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빨래하던 손, 시장의 ‘큰손’ 되다

빨래하던 손, 시장의 ‘큰손’ 되다

▶한 식품연구소가 주최한 모니터링. 주부 모니터 요원들이 시식 후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 아줌마는 제2의 CMO(최고 마케팅 책임자)입니다. 이제 한국 기업은 아줌마를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제품 마케터로 상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한 리처드 에델만 에델만(글로벌 PR컨설팅 기업) 회장은 “전반적인 한국 소비시장에서 아줌마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며 “주부들의 화제를 선점해 그에 맞는 마케팅을 펼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 소비시장에서 아줌마는 중요한 소비자가 아니었다. 할인매장과 화장품 업체에서만 주요 고객으로 대할 뿐이었다. 이들의 비중이 그만큼 미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아줌마들이 소비시장 전반에서 주요 고객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발간한 세계언어사전에서는 아줌마를 ‘집에서 살림하는 40대 이상의 여자들로 자녀를 다 키운 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어 높은 구매력을 가진 한국 특유의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이 점만 봐도 현재 국내 시장에서 아줌마의 위치를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시장에서는 아줌마만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 활동이 번지고 있다. “예전의 주부들은 시장에서 유행 추종자 정도로만 치부돼 왔습니다. 그리 중요한 고객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전문직 진출이 많아지고 다양한 미디어에 익숙해지면서 아줌마가 주요 고객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구매의사 영향력도 커졌고요. 특히 아줌마의 결집력은 대단해서 이들의 입소문 하나만 잡아도 제품 홍보는 절반 이상을 끝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차 기업들이 아줌마 고객에 신경을 쓰는 것이기도 하고요.” 황인영 아줌마닷컴 대표의 설명이다. 덧붙여 그는 “요즘 주부들은 자신의 나이가 아닌 자녀의 나이로 세상과 소통하기 때문에 유행을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아줌마 중시 마케팅’은 남성의 선택권이 절대적일 것 같은 주유소와 수입차 업체, 주류 업체 등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소비자모니터센터가 155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열 가정 중 여섯 가정은 아내가 주유소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적으로 주부가 결정한다’가 26%, ‘남편과 상의하지만 주로 주부 의견이 큰 영향을 미친다’가 34%로 집계됐다. GS칼텍스는 몇 년 전부터 ‘아름다운 모니터’ 제도를 도입해 여성고객 마음 사로잡기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제도는 여성 운전자만 모니터 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데, 주로 하는 일은 주유소의 서비스 평가와 주변 환경 평가, 고객 서비스에 대한 아이디어 제안 등이다. GS칼텍스 주유소 내 화장실 조명 변화, 보행 안전 그림책자 제공 등은 모니터 요원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다. GS칼텍스 강태화 차장은 “모니터 요원 70% 이상이 아줌마”라며 “이들의 활발한 활약으로 GS칼텍스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됐으며, 일부 매출 상승 효과도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SK에너지도 아줌마 마음 잡기에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주유소 내 디자인을 바꿨으며, 각종 이벤트를 벌여 시장바구니, 락앤락 제품, 영화 관람권 등을 지급하고 있다. 수입차 구매에서도 아줌마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과 수도권에서 아우디와 렉서스 등 수입차를 구매한 고객 중 아줌마 고객이 절반가량이었다. 2~3년 전과 비교해 두 배가량 늘어났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 관계자는 “남성이 구입했다고 하더라도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 산 경우가 많아 실제 주부의 영향력이 더 큰 셈”이라고 밝혔다.

