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vs. 다윈, 누가 더 위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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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우연의 일치다. 찰스 다윈과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났다. 역사적 맥락에선 흥밋거리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우연치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연이다. 다윈과 링컨이 19세기 거의 신화적 인물이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두 사람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보겠는가? 누가 진화론과 남북전쟁을 같은 문장에서 말하겠는가? 19세기의 기념비적인 사건에 관한 논문을 쓰지 않는 한 달리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두 사람한테 뭔가 관통하는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단지 위인들이라서가 아니다. 생일이 똑같아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 과학자와 정치인이 각자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묘한 한 쌍을 비교하는 순간 곧바로 두 사람의 생일이 일치하는 데에는 단지 같은 별자리 운세 이상의 뭔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둘 다 물병자리이므로 완고하고 통찰력이 뛰어나며 인내심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에 반항적이고 상냥하지만 거리감이 있고 거만하리라). 두 사람의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그들을 비교 평가하는 역사가 데이비드 R 콘토스타의 ‘반항적인 거인들(Rebel Giants)’이 이미 출간됐으며 뉴요커지의 애덤 고프닉 기자가 쓴 책도 내년 초 나온다. 콘토스타의 전기에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지만 두 사람의 이력을 나란히 대비해 각자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둘 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우울증도 똑같이 겪었고(다윈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심각한 위장질환과 만성 두통에 시달렸다) 종교에 대한 회의와 씨름했다. 모두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린 자식을 잃었다. 똑같이 20대의 태반을 한 직업에 정착하지 못하면서 방황했고 중년에 접어든 이후까지 위인의 조짐이 별로 없었다. 다윈은 50세 때 ‘종의 기원’을 썼으며 링컨은 1년 뒤 대통령에 당선됐다. 모두 공적인 자리를 꺼렸으며 대인관계가 조심스러웠다. 다윈의 교우관계는 대부분 우편을 통해 이뤄졌으며 청년 시절 영국해군함정 비글호를 타고 5년간 탐사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영국 시골의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링컨은 대외활동이 훨씬 더 활발했지만 용의주도하게 촌뜨기 이미지를 구축해 친구와 적들 모두 정치인으로서 그의 상당한, 거의 마키아벨리적인 수완을 과소평가하도록 만들었다. 링컨과 다윈이 출생한 시대가 지금의 우리들에게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업적, 다시 말해 그들이 세상을 얼마나 많이 바꿨는지를 말해 주는 척도다. 그들이 태어난 날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 2기의 임기를 3주 남겨 둔 상태였다. 조지 3세는 여전히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계몽주의가 저물고 낭만주의가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중심, 실존의 중심축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은 창조의 극치라는 것이었다. 하긴 모든 사람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전 미국의 남과 북을 가르는 메이슨-딕슨 라인 양쪽에서 노예제도가 여전히 용인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뉴욕주에선 1827년까지 노예제가 폐지되지 않았다. 잉글랜드에서는 1772년 이후 불법화됐지만 영국 식민지에선 1833년까지 존속했다. 그리고 다윈은 적어도 처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직업상 상당히 난해한 어휘를 구사해 과학자끼리 대화할 수 있는, 고도의 교육을 받은 전문가로서의 과학자가 아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생물학의 신기원을 이룩한 다윈은 처음에는 아마추어 동식물학자, 딱정벌레 수집가, 광석 수집가였다. 부잣집 자제로 먹고살 걱정이 없었던 그는 처음에는 의사, 그 다음엔 목사를 꿈꾸다가 22세에 비글호를 타고 탐사여행을 떠났다. 선장 곁에서 좋은 말동무 역할이나 하라는 조건으로 승선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의 외유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허구한 날 한량 짓을 일삼는 아들이 이번에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걱정했다. 몇 년 전 아버지는 10대인 아들 찰스를 이렇게 꾸짖었다. “너는 사격과 개, 쥐 잡기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구나. 너 자신뿐 아니라 우리 집안에 망신을 줄 참이냐?” 그 아들이 5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을 땐 무위도식하는 생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아주 엄격하고 식지 않는 과학적 탐구정신과 호기심까지 갖춰 거의 죽는 날까지 일벌레로 지내리란 것을 아버지가 어떻게 짐작했으랴. 