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통해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와 첫 인연을 맺은 한국(조선)은 불과 4년 만에 베를린에서 손기정의 금메달로 올림픽의 주인공이 됐다. 그날로부터 꼭 72년이 지난 2008년 8월 8일. 중국 베이징 국가체육장에 또 한 번의 성화가 점화된다. 아시아에선 일본(1964년 도쿄), 한국(1988년 서울)에 이어 세 번째 열리는 이번 올림픽에 한국은 배구, 소프트볼,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을 제외한 25개 종목에 267명의 선수가 출전한다. 한국의 목표는 ‘10(금메달 10개 이상)-10(종합 10위 이내 진입)’이다. 동구권의 보이콧 때문에 ‘반쪽 대회’로 열린 1984년 LA올림픽에서 사상 처음 10위에 오른 한국은 이후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한 차례(2000년 시드니 올림픽)만 빼곤 늘 10위권에 들었다. 한국은 전통적인 강세 종목인 양궁에서 2~3개, 태권도에서 2개, 역도와 수영에서 각 1개, 그리고 유도·레슬링·체조·사격·배드민턴에서 각각 0~1개의 금메달을 예상한다. 이 밖에도 탁구·펜싱·하키·복싱·핸드볼에서 ‘의외’의 금메달을 은근히 기대한다.
말 그대로 ‘예상’과 ‘기대’이다 보니 운이 좋으면 15개 이상의 금메달도 가능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6개 또는 그보다 못할 수도 있다. 천문영 대한체육회 홍보실장은 “예상은 예상일 뿐 대회가 시작되면 각종 돌발변수가 있을 수 있다”면서 “각 경기단체는 더 많은 금메달이 가능하다고 얘기하지만 비교적 합리적으로 잡은 예상치가 10개”라고 말했다. 한국이 가장 큰 기대를 거는 종목은 역시 양궁이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양궁 경기가 시작된 1972년 뮌헨 올림픽 이래 한국은 양궁에서만 무려 25개의 메달(금 14, 은 7, 동 4)을 쓸어 담았다. 2위인 미국(메달 13개)의 두 배 가까운 메달 숫자다. 특히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LA 올림픽 이후 단 한 번도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놓쳐본 일이 없으며 올림픽 양궁에서 수립된 모든 기록 역시 한국 여자선수들이 세웠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한국 여자양궁은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 석권을 노린다. 남자는 단체전 3회 연속 우승이 목표며 팀의 에이스 임동현이 사상 첫 개인전 우승에 도전한다. 홈 이점을 앞세워 거세게 도전해 올 중국을 따돌리는 게 숙제다. 태권도는 종주국의 메달 독식을 막기 위해 출전체급을 제한한다. 따라서 한국은 전체 10체급(남녀 각 5체급) 중 네 체급에 출전한다. 종주국이라 해도 다른 나라 선수들의 기량 성장세가 가파른 데다 다리가 긴 서구 선수들에게 체형 등에서 밀려 금메달 석권을 장담하기 어렵다.
2005~2007 월드챔피언인 여자 67kg의 황경선과 올림픽 예선 1위를 한 여자 57kg의 임수정, 남자 68kg의 손태진이 적어도 2개의 금메달을 따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수영은 이번 올림픽에서 ‘수영 천재’ 박태환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채비다. 남자 자유형 200, 400, 1500m 세 종목에 출전하는 박태환은 일단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종목인 400m 금메달을 노린다.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200m와 자신의 주 종목인 1500m에서도 빛깔은 달라도 메달 소식을 기대한다. 박태환과 함께 한국 선수 중 올림픽을 상징하는 또 한 명의 선수는 역도 여자 75㎏이상급(무제한급)의 장미란이다.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서 탕궁훙(중국)에게 역전패해 은메달에 그친 장미란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무솽솽(중국)이 출전을 포기함에 따라 금메달 고지에 무혈입성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도·레슬링·복싱 등 격투기 종목에서 강세를 보였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손기정 이래 한국이 아테네 올림픽까지 따낸 금메달은 모두 56개다. 이 가운데 격투기(태권도 포함)에서 나온 금메달이 20개다. 이번 대회에서도 레슬링에서 그레코로만형 55㎏급의 박은철과 60㎏급의 정지현, 유도 73㎏급의 왕기춘과 81㎏급의 김재범에게 금메달을 기대한다. 아테네 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평행봉에서 ‘오심’의 희생양이 된 양태영은 베이징에서 금메달에 재도전한다. 