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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채색된 베일’과 같다

사랑은 ‘채색된 베일’과 같다

서머셋 모옴의 소설 <페인티드 베일> (The Painted Veil)은 세 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1930년대 제작된 첫 번째 영화는 관객이 몰입하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 최근 나온 세 번째 영화는 나오미 와츠와 에드워드 노튼의 뛰어난 연기로 주목받았다.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무대는 1920년대 영국입니다. 유복한 가정의 맏딸 키티는 동생이 먼저 결혼하자 자신이 퇴물이 됐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그에게 숫기 없는 병균학자 월터 페인 박사가 갑자기 사랑을 고백하더니 청혼합니다. 키티는 충동적으로 청혼에 응하지만 페인 박사에 대한 사랑 따위는 없습니다. 결혼 직후 페인 부부는 월터 페인의 임지인 중국으로 함께 부임합니다. 키티는 매력적이지만 행동거지가 신중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에서 그가 유부남 찰리 타운젠트와 바람이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죠. 페인 박사는 이 사실을 알게 되는데, 내성적인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충격을 받고 자기파괴적인 결정을 합니다. 콜레라가 창궐하는 내륙 지방 근무를 자원하는 거죠. 그는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합니다. 함께 시골로 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불륜을 사유로 이혼을 청구하겠노라고. 키티는 타운젠트의 애정을 믿고 남편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남편은 비웃습니다. 행여 타운젠트가 부인과 이혼하고 키티와 결합하겠다면 조용히 헤어져 주겠노라고. 타운젠트를 찾아간 키티는 남편이 옳았음을 깨닫습니다. 키티에겐 이제 남편을 따라가는 선택밖에 남지 않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민족주의 열풍 속에서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역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며 키티는 전에는 보려고 애쓰지 않았던, 그러므로 당연히 보지 못했던 남편의 훌륭한 점을 발견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들이 파괴적으로 자초한 고난 속에서 부부는 서로에게서, 또 스스로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 결말은 비극적입니다만. 이런 줄거리의 <페인티드 베일> 은 영국 문호 서머셋 모옴의 1925년 소설입니다. 1934년에 선보인 영화 <페인티드 베일> 은 어딘가 미진한 느낌이 큽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색한 30년대 영화 문법 따위에 뒤늦게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가 맨송맨송한 원인은 그레타 가르보라는 배우였습니다. 주인공 키티는 걷잡을 수 없이 허영심이 많고 종잡을 수 없이 이기적인데다 감 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운 여자입니다. 가히 여신급 배우인 가르보를 데려다 이런 역할을 맡기면서, 그가 ‘동생이 먼저 시집갔다고 아무 남자한테나 덥석 시집갈 법한 여자’라고 관객들을 납득시키기란 애당초 어려웠을 테죠. <페인티드 베일> 은 2006년 존 커란 감독의 손으로 리메이크 됐습니다. 주연을 맡고 제작에도 참여한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와츠는 중국 자본을 참여시키고 촬영도 중국 현지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중국 영화사 로고로 시작됩니다. 중국 상영 때 제목은 <면사> (面紗)였습니다. 모옴은 ‘살아있는 자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저 채색된 베일을 걷어내지 말라. 비록 거기 비현실적인 형상들이 그려져 있더라도(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though unreal shapes be pictured there)’라는 셸리의 싯구에서 소설 제목을 따왔습니다. ‘인생이라는 채색된 베일’을 면사포라고 번역해 놓으면 삶 전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신혼 이야기’로 졸아들어 버리는 느낌입니다만, 이 영화의 제목으로는 적당한 번역일지도 모르겠네요. 2006년 영화는 34년 영화만큼 원작의 결말을 터무니없이 상투적인 해피엔딩으로 바꿔놓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설보다는 달짝지근하니까 말이죠. 에드워드 노튼은 90년대 할리우드가 건져 올린 가장 큰 수확이라고 봅니다. 꽃미남이나 터프가이들이 대세인 요즘 미국 남자배우들 틈에서 노튼과 숀 펜 정도를 제외하면 더스틴 호프먼이나 알 파치노 같은 예전 배우들에 필적할 존재감을 지닌 연기자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에서 노튼과 호주 출신 여배우 나오미 와츠 두 사람의 연기는 매우 훌륭합니다. 모자라지 않는 연기도 어렵지만 넘치지 않게 연기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30대 후반에 불과한 이들 배우가 표정으로 대사의 여백을 채우는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걸 보면 탄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와츠는 키티 역할에 딱 맞을 만큼 예쁩니다. 자칫 장식품 같은 금발 처녀 역할 단골배우로 전락하기 쉬웠을 외모를 가진 와츠는 이력을 현명하게 관리해 그런 이미지에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데뷔 이후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망가지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며 천천히 성장한 것이죠. 와츠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에서는 수상쩍은 상대에게 빠져드는 레즈비언 역할을 맡았고, <21 그램>(21 Grams)에서는 가혹한 삶에 지친 여자의 절망을 ‘생얼’로 실감나게 보여줬죠. 그래서 그는 킹콩이 반한 금발 여배우 역할을 맡아도 인형 같은 가녀림이 아니라 생동감 있는 사람의 냄새를 풍길 수 있었습니다.   <페인티드 베일> 에서 와츠는 사랑 없는 결혼에 뛰어드는 철부지, 유부남에게 빠져드는 허영심 많은 신혼주부, 남편을 비웃는 천박한 불륜녀,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는 성숙한 어른의 역할을 다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관객들이 키티라는 주인공을 미워하지 않고 그의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키티는 남편이 죽은 뒤 타운젠트의 아이일 지도 모르는 아들을 낳습니다. 라스트 신. 세월이 흐른 뒤 길에서 우연히 타운젠트와 재회했을 때 그가 보여준 무심한 표정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아들 ‘월터’가 저 아저씨는 누구냐고 묻자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답하는 키티. 어떤 사랑은 상대를 떠나 보내고서야 완성됩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의 감정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입니다. 신체가 거부하기 어려운 호르몬의 화학적 명령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벌도 하고 나비도 하는 그런 사랑이죠.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를 얼마나 안다고 첫눈에 반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익숙함도 사랑입니다. 그리움이라고 불러도 좋겠죠. 함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돼버린 결과, 상대방이 없으면 불편하고 괴롭고 아쉬운 ‘비정상적’ 상태에 빠지는 감정 말입니다. 사랑은 약속이기도 합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건만 상대방을 짝으로 소중히 여기겠다고 공약하는 것이죠. 이런 얘기를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걸 사랑이라고 하면 너무 처량한 거 아니냐”는 반응이더군요. 하지만 서로에게 필요하고 고마운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힘, 결혼이라는 농사를 보람있게 가꾸는 주요 원료는 바로 이 세 번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페인티드 베일> 에서 페인 부부가 그들의 삶 전체로 증명해 주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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