다윈은 또한 하나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골몰했는데 그것을 발설하면 세상이 뒤집어질까 두려워 그 뒤로 20여 년 동안 마음속에 비밀로 묻어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해냈다는 것이다. 대학원, 연구보조금이나 심지어 동료의 평가도 없이 근대 주요 과학자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됐다(연구가 성공할 경우 문명이 뿌리째 흔들릴 게 뻔할 때는 동조적인 평가를 받기 힘들다). 다윈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부유했지만 직업적인 측면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링컨은 더 전통적인 의미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변방의 촌뜨기가 도시에서 출세한 살아 있는 신화였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링컨도 학습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꾸준한 노력을 통해 한 주제에 통달한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둘 다 지칠 줄 모르는 학구열과 채워지지 않는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링컨이 정규 학교교육을 받은 것은 어렸을 때 약 1년 정도였다(그것도 3개월 또는 4개월씩 이곳 저곳을 전전했다). 그 뒤로는 모두 독학했다. (설계사로 일하려고) 삼각법을 배우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저서를 독파했다.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구절들도 외웠다. 미국 하원의원을 지낸 뒤 40세 때 유클리드 기하학을 독습하면서 지력을 연마했다. 얼마 뒤 그의 신화가 약간 과장되면서(실제로 맨땅 위에 세운 통나무 집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이 결점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부부 간 불화설, 인종 간 우열에 관한 몇몇 실언 등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 썰렁한 조크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재치는 빛을 발했다. “나는 별다른 악의가 없는 조롱을 많이 당했으며 조롱인지 아닌지 모를 친절도 많이 받았다. 조롱에는 이골이 났다.” 어쩌면 수수께끼 같은 이 남자의 가장 신비로운 측면은 어느 시점에 무슨 수로 미국이 낳은 최고의 산문 작가로 손꼽히게 됐느냐는 점이다. 휘하의 북군 병사들을 똘똘 뭉치게 만든 링컨의 웅변은 시간을 초월한 울림을 지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항상 새로운 느낌이 든다. 다윈이 쓴 책은 과학 논문으로선 매우 드물게 아니 어쩌면 유일하게 문학작품으로서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둘 다 쉽게 풀어 쓴 글보다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 그들의 됨됨이가 글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 여러 겹의 베일에 가려진 그들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 그들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우리도 그들에 관해 좀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다윈은 손에 펜을 쥐어야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던 듯하다. 메모와 목록 작성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신부감에게 구혼하기 전엔 결혼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줄줄이 나열한 길다란 목록을 작성했다.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는 5년간 전 세계를 항해하며 기록한 일지를 정리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목격하거나 수집한 동식물의 생활에 대한 관측은 빈틈 없이 꼼꼼했다. 다윈에게 삶은 곧 보고 조사하고 그 결과를 글로 기록한 다음 이해하는 행동을 의미했다. 비글호의 항해일지와 자신의 일기를 보면 다윈은 마치 신참 기자 같다. 남미, 호주 또는 케이프 베르데 제도에서 현존하든 화석화됐든 자신이 발견하는 다양한 생명체에 관해 질문하고 메모하고 기뻐했다. 다윈의 경우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발견을 하는 유레카의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1836년 비글호의 항해를 마칠 무렵 당시의 지배적인 통념과는 달리 생명은 정지돼 있지 않고 변화하고 진화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항해가 끝나기 직전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것을 곰곰이 되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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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왼쪽)과 다윈은 중년이 될 때까지 위인이 될 것이란 조짐은 별로 없었다. |
“서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 섬들은 아주 소수의 동물 종을 보유하고 몇몇 새가 서식한다. 이들 동물은 같은 분류에 속하지만 구조가 약간씩 다르다. 변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추론의 아주 작은 근거라도 있으면 [갈라파고스의] 동물 생태는 충분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이 생물 종의 기존질서를 뒤엎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근본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도태설을 정립한 것은 2년 뒤였다. 인구과잉의 냉혹한 환경이 초래한 인간들 사이의 자원확보 경쟁에 관한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의 이론이 실마리가 됐다. 거기에 답이 있었다. 실제로 모든 사물에 적용되는 이론이었다. 