에 설비설계, 기술자문, 경영관리, 법무업무 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삼성엔지니어링 전문위원 김상윤씨 일흔둘의 나이가 회사 살찌운다
한국 삼성엔지니어링은 최근 플랜트 분야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적, 연령에 관계없이 능력과 체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재취업 기회를 주고 있다. 정년퇴직 후 55세가 넘어 재입사한 전문인력만 100여 명이나 된다. 2002년 삼성엔지니어링의 전문위원으로 스카우트된 김상윤(72)씨. 재작년에 고희를 넘겼지만 임원이 아닌 전문관리자로 있으면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한편, 후배들에게 표준을 설정해 주고, 가르치고, 조언하며 바쁘게 하루를 살고 있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가 벡텔, ABB 러머스 등에서 화공플랜트 전문엔지니어로 32년간 일하다 2002년 삼성엔지니어링에 스카우트돼 귀국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이 분야의 ‘권위자’였다. ‘섕 킴’으로 통하는 그는 후배들과 의견조정을 위해서는 며칠이라도 계속 토론을 벌인다. ‘왜 이렇게 하는 게 좋은 것인가’를 모두가 납득해 인정하고 넘어가야 매사가 매끄럽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올해 59세인 조성남씨. 외환위기 때 삼성엔지니어링에서 명예퇴직했다가 2001년 재입사했다. 명퇴 전에 태국 윤활유공장 건설현장에서 소장직까지 수행했던 조씨의 현재 직책은 프로포절팀 제너럴 매니저. “1년간 놀면서 금융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시야가 많이 넓어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신입사원 기분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동기생들은 모두 퇴직했고 임원급도 대부분 입사 후배다. 그러나 그가 맡은 일은 너무 중요하다. 1조원대의 플랜트 사업에 관련된 공사비 견적을 자신의 책임 아래 작성해 사업자에게 제시, 대형 프로젝터 수주를 돕는다.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해외에서 버는 삼성엔지니어링은 최근 중동시장 호황으로 화공플랜트 수주량이 크게 신장되면서 숙련된 기술인력이 모자랄 지경이다.

대우조선 정년 후 재입사 박길복씨
“눈 감고도 배 짓는 일 한다”
대우조선해양 선행도장팀 박길복(59)씨. 지난해 5월 정년퇴직한 박씨는 한 달간 휴식을 갖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퇴직 전에 일했던 바로 그 부서에서, 똑같은 도장(塗裝) 일을 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은 물론 근무조건이 모두 같다. 다만 월 급여 수준이 퇴직 전과 약간 차이가 난다. 대우조선해양은 정년이 일률적으로 58세다. 그러나 지난해 3월부터 본인이 원하고 희망하는 부서에 일자리가 있을 때 재입사하는 정년 후 재입사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 제도에 따라 재입사한 사원은 현재 170명. 서울 여의도 면적의 1.5배나 되는 옥포조선소에는 2만7000명의 ‘배 짓는 사람’이 바다와 바다, 대륙과 대륙,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에는 선박설계 엔지니어가 2000명이나 있다. 일본 전체 선박설계 인력보다 많은 기술인력을 대우조선해양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공업을 아직도 노동집약적 3D산업 정도로 아는 분이 많습니다만 이젠 고도의 기술력과 월등한 관리능력이 없으면 배 건조가 불가능합니다.” 박종기 대우조선해양 이사의 설명이다. 배 한 척을 짓는 데 20만~25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기에 고도의 생산관리 능력 없이는 공기(工期) 단축 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0년 이상 배를 짓는 일에 종사한 숙련된 기술인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조선왕국으로 군림하는, 한국의 자산이란다.

기업은행 퇴역 지점장 최순식씨 노련한 ‘기업 주치의’로 재탄생
한 기업에서 근무 연한이 쌓이면 쌓일수록 경륜이나 직무 관련 노하우는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숙련된 기능을 마음껏 발휘할 때쯤이면 ‘고령’이라는 덫에 걸려 시들어버리고 만다. 특히 은행처럼 30~40년의 긴 세월을 금융 관련 업무에만 몰두하다 물러나면 ‘고숙련 다기능’은 ‘쓸모없는 고철’로 사장되기 일쑤다. ‘Co-RM(Corporate-Relationship Manager)’. 기업은행이 퇴직사원들의 ‘고숙련 다기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마련한 제도다. 기업은행에서 10년 동안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3년 전 퇴직한 후 이 일을 맡은 최순식(59)씨. 그는 이 제도를 ‘기업 주치의’ 제도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죽어가는 기업을 살리고, 병든 기업을 회생시킬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이 제도에 대한 기업들의 이해가 부족해 매우 비협조적이어서 애로가 많았다. 심지어 기업의 정보를 빼가기 위해 파견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기업도 있었다. 아직도 몇몇 기업은 컨설턴트가 필요로 하는 기업 정보를 허심탄회하게 공개하기를 꺼리기도 하지만 제도 시행 3년째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자발적으로 의견을 묻거나 의논을 청하는 기업도 많아졌다고 한다.  

