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저주’ 주의보
‘승자의 저주’ 주의보
#장면 1. 유진그룹의 주영민 전략담당 사장은 5월 15일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그는 “하이마트 인수 후 차입금 증가로 유동성 악화와 신용도 하락 등의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세간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자산 매각으로 3000억원의 현금을 조달해 부채비율을 낮추는 등 경영 개선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유진그룹은 2004년 고려시멘트를, 2007년 로젠택배·서울증권·한국통운을, 올 초에 하이마트를 잇달아 인수하며 5년 사이에 자산을 10배 가까이 불렸다. 그러나 하이마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94%이던 부채비율이 195%로 높아졌다. 하이마트 인수 대금 1조9500억원 가운데 80%가량은 남의 돈이었다.
#장면 2. 이랜드그룹은 5월14일 홈에버(옛 까르푸)를 삼성테스코에 2조3000억원에 팔았다. 삼성테스코가 홈에버 지분(1조원) 100%와 부채(1조3000억원)를 모두 떠안는 조건이었다. 이랜드는 홈에버 인수 때 자기 돈은 3000억원만 넣었다. 나머지는 재무적 투자자와 금융회사 등이 보탰다. 그래서 홈에버 매각가는 1조원에 이르지만 이랜드 측은 원금만 겨우 건졌다. 2006년에 프랑스계 한국까르푸를 1조7500억원에 인수했던 이랜드그룹은 2년도 안 돼 홈에버를 포기했다. 비정규직 파업 등으로 몸살을 앓던 홈에버의 부채와 이자비용이 점점 늘었기 때문이다. 옛 까르푸 인수의 주역인 권순문 이랜드개발 대표는 “영업 관련 노하우와 지식 습득 등을 감안하면 기회비용은 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지 실추 등을 감안하면 밑지는 장사라는 평가가 많다. ‘승자의 저주’란 표현이 있다. 경매에서 경쟁이 치열하면 낙찰가가 실제 가치보다 올라 낙찰자(승자)가 결국 손해를 보는 현상을 일컫는다. 경쟁에서 이겼지만 승리하기까지 너무 많은 돈을 쏟아 부어 결과적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은 상황을 가리킨다. 승자의 저주는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가 1992년에 내놓은 책 제목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에서 승자의 저주는 자주 발생한다. 프로야구의 자유계약선수 계약에서부터 경매는 물론 M&A에서도 일어난다. M&A 시장에서는 어느 기업이 과열된 인수전 탓에 결과적으로 매물을 턱없이 높은 가격에 인수한 후 그에 걸맞은 경영성과를 내지 못해 신용등급이 하락하고 자금난을 겪는 사례가 종종 나타난다. 신용한 맥스창업투자 사장은 “남의 돈을 어떻게 얼마나 빌리고 갚을 지와 인수 후 시너지를 높이기 위한 통합 전략이 M&A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순환 출자 구조이거나 어설픈 지주회사 체제의 회사가 남의 돈과 계열사를 동원해 M&A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전체 지배구조까지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뜨거운 M&A 열기에 매물 값 천정부지 = 3~4년 전부터 뜨거워진 국내 기업의 M&A 열기가 여전하다. 두산, 금호, STX 등이 M&A로 그룹의 주력 사업을 바꾸고 재계 순위를 단숨에 끌어올리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 기업이 앞다퉈 M&A 시장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M&A 전성시대다. 앞으로도 대우조선해양, 현대건설, 하이닉스, 우리금융 등 새 주인을 기다리는 기업이 줄지어 있다. 당장 8월쯤으로 예정된 대우조선해양의 우선매각협상권을 놓고 포스코, GS, 한화, 두산 등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밝힌 올해 자산총액 기준 이들 그룹의 순위는 포스코가 38조5000억원으로 6위, GS가 31조1000억원으로 7위, 한화는 20조6000억원으로 12위), 두산17조원으로 13위다(공기업과 민영화된 공기업 제외). 자산총액 8조7000억원으로 재계 22위인 대우조선을 인수한 기업은 재계 순위를 단번에 올릴 수 있다. 잇단 M&A 실패로 자존심이 상한 GS는 대우조선을 인수하면 포스코를 제치고 재계 6위에 올라선다. 김승연 회장이 ‘제2의 창업’이라고까지 말하며 의욕을 보이고 있는 한화는 한진과 금호아시아나, KT를 제치게 된다. ‘M&A의 귀재’로 불리는 두산도 대우조선을 지렛대로 한화를 넘어 한진까지 위협할 수 있다. 매각 주간사 교체 등으로 어수선해 아직 매각 공고도 나지 않았지만 벌써 온갖 소문이 나도는 등 인수전이 치열하다. 예컨대 ‘포스코는 새 정부 들어 이구택 회장의 자리가 불안해 인수전에 집중하기 어렵다’, ‘한화는 대한생명 인수 자격 시비가 문제가 될 것’이라는 식의 루머가 떠돌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반영하듯 대우조선의 인수 가격은 사상 최고인 7조원을 웃돌 전망이다. 지금까지 규모가 가장 비싼 매물이었던 LG카드의 6조6000억원을 거뜬히 넘길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우조선 다음 타자인 현대건설의 몸값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에서는 현대건설 인수 가격이 7조~8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이닉스의 값어치는 입이 벌어질 정도다. 15조원에 이를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M&A 관계자는 “인수 시점에서 비싸다 아니다를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요즘은 쓸만한 매물이 없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정으로 과열 경쟁을 조장하는 작전 때문에 매물 가격이 올라간다는 지적도 있다. 대우조선 인수전에 참가한 한 기업의 M&A 담당자는 “미래의 잠재 경쟁자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출혈 경쟁을 유도해 가격을 올리고 시너지 효과를 떨어뜨리는 방행 공작도 빈번하다”고 전했다.
