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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공사 따낸 후 컵에 물 채워 건배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공사 따낸 후 컵에 물 채워 건배

▶76년 6월 16일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정식 체결됐다. 공사 계약서 서명식에서는 한국을 대표해 유양수 대사와 사우디 교통체신청 장관이 서명했지만 그에 앞선 협정식에서는 정문도 사장, 정주영 회장, 교통체신청장이 서명했다(왼쪽부터).

홍순길 건설관은 외교관 신분이면서도 현대건설에 입찰 자격을 얻어주기 위해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발주처 만서리 차관의 비위를 맞추느라 별 ‘더러운 짓’을 다 했다며 담아두고 있던 분기를 털어놨다. “대통령의 특명이 아니면 외교관으로서 절대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짓을 한 겁니다. 자존심 다 버렸어요. 국가가 위기에 처했고 건설업체가 입찰을 해야겠다고 환갑이 넘은 양반이 그 무더운 열사의 땅까지 와서 교통편도 마땅찮은 데도 불구하고 뛰어다니고, 그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니까 정말 몇 번씩 구역질을 하면서도 차관 비위를 맞추면서 포기를 못하고 헤쳐나간 겁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장관이 수차 얘기하면 차관이 장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모른 척하고서 들어줄 것 아닙니까? 거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광이 보인 건 언제쯤입니까?
“그게 몇 달은 걸렸을 거예요. 수없이 찾아다녔으니까요. 경우에 따라선 유 대사님을 모시고 장관을 같이 만나기도 했고. 장관도 계속해서 대사와 건설관이 통사정을 하니까 독사 같은 차관이지만 작심하고 그 친구를 부른 것 같아요. ‘입찰자격을 주는 건 공사를 주는 게 아니잖느냐, 한 번 줘보는 게 좋겠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죠. 그렇다고 장관이 말수가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하여간 그랬는데 하루는 뱀처럼 쌀쌀하던 차관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더라고요. ‘내일 좀 올라오시오.’ 기분이 이상해요. 그래서 만사 제치고 가니까 종이 한 장을 탁 던져주는데, 거기에 입찰초청 대상자 10개사가 있고 한국 현대건설이 맨 끝에 10번째 들어 있잖아요. 이건 정말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입찰 자격 따내자 직원 ‘기절’

-차관이 입찰 초청장을 현대 측에 주지 않고 건설관님에게 전달했다는 건 외교적인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좌우간 받았으면 됐지 뭐. 잘은 모르지만 현대도 나름대로는 노력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우디라는 나라는 로비에 강한 왕족들이 많고 에이전트들의 힘이 큽니다. 어쨌든 즉각 대사님에게 보고를 했어요. 유 대사님도 깜짝 놀라시죠. 그때까지 대사님도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셨는데 모르겠습니까? 현대는 불가능하다, 그랬으니까요. 하여간 대사관이 온통 축제 같고 마치 공사를 따낸 것처럼 흥분하고 그랬습니다, 하하. 당장 현대에 연락을 했는데 직원들도 되리라고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오진영 과장이라고, 얼굴이 하얗고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만날 우리 대사관에 쫓아다녔어요. 그 사람 보고 ‘입찰자격서 받아가시오’ 그랬더니 깜짝 기절을 했어요. 진짜 기절했습니다. 얼마나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랬겠어요. 그런 정도였다고요. 그때부터 이제 입찰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입찰 내막에 대해서나, 그 후에 특별히 정 회장님 얘기가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입찰에 대해서는 대부분 현대가 쭉 했고 우린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답사나 견적도 전갑원씨, 김광명씨 같은 중역들이 나와서 전부 현대 독자적으로 했으니까요. 정 회장님은 입찰 마지막 단계 때 다시 대사님하고 우리 집에 왔는데, ‘수고 했습니다’ 딱 한마디만 합디다. 그러고는 아직 발표는커녕 입찰 마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뭐라고 합디까. 아버지가 꿈에 보였기 때문에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래요. 아버지 꿈 때문에 됐다는데, 참 섭섭하기도 하고, 기업 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 덕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모양이구나 싶기도 하고…. 근데 솔직히 나는 속으로 저건 불가능한 일이다, 입찰서를 얻어냈으니까 내 임무는 다했지만 저게 되겠느냐, 도저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봤어요. 아마 주베일 산업항이 어떤 거다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저게 어떤 공사인데 현대건설에 떨어지겠느냐,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정 회장이 헛고생한다고 했으니까요.”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외교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입찰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정 회장도 인정했다. 그러면서 현대건설이 수주하지 못한다면 그동안의 외교적 노력과 대통령의 체면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것까지 생각해서 열심히 뛰었다면서 정 회장은 너스레를 떨고 한껏 웃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베일로 떠날 구조물 생산 현장을 설명하고 있는 정주영 회장.