생물 종은 진화하며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번성하며 더 많은 씨앗을 뿌리고 나머지는 도태된다는 것이다. 다윈은 자신의 발견에 희열을 느낀 만큼 겁도 났다. 자신의 이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뻔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더 이상 생명체의 극치가 아니라 단지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 창조론은 인간중심적이고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동료 과학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털어놓는 것은 “살인을 고백하는 격”이라고 썼다. 자신의 이론을 서둘러 발표하지 않고 20년 동안 묵혀둔 것도 알고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는 동물 사육과 조개삿갓 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 결과를 공책에 기록하며 자신의 이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 후 5~6년간 그는 공책을 새로 갈아가며 작업을 계속했다. 그중에는 연구 과정에서 생기는 형이상학적인 의문들을 기록한 것도 있었다. 동물도 선과 악을 판단할까? 신이라는 존재는 누가 만들어냈을까? 이런 탐구정신이 다윈의 성격 중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다. 그것은 특히 그의 저작물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종의 기원’을 읽다 보면 독자를 자신과 동격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코 권위주의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대신 항상 자신이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며 의문을 던질 때도 결코 꾸밈이 없다. 진심으로 답을 구하는 인상을 준다. 그는 뛰어난 세일즈맨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론이 일반 독자들로선 받아들이기 황당할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독자에게 외면 받지 않으려고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댓바람에 이론을 들이대지 않고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소박한 장소인 농가의 뒷마당에서 책은 시작된다. 우리(19세기 독자는 물론)가 종의 진화를 이해하기 쉽도록 가축의 번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려는 의도였다. 다윈의 뛰어난 지성뿐 아니라 인품도 책의 곳곳에 배어 있다. 관대하고 개방적이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항상 존중한다. 따지고 보면 창조론자를 배우자로 둔 사람에게서 충분히 기대할 만한 모습이다. 링컨도 다윈처럼 메모벽이 있었다. 끊임없이 종이조각에 구절, 기록, 아이디어를 끼적거리곤 외투 주머니, 책상 서랍, 심지어 모자 속에 넣어뒀다가 나중에 편지, 연설 또는 문서에 필요할 때 꺼내 썼다. 그는 끊임없이 고쳐 쓰는 퇴고광이기도 했다. 말이란 들을 때와 읽을 때 느낌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1861년 그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를 떠나며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감동적인 고별연설을 한 뒤 워싱턴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필체가 흔들린 것을 보면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자신의 발언을 글로 발표하기에 앞서 수정하기 시작했다. 게티즈버그 연설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고치고 또 고쳐 완성한 듯했다. 1983년의 겨울과 봄은 북부연합군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다. 서부에서는 빅스버그 포위공격이 시간을 끌면서 그랜트 장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동부에서는 챈슬러스빌에서 남부군에 참패를 당했다. 노예해방 선언이 1월 1일 발표됐기 때문에 북부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의아해 했다. 미합중국의 수호인가 아니면 노예제 폐지인가? 링컨은 그 문제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7월 초 북부군의 게티즈버그 승리는 그가 기다리던 기회였다. 게티즈버그 연설 도중 박수가 터져 나왔다는 증언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링컨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 할 때까지 많은 청중은 그의 연설이 끝났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당시엔 연설이 네 시간 동안 지속되는 일도 있었다. 링컨 바로 전에 연설했던 에드워드 에버렛은 두 시간을 끌었다. 링컨은 단 2분 사이에 할 말을 다 했다. 역사상 가장 훌륭하다고 손꼽히는 그의 연설에서 간결함은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대통령이 무엇을 말했느냐, 그리고 어떻게 말했느냐는 것이다. 링컨은 처음 29개 단어로 게티즈버그를 찾아간 목적을 달성했다. 미합중국을 위한 전쟁의 목적을 밝힌 것이다. “87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슴에 품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에 따라 이 대륙에 새 나라를 세웠다.” 이 문장을 주장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다. 만인의 평등은 남북전쟁의 명분 중 하나였다. 대신 그는 주장을 하나의 사실로 기술했다. 국가는 평등의 원칙 위에 세워졌으며 우리는 이 원칙을 지키려고 싸운다는 것이다. 명제라는 말에 평등은 자명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라는 한정적인 뉘앙스가 있다(하지만 암시일 뿐이다). 