▶지난 몇 년 새 M&A로 사세를 키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왼쪽)과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
자금시장 사정은 극과 극 = 외국계 금융회사의 한 임원은 “펀딩이 되지 않으면 매물의 가격이 내려가게 마련”이라며 “아직은 펀딩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매물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누구나 탐내는 매물이면 돈이 몰린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금시장 사정은 그리 여의치 않은 편이다. 포스코나 GS 같은 탄탄한 기업은 비교적 낮은 금리로 필요한 만큼 자금을 모을 수 있지만 중견 그룹만 해도 그렇지 않다. 내 돈이 별로 없어도 기업 인수전에 참여할 순 있지만 1~2년 전 만큼 자금 확보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특히 저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지적이 많다. 심지어 거의 두자릿수에 가까운 금리를 요구하는 재무적 투자자도 늘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신한은행 투자금융부 관계자는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인수금융 금리 통상 8~9% 수준”이라며 “올 들어 1%포인트가량 올랐으며 이런 기조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외국계 금융회사 관계자도 “자금이 줄어들진 않았지만 예전보다 금리가 올랐기 때문에 남의 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하려면 위험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에서는 돈줄 자체가 말라가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에 따라 해외 차입 여건이 악화됐다. 국민은행은 6월 초 3억~5억 달러 규모의 유로화채권 발행을 추진했다가 금리 조건이 너무 불리해 연기했다. 증권 쪽으로 돈이 몰리면서 은행권의 실탄도 부족해졌다. 여기에 경기가 나빠지면서 기존 인수금융 자금의 투자 부실 우려도 불거지고 있다. 금융위원회의 이창용 부위원장은 5월 29일 헤지펀드 코리아 콘퍼런스에서 “국내 기업이 M&A를 위해 금융회사에서 너무 많은 돈을 빌리는 게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대우조선 인수전에 뛰어든 한 기업의 자금 담당자는 “국내 메이저 은행도 조단위 대출은 쉽지 않은 상황이며 그나마다 수수료 등을 더하면 전략적 투자자와 비교해 별로 유리하지도 않은 조건이라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출혈 경쟁을 조장해 인수 가격을 높이는 것과 비슷한 방해 공작이 인수금융 시장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인수 자금이 넉넉한 기업이 필요하지도 않은 자금까지 끌어 모으는 것이다. 경쟁사의 돈줄을 말리는 전략이다. 재계 관계자는 “결국 ‘자금 전쟁’이기 때문에 비신사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고 밝혔다. 외국계 금융회사 관계자는 “기업이 얼마 정도 필요하다고 미리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지만 그보다 덜 쓸 때가 많다”며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다른 곳에 굴릴 수 없어 돈이 묶이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경기 나빠져 ‘M&A 소화불량’ 가능성 커져 =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국내 M&A 시장에서 인수한 기업이 도리어 발목이 잡히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M&A로 성장가도를 달려온 유진그룹과 이랜드그룹은 유휴자산을 매각하거나 인수 기업을 되팔았다. 두산을 조심스레 지켜보는 사람도 늘고 있다. 국내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 역사상 규모가 가장 컸고 시너지 효과도 크다는 평가를 받은 밥캣이 미국 건설 경기 악화로 고전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극동건설을 인수한 웅진그룹도 비슷한 이유로 속앓이를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이란 두 대어를 낚은 금호아시아나도 승자의 저주에 걸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주력사의 1분기 실적이 나빠졌다. 대우건설의 성적표도 신통치 않았다. 대우건설의 1분기 매출은 1조3027억원으로 지난해 1분기보다 5%, 순이익은 527억원으로 56%나 줄었다. 아시아나항공의 1분기 매출은 9793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6% 증가했다. 그러나 유류비 폭등 탓에 영업이익은 346억원으로 20.6%, 순이익은 33억원으로 72.7% 줄었다. 금호산업은 1분기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 많은 4557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대우건설과 아시아나항공의 지분법 평가손실 탓에 265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면서 적자 전환했다. 대한통운 역시 운송량은 늘고 있지만 경유값 폭등으로 원가 부담이 커졌다. 운송 계약이 연간 단위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기름값이 올랐다고 당장 운송비를 올리기도 어렵다. 1분기에는 지난해와 비슷한 실적을 냈지만 2분기부터는 영업이익률이 떨어질 전망이다. 금호아시아나 그룹 계열사들의 회사채 발행 잔액이 늘어난 것도 꺼림칙한 대목이다. 2005년 말에 5000억원 수준이었는데 4월 말 현재 2조6366억원으로 급증했다. 