“그 양반들이 수고를 많이 했지. 그렇지만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건 더 힘든 일 아니에요? 그걸 내가 해줬단 말이야. 우리가 먹었으니까, 하하항.” 정 회장은 당시 리야드에 있는 알리아마마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면서 전갑원 상무, 김광명 이사, 그리고 정문도 사장과 문인구 변호사까지 불러 협의하면서 입찰서류를 직접 챙겼다. 입찰이 있던 날, 오전 10시 정각에 입찰서를 제출하고 그날 오후에 현장에서 발표를 했을 때 종합 평점에서 현대는 3위였고 입찰가는 가장 낮았다. 그때부터는 전부 다 미쳐버리는 거라고 했다. “서울과 사우디가 동시에 난리가 난 거야. 10억 달러가 넘는다는 공사를 대한민국이 언제 구경이라도 해봤어? 그걸 현대건설이 9억4000만 달러 최저가로 낙찰을 봤으니 말이야. 유양수 대사하고 그때 사장이 조성근씨야, 건설부 장관을 했지(기억의 착오로 보인다. 조성근씨는 당시 현대건설 국내담당 사장을 거쳐 현대건설 고문이었고 경제기획원 차관보 출신인 정문도씨가 현대중공업 사장으로서 산업항 입찰에 참여했다). 권기태가 그때 부사장인가?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홍 국장도 부르고 해서 컵에 물을 채워가지고 건배를 했어. 내가 술을 안 하는데 지들만 술로 하면 안 되잖아, 하하항. 사우디에서는 금주니까 물을 채워서 했는데 그것도 대사관이 생기고 첨이래. 중역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땐 전부 ‘거지 도사’들이야. 입찰 발표 때까지 목욕하고 머리 깎고 하면 복이 떨어진다고 면도까지 안 했으니 그 더운데 냄새는 나고 수염은 잔뜩 길고, 완전히 거지 도사들이지 뭐야, 하하항. 하여간 축배를 드는데 대뜸 유 대사가 통신사 빨리 부르라고 말이야. 대통령 각하 앞으로 전문을 보내야 한다는 거야. 흥분이 돼서 통신사가 달려오니까 그 자리에서 불러대고 적고 말이지. ‘대통령 각하, 오늘 몇 월 며칠 현대가 주베일 산업항공사 계약을 했습니다. 이로써 사우디 계약 건은 얼마가 됐습니다. 대한민국 전권대사 유양수’ 탁 이러면서 통신사한테 불러대니까 그때부터 통신사는 그걸 가지고 코트라로 들고 뛰는데, 울어요 울어, 하하항. 그랬는데 30분도 안 돼서 바로 축하전문이 들어와요. 각하지. 정말 고생했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전부 또 울어. 대사도 울고 나도 눈물이 좀 나오고. 이게 드라마야, 아주 진짜 감동적인 드라마였어.”