수십 명에서 많게는 100여 명이 단 1개의 메달을 놓고 경쟁하는 단체 구기 종목은 메달 순위 싸움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대회 내내 선수단의 사기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한국은 이번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에 남녀 핸드볼·남녀 하키·남자축구·야구·여자농구가 출전한다. 그중 축구와 야구는 국민적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축구는 아테네 올림픽 때의 8강을 넘어 이번 대회에서 메달권 진입을 노린다. 하지만 조별리그부터 만만치 않다. 한국은 이탈리아·카메룬·온두라스와 함께 D조에 속해 있다. 네 팀 가운데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에서 가장 처지는 한국이다 보니 다른 팀들, 심지어 이번이 올림픽 두 번째 출전인 온두라스조차 6회 연속출전의 한국을 우습게 볼 정도다. 한국은 카메룬·온두라스를 꺾고 최소한 2승을 챙겨 8강행을 확정하겠다는 생각이다.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의 한국 야구는 아테네 올림픽 때는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4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이번에 다시 메달 획득에 도전한다. 강력한 우승 후보는 최고의 선수들로 진용을 갖춘 일본과 쿠바다. 미국은 올림픽 기간 중 메이저리그가 열리는 탓에 마이너리그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 한국은 국내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과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이승엽으로 선수단을 꾸렸다. 8개 팀이 풀 리그를 벌인 뒤 상위 4개 팀이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가린다. 4년 전 아테네에서 온 국민에게 감동을 안겨준 여자핸드볼도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다. 이번엔 기필코 우승하겠다는 게 여자핸드볼 팀의 각오지만 4년 전보다 네 살씩 많아진 선수들의 나이만큼 ‘풍부해진 경험’을 빼면 크게 나아진 것은 없다. 남자핸드볼은 일단 8강 진출이 목표다. 그 다음은 선수들이 흘린 땀에 비례하는 ‘기적’에 기대를 걸고 있다. 267명의 한국 선수 중 베이징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가장 많이 거론됐고 대회 중에도 가장 많이 듣게 될 이름을 꼽아 본다.
박태환(수영) 4년 전 아테네 올림픽 한국 선수단 막내였던 박태환은 남자자유형 400m 예선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부정출발을 했다가 실격 당했다. 하지만 불과 3년 만인 지난해 세계선수권 이 종목에서 우승하며 세계 1인자가 됐다. 놀라운 막판 스퍼트를 자랑하는 그는 ‘육상 단거리에서 동양인은 안 된다’는 편견을 깬 육상 남자110m허들의 류시앙(중국)처럼 ‘수영 자유형에서 동양인은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1964년 멕시코 올림픽 이래 수영 자유형 메달은 어김없이 서양인 차지였던 전통을 깰 채비를 마쳤다.
장미란(역도) 한국의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다. 이미 합계기록에서 공인 세계기록(319㎏) 보유자인 그는 최근 훈련 중 세계기록을 11㎏ 상회하는 330㎏을 들어올렸다. 이번 대회에선 그의 메달 색깔보다는 세계기록 수립 여부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릴 듯하다.
왕기춘(유도) ‘한국 유도 최초의 그랜드슬래머(올림픽·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아시아선수권 석권)’. ‘한판승의 사나이’. 아테네 올림픽 남자유도 73㎏급 금메달리스트 이원희에게 따라붙는 화려한 수식어다. 그런 이원희를 무너뜨린 왕기춘이기에 그의 별명은 ‘한판승을 메친 사나이’다. 기술 면에선 전성기 때의 이원희엔 못 미치지만 특유의 저돌적인 승부 근성이 최대 장점이다.
박성현(양궁) 아테네 여자양궁 개인전과 단체전에 걸린 금메달 2개를 휩쓴 박성현은 베이징에서도 목표가 같다. 단체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신궁’ 김수녕과 윤미진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이다. 선수층이 두텁기로 이름난 한국 양궁에서 2001년 이후 8년째 태극마크를 단 그는 한국 선수 중 올림픽·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아시아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한 선수이기도 하다.
[필자는 중앙일보 스포츠부 기자이며,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 취재기자로 참여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