일 년 사이 금호석유화학, 아시아나항공, 금호산업 등에서 7500억원대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시중에서는 ‘회사채 돌려 막기’란 얘기도 돈다.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 인수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재무적 투자자에게 대우건설 주가가 2009년 12월 주당 3만3000원을 밑돌 경우 되사주기로 한 풋백옵션 조건을 단 것도 부담이다. 더구나 대한통운 인수 때 대우건설을 통해 5460억원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한 것이 대우건설 주가에 악재가 됐다. 대우건설 주가는 현재 1만8000원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김영진 김영진M&A연구소장은 “금호는 매물을 배에 집어넣었지만 아직 소화하지 못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우리투자증권 관계자도 “금호는 뭔가 팔아서 금융권의 걱정을 덜어주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세간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금호아시아나의 장성지 전무는 “적어도 1~2년은 지나고 평가해야지 고유가 등 악재가 수두룩한 상황에서 1분기 실적만 보고 예단하는 건 섣부르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그룹 전체의 부채비율이 150% 선으로 낮진 않지만 무차입 경영이 능사도 아니다”고 덧붙였다. 특히 당분간 안정과 시너지에 집중하며 다른 M&A에 나설 계획이 없기 때문에 뭉칫돈이 더 들어갈 일도 없다고 강조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도 “단기 유동성 악화는 미리 예상한 일인데다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모두 캐시카우”라며 “펀더멘털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기업의 경우 M&A 성패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M&A에 성공한 기업이 진정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금 흐름에 각별히 신경 쓰면서 수익모델을 잘 짜야 한다.
부회장 앞세운 삼성·LG도 M&A 바람 두산, 금호 등과 달리 M&A 시장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삼성과 LG도 매물이 나올 떄마다 인수 후보로 곧잘 거론되고 있다. 특검을 거치면서 정중동이던 삼성전자는 이윤우 부회장이 5월에 취임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취임사에서 “에너지, 바이오, 환경 등 신성장 동력도 많이 챙기자”고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공식석상에서 M&A란 단어를 직접 거론한 적은 없지만 가능성까지 닫아놓은 건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해체된 그룹 전략기획실 소속이던 신수종사업 전담팀을 삼성전자로 옮겨 신사업팀으로 이름을 바꿨다. 삼성 각 계열사도 이건희 회장이 강조하는 ‘창조경영’을 구체적으로 그릴 중장기 사업계획이나 연구·개발(R&D) 역량 강화 방안을 비롯한 신수종 사업 발굴 전략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럴 경우 M&A가 요긴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몸을 푸는 듯한 M&A도 두 건 있었따.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에 미국 CMOS이미지센서(CIS) 전문업체인 트랜스칩의 이스라엘 자회사를 사들였다. 올 3월에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디스플레이 전문업체인 클레어보이언트사의 LCD 패널 관련 특허권을 인수하는 계약도 했다. 94년 미국 PC 업체인 AST 인수 실패 후 지금껏 M&A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LG전자도 지난해 초 남용 부회장이 부임하면서 M&A 시장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원론적인 발언이었지만 남 부회장은 당시 “필요하면 M&A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가전 사업부가 매물로 나오면서 LG전자에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남용 부회장은 5월 기자 간담회에서 “(GE 가전 사업부 인수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은 “LG와 중국의 하이얼(海爾), 멕스코 콘트롤라도라 마베, 스웨덴 일렉트로룩스 등이 인수 후보이며 LG가 가장 앞선 후보”라고까지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7조~8조원에 이를 인수 가격이 부담이어서 LG전자가 스웨덴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와 손을 잡을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LG전자 쪽에서는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LG전자 관계자는 “예의주시하겠다는 말은 가전시장의 판도 변화가 있을 테니 지켜보겠다는 원론적 얘기”라며 “특별히 진행된 건 없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도 LG전자의 GE 가전사업부 인수에 부정적이다. 재계 관계짜는 “이미 LG 브랜드로 미국 시장에서 제품을 많이 팔고 있는데다 물류 부문을 빼고는 인수 시너지도 별로 없다”고 분석했다. 전략적 투자자와 재무적 투자자가 널려 있지만, LG전자가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1분기 기준으로 1조원에 불과한 것도 부담스런 대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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