다음 절에선 계속해 위기론을 제시한다. “지금 우리는 그 나라가, 아니 그 신념과 명제에 따라 세운 나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아주 중요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쉽게 말해 공화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연설 전에는 북부에서조차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당연시되지 않았다. 그는 단 272개의 단어로 오늘날 그 누구도 감히 다른 주장을 생각해 내지 못하도록 국가의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정의했다. 링컨의 천부적 정치 감각은 두 개의 축 위에 세워졌다. 언제 어느 때 무엇이 가능한지를 간파하는 신비한 능력, 그리고 상황에 따라 생각을 변화시켜 성장해 나가는 능력이다. 1838년 스프링필드 영멘스 고등학교에서 법 체계에 대한 시민의 의무를 주제로 연설하면서 링컨은 이런 말을 했다. “엄마의 무릎에 앉아 칭얼대는 아기에게 미국의 모든 어머니가 법을 존중하라는 말로 어르도록 하자.”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865년 두 번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이 연설에도 어머니와 아이가 등장하지만 격세지감이 든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갖지 않고 모두를 포용하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주셨기에 정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국가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산화한 사람들과 그들의 미망인·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들뿐 아니라 모든 국가와 지속적인 평화와 정의를 이룩하고 수호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위해 계속 매진하자.” 이는 성경 말씀이나 다름없다. 이 문장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해도 링컨은 한 단락에서 신을 여섯 번이나 언급한다. 그러나 어떤 신인가? 링컨의 종교적 배경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측면인 듯싶다. 동료 변호사인 윌리엄 헌돈은 링컨이 무신론자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분명 하느님을 가리키는 상투적인 인용구들이 링컨의 연설 곳곳에 등장하지만 전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그리고 그의 연설에서 정신적인 측면이 강해지면서 갈수록 기존 통념으로부터 멀어진다. 링컨은 신앙을 가졌지만 무엇을 믿었는지 정확히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는 종종 신의 뜻을 언급하지만 반면 그만큼 신의 의도를 파악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결코 신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하는 법이 없었다. 두 번째 취임식 연설에 나오는 신은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다. “전능한 하느님께서는 나름의 목적을 갖고 계신다.” 그런 의도 중 하나가 노예제라는 죄악을 허용한 북부와 남부를 모두 처벌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링컨은 시사했다. 그러고는 전기작가 데이비드 허버트 도널드의 평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미국의 공직자가 한 가장 끔찍한 연설 중 하나”를 한다. “이 거대한 재난의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도록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하지만 노예들이 품삯 한 푼 받지 못하고 흘린 땀으로 쌓아 올린 250년간의 부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3000년 전의 말씀이 이르듯 채찍으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한 자가 스스로 칼에 맞아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자기 피로 되갚게 될 때까지 이 전쟁을 지속시키려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저 ‘주님의 뜻이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청중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 바로 그 시점에서 링컨은 180도 방향을 틀어 이렇게 결론 짓는다(그동안의 연설에서 이처럼 훌륭한 반전이 또 있었을까). “누구에게도 원한을 갖지 않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요즘도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다가 결론 부분에 이르면 깜깜한 터널을 지나 갑자기 눈부신 태양이 비추는, 또는 6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갖는다. 링컨은 언어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링컨은 마크 트웨인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솔직하고 운율이 있고 힘차고 아름답지만 결코 예쁘지 않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스타일을 구축했다. 링컨 대통령의 글을 탁월하게 분석한 ‘링컨의 검(Lincoln’s Sword)’에서 더글러스 L 윌슨이 평한 대로 그는 문학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지만 허먼 멜빌(‘백경’)이나 데이비드 소로와 조금도 다름없이 “경험을 터득하고 정리하는 미국 특유의 방식을 표현한 산문을 완성했다.” 링컨이 하는 말과 그 방식은 하나다. 게티즈버그 연설이나 두 번째 취임 연설에서 링컨이 사용한 어구 이외의 다른 표현으로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링컨과 다윈은 자신들이 태어났을 당시의 지배적인 현실을 뒤엎었다는 점에서 모두 혁명가였다. 우리에게 그들과 그들의 말은 동시성을 갖는다. 