-최저가로 낙찰이 되고서도 공사계약서에 서명하기까지 발주처에서는 몇 달을 끌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산업항 공사의 가장 핵심이고 아주 난공사라고 하는 OSTT(해상유조선 정박시설)공사에 우리가 경험이 없다고 해서 그랬는데, 그것 때문에 권기태가 입찰했다가 떨어진 브라운 앤 루트사를 만나서 우리 하청 기술사로 참여시킨다는 협약서를 만들어 발주처에 밀어 넣었는데도 트집이야. 발주처에서는 이상하다 그거지. 브라운 앤 루트사는 OSTT공사에만 9억400만 달러를 써냈거든? 사실 그만큼 힘든 공사예요. 근데 현대보다 훨씬 더 비싸게 써낸 세계적인 업체가 어떻게 훨씬 적게 써낸 현대의 하청사가 되느냐고 시비를 거니 말이야. 그건 우리 문제지 저들 문제야? 협약서를 내보이는데도 그래. 결국 방해공작이 막 들어갔다는 얘기야. 그때 무기수출 상인인데, 중동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이 있던 카쇼기(애드난 카쇼기)라고 있어.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와서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만나고, 무기 많이 팔아먹은 친구 아니야? 그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현대가 산업항을 수주하면 자기 팔을 자르겠다고 아주 고약하게 굴면서 다녔거든? 그래 놓고 우리가 낙찰되니까 한일개발 부사장을 했다는 친구를 자기가 데리고 있었던지 그이를 내세워서 자기네하고 에이전트 계약을 맺자고 말이야. 얼마나 야비해? 그런 소릴 하려면 카쇼기가 팔을 자르고 나서 하자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하여간 별일 다 있었는데 온갖 방해공작 때문에 자꾸 시간을 끌었던 거야.” 모두의 승리였다. 정부, 기업, 심지어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까지도 현대의 낙찰을 위해 애를 썼다. 동아는 산업항보다 남쪽에 위치한 상업항 공사를 원청사인 네덜란드 업체로부터 수주해 이미 상당부분 진척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훗날 동아에서 일하는 노무자들과 근로조건을 비교한 현대건설 노무자들이 자신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결국 대폭동을 일으킨 동기의 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최 회장도 현대건설의 기적 같은 승리였고 자랑스러운 수주전의 결과였다고 회고했다. “기업 하는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문제까지도 상당히 고려를 하고 신경을 쓰게 되는데, 현대가 수주한 것은 총체적인 승리였다고 봐요. 크든 작든 사우디에 미리 나갔던 우리 기업들도 경쟁 차원이 아니라 진심으로 현대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지원을 했으니까요. 그 당시 현대는 사우디로 보면 후발 진출업체지요. 그런데도 정말 최선을 다했고, 어떡하든 수주하려고 정주영 회장님이 직접 나를 찾아오셨어요. 그런 어른이 직접 오셨으니 아버지하고도 가깝게 지내셨지만 내가 단가에서부터 모든 정보를 아낌없이 드리면서 그랬지요. 꼭 수주하시라고, 그래서 동아하고 현대가 사우디에서 좋은 이미지를 꼭 심어놓자고. 결국 수주를 하셨는데, 그게 그 당시 우리 정부를 살린 셈이요. 물론 현대뿐 아니라 큰일이 있을 땐 절대 내 배만 채울 생각하지 않고 전부 나서는 게 기업들이지만 2차 오일쇼크 터졌을 때도 국가에 달러는 없지, 기름도 없지, 기업인들이 나서 헌신적으로 정부를 도운 거 아니오? 그런 맥락에서도 산업항 수주는 의미가 컸어요.” 최원석 동아 회장도 현대 도와 사우디 왕족을 에이전트로 계약했다가 사례비 문제로 법정까지 가기도 했고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춘림 당시 사장이 현지에서 억류당하기도 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현대건설이지만 결과적으로 주베일 산업항부터 현대는 실질적인 급성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춘림 전 회장의 얘기도 들었다. “우리가 결국은 주베일 근처 공사를 다 ‘도리’하다시피 했었는데, 전갑원씨와 김광명씨도 인터뷰해서 들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조선소라든가 월남에서 준설한 경험, 또 조선소를 지으면서 암벽이나 도크에서 벌인 물과의 싸움, 이런 일을 해오면서 굉장히 귀중한 경험을 얻었거든요. 나는 그 경험의 결과라고 봅니다. 그때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놓고 세계적인 건설업체들이 마치 소집 명령을 받고 몰려든 것처럼 전부 달려들다시피 했는데 견적을 내고 입찰을 할 때 숨 막히는 정보전 같은 걸 전부 얘기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겠고, 입찰가만 가지고 말하자면 세계적인 유수 업체들이 컨소시엄까지 하면서 15억 달러 정도 냈는데 우리가 이겼단 말이지요. 그게 현대건설의 미래를 밝혀주는 시그널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9억4000만 달러를 써냈을 때 전부 우리보고 망한다 그랬습니다. 결과론이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이익을 냈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그때까지 현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굉장한 일(근로자 대폭동이 터져 사우디 보안부대가 전부 즉결처리 하겠다고 출동을 하고 한국에서는 정보부에서 요원들이 긴급 파견될 정도였다)들이 있긴 했어도 산업항 수주로 현대가 탄탄해졌잖아요.”

-울산의 현대왕국을 건설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까?
“왕국은 무슨, 그렇게 말할 건 아니고, 좌우간 주베일 반경 30km 이내의 4, 5개 공사가 무려 17억 달러 규모였는데 나중엔 그것까지 수주했고 산업항 공사로만 매달 8000만 달러에서 1억 달러가 들어왔어요. 2년 정도 기간 내내. 그러니 그게 얼마입니까. 엄청난 달러로 정부의 외환 부도도 막았지만 울산에 중전기 공장이다, 엔진 공장이다, 기계 자동화다, 중공업이다, 전부 그 돈으로 충실하게 키울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게 지금 한국의 수출주도산업이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문제는 곪아가고 있었다. 77년 1월부터 본 공사에 들어간 이후 현대건설 현장에서 엄청난 폭동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른바 ‘주베일 대폭동사건’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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