술 살 때 주부 영향력 75.6%
볼보코리아가 2년 전 선보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XC90’은 주부 운전자를 주 고객으로 삼은 제품이다.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운전할 경우 편리한 조작을 위해 특별 제작한 페달을 달았고, 아이를 안고 쉽게 차에 오를 수 있도록 중간 계단을 만들어 장착했다. 반응은 꽤 좋았다. 한창 잘나갈 때는 주문 후 6개월을 기다려야 차를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게 볼보코리아 측의 설명이다. 렉서스는 시슬리·샤넬 등과 공동으로 중년여성의 피부관리법, 화장법 등을 알려주는 미용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또 여성용 골프백 등을 사은품으로 지급하는 행사도 벌였다. 술을 구입할 때도 주부의 영향력은 75.6%로 나타났다(소비자모니터센터 조사결과). 반면 남편이 술을 구입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3.7%에 불과했다. 업계에서도 알코올 도수를 낮추고 디자인에 신경을 쓰는 등 아줌마 고객을 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패션 업계와 화장품 업계 등의 마케팅 활동은 한 술 더 뜬다. 이미 주부를 주 고객으로 삼고 있는 이들 업계는 연령대와 취향을 세분화해 아줌마 잡기에 온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패션업체들은 ‘뉴포티(New Forty)’ 여성들을 겨냥한 제품 기획과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뉴포티란 용어는 이전 40대와는 달리 자신의 외모와 몸매를 가꾸는 데 적극적 태도를 보이는 40대 전후의 아줌마를 일컫는 신조어다. 제일모직의 ‘이세이미야케’는 독특한 주름 원단이 실루엣을 살려주고 체형의 단점을 커버해주기 때문에 경제력 있는 40대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브랜드. 이세이미야케 역시 40대 고객 비중이 해마다 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내수시장에서 40대 여성들이 새로운 소비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에게 맞춘 제품 기획과 마케팅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브랜드 ‘아이오페’는 지난 3월 뉴포티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빛으로 관리하는 홈 I.P.L’이란 제품을 출시했다. 아모레퍼시픽 홍보팀은 “피부 노화가 절반 이상 이뤄진 30~40대 주부들에게 잠시나마 피부의 젊음을 되찾아주겠다는 생각으로 마케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5년 전 국내 최초로 아줌마를 위한 ‘30분 순환운동 프로그램’으로 시장을 선점한 이큐빅도 아줌마 마케팅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이큐빅은 여성전용 헬스클럽으로, 주부에게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병행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해 큰 호응을 받았던 업체다. 이큐빅 문자란 과장은 “몸매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뉴포티 주부들을 위해 효과적인 운동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대형 할인매장도 아줌마를 타깃으로 한 마케팅 활동 비중을 높이고 있다. GS스퀘어백화점은 매월 ‘프로 주부의 쇼핑 탐방기’를 전단에 내보낸다. 전단에는 아줌마가 직접 쇼핑한 상품을 소개하고, 아줌마 고객이 선정한 중남미 관련 아이템을 실었다. 백화점 관계자는 “전단 마케팅은 30~50대 아줌마들의 공감을 일으켰으며, 소개된 아이템의 매출이 30% 이상 늘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도 아줌마 마케팅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전 분야에서 아줌마를 주 고객으로 하는 마케팅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현우 한양대 홍보학과 교수는 “몇몇 연구결과만 봐도 실제 구매에서 주부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며 “일부 기업에만 그쳤던 아줌마 마케팅이 이제는 기업들의 살아남기 위한 필수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벌써 4년차…하림 프리미엄 ‘더미식’ 자리 못 잡는 이유

2“관세는 사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트럼프 행정부, 보호무역주의 강화 하나

3통념과는 다른 지침, '창업' 꿈꾸는 이에게 추천하는 이 책

4AI에 외치다, “진행시켜!”… AI 에이전트 시대 오나

5한국에도 중소도시의 새로운 기회가 올까

6로또 1146회 1등 당첨번호 ‘6·11·17·19·40·43’,…보너스 ‘28’

7“결혼·출산율 하락 막자”…지자체·종교계도 청춘남녀 주선 자처

8“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진정성 있는 소통에 나설 것”

950조 회사 몰락 ‘마진콜’ 사태 한국계 투자가 빌 황, 징역 21년 구형

실시간 뉴스

1벌써 4년차…하림 프리미엄 ‘더미식’ 자리 못 잡는 이유

2“관세는 사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트럼프 행정부, 보호무역주의 강화 하나

3통념과는 다른 지침, '창업' 꿈꾸는 이에게 추천하는 이 책

4AI에 외치다, “진행시켜!”… AI 에이전트 시대 오나

5한국에도 중소도시의 새로운 기회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