법정관리 CEO 된 박문성·강신찬씨 쓰러져가는 회사 살리는 마법사
기업의 별’이라는 중역이나 이른바 고용 사장들은 경영의 달인들이다. 그러나 어느 때고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법정관리인은 바로 그 물러난 경영진, CEO 가운데 경륜을 되살려 쓰러져가는 회사를 소생시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리가공 메이커 제일GMB의 박문성(64) 사장은 1년 전 이 회사의 법정관리인으로 선정됐다. 파산위기에 처한 이 회사가 회생 가능성이 엿보이고, 박 사장이 그 적임자라는 법원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잘나가던 제일GMB가 경영 위기에 부닥친 것은 주방기구 쪽으로 경영 다각화를 시도하다가 과다 투자의 덫에 걸린 때문. 박 사장이 2007년 6월 법정관리인으로 선정됐을 때는 3개월째 종업원 임금이 체불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부임 석 달 만에 체불을 해소하고 1년이 지난 지금은 새 수익원 발굴을 통한 중장기 비전을 짜는 데 골몰하고 있다. 박 사장은 이 회사가 외형은 그런대로 호조를 보이지만 영업이익은 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판단, 강력한 구조조정과 위기의식 공유를 통한 일체감 조성으로 난관을 돌파했다. 그는 1969년 삼성에 입사해 제일모직, 제일합섬을 거쳐 1999년 새한 부사장으로 퇴직했다. 그는 안락한 여생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아직 일할 의욕도 남았고, 마침 대한상의의 권유도 있어 2000년 파산위기에 봉착한 (주)SKM의 법정관리인으로 취임했다. 세계 굴지의 오디오 테이프 생산 업체인 (주)SKM 역시 과다 투자 부작용으로 회사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박 사장은 6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이 회사를 소생시켜 인수 기업을 찾아주는 데 성공했다. 또 한 명의 놀라운 경영솜씨를 (주)대아리드선(線) 법정관리인 강신찬(58·사진)씨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1973년 두산산업에서 기업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현대중공업을 거쳐 1997년 두레 대표이사로 퇴직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물러난 그는 1999년 수산특장(水山特裝)의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됐다. 그는 부실경영으로 파산위기에 처한 이 특장차 전문 메이커를 6년 만에 위기에서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종업원 전체를 하나로 묶는 작업이 제일 어려웠지요. 그러나 노조위원장이 바뀌고 회사가 수익을 내며 모양새를 갖춰 나가니까 일이 풀리더군요.” 숨 돌릴 틈도 없이 2007년 강 사장은 대아리드선 법정관리인에 다시 선임됐다. 전임 관리인의 뒤를 이은 자리지만 1년 3개월 만에 회사를 파산위기에서 구하고 인수기업을 찾아준 다음 다시 물러났다. 한 달째 쉬고 있는 그는 “한국 기업은 연령차별을 말자는 말을 구호로만 외칠게 아니라 실제로 경륜과 경험을 활용할 무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사우디 현장에 간 정유암씨 깐깐한 시어머니가 필요하다
정유암(56)씨. 건설공정 관리기술자다. 한미파슨스의 은퇴기술자 재고용 플랜에 따라 은퇴 7년 만에 다시 사우디 리야드의 연금공단 건물 신축현장에서 공정관리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24만 평의 부지에 연건평 34만 평의 매머드 종합청사를 짓고 있다. 총 공사기간은 5년, 공사비용 1조2000억원. 50대 후반의 나이로는 공정관리 총책 일이 벅차다. 하지만 보람을 느낀다. 그는 어느 날 인터넷에 뜬 광고에 눈길이 갔다. ‘20대의 패기, 30대의 열정, 40대의 경험. 이 모든 것을 가진 대한민국의 50·60대여, 해외 현장으로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한미파슨스의 주요 업종은 CM(Construction Manage- ment: 건설사업관리). 건설 발주에서 준공까지 깐깐한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현장전문가가 필요하다. “정년이라는 숫자상의 제한으로 일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경제 측면에서 큰 손실입니다. 앞으로 열정과 경륜을 가진 고령 은퇴자의 재고용을 계속 확대할 작정입니다.” 한미파슨스 김종훈 대표의 말이다.


은퇴 앞둔 전문직 임원 97만 명


일 더 하는 게 이들의 ‘운명’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우리나라 기업에 소속된 임원이나 관리자 가운데 50세 이상 된 사람이 97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도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모두 직장을 떠나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일본의 ‘단카이세대’ 못지않게 열과 성을 다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이 땅의 시니어들도 곧 은퇴의 대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의 함성과 함께 자랐고, 경제성장과 외환위기, 환란극복 등을 모두 체험한 이들의 소중한 경험과 재능을 ‘은퇴’라는 강물에 그냥 흘려 보내도 되는 것인가? 전문직 은퇴자의 경험은 무형의 자산이다. 이들의 경험과 축적된 기술을 기업이 어떻게 재활용할 것인가를 좀 더 심도 있게 생각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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