우리는 아직도 어느 정도는 그들이 남기고 떠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며 우연히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누가 더 위대한 인물일까’라는 궁금증이 슬며시 생긴다. 그것은 사과와 오렌지 또는 수퍼맨과 산타를 비교하는 격이다. 그러나 그 의문을 그들의 영향력에 국한한다면 충분히 따져볼 만한 가치가 있다. 질문을 뒤집어 ‘둘 중 하나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묻는다면 더욱 더 흥미롭다. 그럴 경우 곧바로 무게 중심이 링컨 쪽으로 기운다. 다윈이 엄청난 폭탄을 터뜨렸다 해도, 그리고 진화에 관한 그의 저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E O 윌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책”이라고 평했다) 동료 동식물 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우려해 ‘종의 기원’을 서둘러 출간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어렵다. 월리스는 자연도태를 통한 진화라는 거의 똑같은 이론을 독자적으로 정립했다. 쉽게 말해 다윈의 이론은 그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나오게 돼 있었다. 19세기 전반기 내내 진화에 관한 이론이 제기됐지만 그리고 그중 다윈의 이론만큼 설득력 있는 것은 없었지만(월리스가 등장할 때까지) 다윈이 그런 이론을 만들어낸 유일한 인물은 아닌 것이다. 반면 링컨은 독보적인 존재다. 링컨이 없었다면 미국의 역사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남부 11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고 더 나아가 전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은 불가피해 보였다. 당시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였다. 링컨은 일단 대통령에 취임하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제임스 맥퍼슨이 출간 예정인 ‘최고사령관 링컨(Tried by War: Abraham Lincoln as Commander in Chief)’에서 잘 예증하듯 링컨의 전쟁 수행능력은 북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랜트 장군이 가세하기 전까지 링컨은 직접 전쟁을 탁월하게 이끌었다. 링컨이 암살된 뒤 일어난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부연맹 주들의 합중국 재편입 과정이 응징으로 변질되더니 결국 흐지부지돼 인종적 평등 문제의 해결이 한 세기 더 미뤄졌다. 그러나 여기서도 링컨의 말과 글은 그의 업적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북부를 결속하고 지금도 우리를 감동케 하는 언어로 남북전쟁을 묘사했다. 굳이 평가하라면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인상적이고 또한 더 신비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른 대통령들은 위대한 인물들조차 해부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 링컨은 영원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를 빼놓곤 링컨에 관한 책이 누구보다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윈이 링컨처럼 둘도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의 업적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처럼 훌륭하게 이론을 정립하거나 그 영향을 놓고 많이 고민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링컨처럼 다윈도 용감했다. 그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일부라는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건강과 평판에 대한 위협을 감내했다. 링컨은 인간이 인간에게 예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그 희생자가 됐다. 두 사람이 같은 날 태어난 덕택에 우리는 똑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두 사람을 살펴볼 좋은 기회를 얻었다. 두 사람이 각자 어떻게 환경의 영향을 받았는지, 자신이 태어난 세계를 이끌어 왔던 믿음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결국 자기 주변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되돌릴 수 없도록 바꿔 놓았는지를.
화폐 속 두 위인 다윈의 제멋대로 난 턱수염 때문에 영국 지폐는 위조하기가 힘들다. 링컨이 새겨진 미국의 1센트 주화는 아무도 복제하려 하지 않는다.
2000: 다윈과 영국 함정 비글호가 찰스 디킨스를 밀어내고 10파운드짜리 영국 지폐의 도안으로 채택됐다.
1909: 초상화 동전에 대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링컨 탄생 100주년 기념 주화 발행.
1959: 링컨 탄생 150주년을 맞아 1센트 주화 뒷면의 밀 그림을 링컨 기념관 도안으로 바꿈. 역사적 순간들 둘 다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바꿔놓았다. 다윈과 링컨 생애의 중요한 순간들.
찰스다윈 1809년 2월 12일: 잉글랜드 슈루즈베리 출생
1831: 케임브리지대 졸업 후 영국 함정 비글호를 타고 5년간의 과학탐험 시작
1839: 에마 웨지우드와 결혼
1859: ‘종의 기원’ 출간
1860: 옥스퍼드대 전화 토론에서 자신의 이론을 변론
1882: 잉글랜드 다우니에서 사망.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힘
에이브러햄 링컨 1809년 2월 12일: 캔터키주 하딘 카운티 출생
1842: 메리 토드와 결혼
1858: 상원 선거운동 중 스티븐 A 더글러스와 일곱 번 논쟁을 벌였지만 당선 실패
1860: 미국 16대 대통령에 당선
1863: 노예해방선언과 게티즈버그 연설
1865: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됨.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묻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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