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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채권 대란설에 ‘돈줄’ 막혀

9월 채권 대란설에 ‘돈줄’ 막혀

“이자율 올라가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돈을 꿀 수 있느냐가 걱정이다. 조건(이자율)은 문제가 아니다. 돈 구할 데가 없다. 기업에서 느끼는 감은 우려가 현실로 왔다는 것이다. 기업이 유동성 확보에 초비상이 걸렸다. 적어도 1년은 이렇게 버텨야 한다. 기업 자금 조달 지원 대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대기업 CEO가 공개 석상에서 ‘기업의 자금난’을 적나라하게 거론했다. 이종희 대한항공 사장이다. 이 사장은 7월 31일 대한상공회의소가 개최한 조찬 강연회에 토론자로 참석해 “국내 기업들이 자금 확보와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례적으로 대한항공 사정까지 언급했다. “대한항공만 해도 앞으로 5년간 (비행기) 50대 정도를 사야 한다. 2억 달러씩만 해도 100억 달러를 조달해야 한다. 하지만 외국은행에서 자본 조달도 어렵고, 국내 은행 역시 어렵다.”
회사채 발행 43.2% 늘어
같은 날 자금 악화설에 휩싸여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자산을 팔고, 유가증권을 매각해 4조5000여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빌린 돈이 많아 생긴 위기인 만큼 대규모 차입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당장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에 대해서만 자산유동화증권(ABS)과 은행 차입을 통해 상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루 전에는 GS칼텍스가 약 49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해 관심을 모았다. GS칼텍스로서는 7년 만의 회사채 발행이다. 앞서 기아자동차, 효성, 아시아나항공도 7월 중 1000억~20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난주에는 KT와 KTF가 운영자금 목적으로 합쳐서 4000억원을 발행했고, 두산은 단기차입금 상환을 위해 500억원의 회사채 발행 계획을 발표했다. 신한금융지주와 롯데건설 역시 각각 1500억원, 12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국내 기업들에 자금 확보 비상이 걸렸다. 경영 최우선 목표가 ‘돈을 빌리는 것’인 듯한 분위기다. 두드러지는 현상은 회사채 발행 증가다.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기업들이 국내외 은행으로부터 자금 조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연초보다 2~3%나 높아진 이자 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회사채 발행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금 아니면 더 힘들어진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1~5월 중 발행된 무보증 일반회사채는 전년 대비 43.2%나 증가했다. 주목할 것은 신용이 높고, 현금도 풍부한 우량기업이 대거 가세했다는 점이다. 같은 기간 신용등급 A 이상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은 전년 동기 대비 122% 늘어난 8조1900억원이었다. 일반적으로 채권시장 비수기로 통하는 7월에도 대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줄을 이었다. 당장 빚을 갚을 돈을 꿔야 하는 기업들이야 높은 이자를 줘서라도 자금을 마련하는 게 당연하다. 중견기업인 H사가 그런 경우다. 이 회사는 지난 7월 초 3년 전 4.6%로 빌린 회사채를 상환하기 위해 7.16%로 11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그나마 H사는 신용등급이 좋아(A+)서 그렇지, B등급 계열 회사들은 회사채 모집 자체를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다면 자금 사정이 좋은 우량 대기업들까지 자금 조달에 가세하는 것은 왜일까? 지난달 대규모 회사채를 발행한 대기업 계열사 재무담당 부장은 “하반기로 가면 회사채 모집 자체가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며 “외국인들이 채권을 대거 던지는(매도) 상황이었고, 금리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대응에 나선 것이었다”고 말했다.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싼 이자로 자금을 확보해 둘 필요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사정은 다른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올 상반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시장에서는 ‘9월 채권 대란설’이 나돌았다. 대란설의 요지는 이렇다. 지난 1년간 외국인들은 국내 채권 투자를 크게 늘렸다. 2007년 6월 기준으로 1년간 채권 보유 규모는 6배(51조원)나 늘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이 주식시장에서 뺀 돈이 44조원인데, 채권 투자로 유입된 돈은 42조원이었다. 문제는 조기 환매한 2조원을 제외하고 9월 중 만기가 도래하는 외국인 보유채권이 6조5000억원에 이른다는 점이다. 만약 외국인들이 보유 채권 상환 자금을 일거에 빼거나, 만기연장을 하지 않으면 채권 가격이 폭락하면서 금리가 급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채권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지면서 가뜩이나 위험자산으로 취급 받는 회사채 시장이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업들의 우려다.
한은 부총재 “채권시장 문제없다”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돈 가뭄을 해결해야 하는 배경에는 빌려줄 곳간이 없다는 이유가 깔려 있다. 외국에서 달러를 차입해 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라 국내 은행을 바라보지만 역시 녹록지 않다. 현재 국내 은행들의 해외 자금 조달 여건은 사상 최악이라는 평이다. 여기에 국내 은행 유동성 위기설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6월 12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12차 회의 의사록에는 이 같은 언급이 들어있다. ‘은행들의 자금 조달이 고금리 특판 예금이나 양도성예금증서(CD) 및 은행채 발행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시장 여건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할 경우 유동성 위험이 증대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최근 상황이 금통위가 우려하는 ‘시장 여건이 좋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 예금이 머니마켓펀드(MMF)나 종합자산관리계좌(CMA)로 쏠리면서 국내 은행들은 대출 재원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여기에 국제 금융시장 불안이 해소되지 않고,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관측되면서 국내 은행 유동성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책·금융 당국은 별로 긴장하지 않는 듯한 태도다. 7월 31일 대한상의가 주최한 조찬강연회에 강연자로 참석한 이승일 한국은행 부총재는 “채권시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는 있지만, 국고채 수급 전망을 봤을 때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판단에 대한 근거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강연회에 참석했던 한 금융기관 부사장은 “당국이야 늘 괜찮다고 말하는 것 아니냐”며 불신을 나타냈다. 그는 “9월 만기물은 물론 외국인들이 1년 가까이 남은 채권까지 파는 상황인데, 너무 안이한 판단 같다”고 말했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 있던 기업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고위 관료는 ‘문제없다’고 말한 것이다. 비단 이날 행사장 분위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시장은 걱정하고, 당국은 괜찮다는 것이 요즘 분위기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7월 22일 국회 긴급현안 질의에서 “근거 없는 위기설은 우리 경제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돈 흐름에 민감한 기업이 ‘돈줄’이 막혀 전전긍긍한다는 것은 위기의 신호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금융 당국은 ‘괜찮다’고만 할 게 아니라 위기설이 왜 수면 밑으로 가라앉지 않는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때다. 관료들 시각에서는 외환위기 직전에도 한국의 펀더멘털은 튼튼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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