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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동네라는데 이사 때 TV도 안 사요”

“부자 동네라는데 이사 때 TV도 안 사요”

‘강남 대체할 신도시’ ‘신부촌’. 1만8000가구가 입주하는 잠실 재건축 단지를 부르는 말이다. 재건축 특수를 잡기 위해 유통, 부동산, 인테리어, 금융, 학원 등이 치열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분위기는 썰렁하다. 웬일인지 입주자들은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소비심리가 위축된 것일까, 실제 돈이 없는 것일까. ‘잠실의 굴욕’은 불황에 허덕이는 한국 경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싼 아파트가 정글처럼 빽빽한 곳에 부는 황량한 바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층 취재했다.
당신이 백화점 가전 담당 마케터라고 가정해 보자. 백화점 인근 새 아파트 단지에 2만여 가구가 입주를 시작한다면 입이 쫙 벌어지지 않을까?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기본적으로 텔레비전, 세탁기 정도는 바꿀 테니 말이다. 계산기를 꺼내 두드려 보자. 2만 가구 중 딱 10% (2000가구)만 150만원짜리 42인치 PDP TV를 사도 기대 매출이 30억원이다. 그뿐인가? 홈 인테리어 업자나 소파 등을 파는 가구 판매상도 ‘특수’를 기대할 것이다. 부동산 중개업소나 예금·대출 판매에 나선 은행, 신규 고객을 잡으려는 증권사 간 경쟁도 뜨거울 것이다. 지난 8월 1일 입주가 시작된 잠실 재건축 단지는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곳이다. 대형 백화점이건, 할인점이건, 가구점이건, 우유 대리점이건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단단히 한몫 잡겠다며 군침을 흘릴 만한 곳이다. 그에 따른 마케팅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입주가 거의 완료된 잠실 3~4단지를 제외하고 8~10월에 입주가 시작되는 잠실 1~2단지, 잠실 시영 재건축 단지로 이사 오는 가구만 1만8000여 가구다. 평균 4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대략 과천시만 한 인구가 몰려오는 셈이다. 신도시가 하나 생긴다고 해도 맞는 말이다. 그것도 3.3㎡(1평)당 가격이 국내 중소기업 5년차 평균 연봉인 3000만원(잡코리아 2008년 5월 조사)에 육박하는 곳이다. 지난 8월 7일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에 걸려 있는 이곳 매매가는 109㎡(33평)형이 8억3000만~10억원이었다. 잠실 주공 1~2단지를 재건축한 ‘엘스(1단지)’와 ‘리센츠(2단지)’를 배후로 하는 상가 가격은 3.3㎡당 최고 1억원이 넘는다. 또 이곳은 8학군이자 범강남권이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잠실 재건축 단지 입주 가구의 대략적인 구매력은 “대한민국 최상류 층으로 분류되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대치동 아이파크 거주자 대비 50% 수준”이라는 게 인근 백화점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겨우 50%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만만치 않은 구매력이다. 이곳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인 강남의 옆 동네이자 강남을 대체할 ‘신흥 부촌’으로 일찌감치 소문나 있지 않았던가. 자! 이제 비싼 아파트로 이사 올 구매력 높은 주부들이 지갑을 열 일만 남았다. 주변 상권의 기대는 컸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백화점 관계자는 “이사 특수만 200억원 정도 매출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잠실 재건축 단지 인근 롯데백화점 잠실점과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의 연 매출은 각각 7520억원, 6210억원이었다. 백화점 전 매장 매출 합계가 월 평균 500억~600억원 정도인 셈이다.

▶잠실 재건축 단지는 강남 집값 하락의 진원지로 꼽힌다.

이를 감안할 때 하나의 백화점이 이사 특수 상품에 해당하는 가전·가구·홈 인테리어 상품으로 200억원 정도 매출을 예상했다면 잠실 재건축 단지에 대한 유통업계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스스로 예상한 대로 매출을 올려 마케터의 입은 귀에 걸렸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 백화점 매니저는 “입주 초반이라고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안 좋다”고 말했다.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고도 했다. 다른 백화점 고객상담 관계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TV 욕심은 있는 편인데, 상담조차 없다”며 “홈 인테리어 상담을 하러 오는 잠실 입주자 중에 TV를 바꿀 계획이 없다는 고객이 많아 놀라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대형 백화점 관계자들은 무더운 휴가철이고, 입주 초반이라는 점을 위안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1만8000여 가구 중 가장 먼저 입주가 시작된 ‘리센츠(잠실 2단지, 5563가구)’ 입주율은 저조하다. 중도금 납부 등을 마치고 입주증을 받아 집 열쇠를 받아간 입주 가구는 대략 30% 정도다. 하지만 저조한 입주율이 백화점 판매 담당자들에게는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잘 안다. 한 백화점 팀장급 관계자는 “소비심리가 심각하게 위축돼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고 밝혔다. 이 팀장이 넋두리를 하던 7일, 통계청은 7월 소비자 기대지수가 2000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81.6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입주기간 늘려 달라” 조합원들 시위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으로 소비심리가 얼어 붙으면서 단일 재건축 단지로는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는 잠실 재건축 입주 특수는 점차 물거품이 되고 있다. 유통업계만 그런 건 아니다. 부동산·금융 업계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부동산 거품 붕괴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잠실 신(新)단지’는 강남 집값 하락의 원흉으로 몰리는 실정이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뱅크가 최근 지난 6월 기준으로 서울지역 아파트 값을 작년과 비교해 봤더니 시세가 떨어진 단지의 80%가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범강남권이었다. 이 중 잠실 재건축 단지가 속해 있는 송파구가 가장 많은 하락세를 보였다. 따지고 보면 잠실 재건축은 ‘공급이 가격을 안정시킨다’는 원리를 보여준 경우다. 하지만 현지 분위기는 ‘굴욕’ 그 자체다. 최근 신천역 부근 부동산 중개업소는 잠실 재건축 1~2단지 매매·전세를 알아보기 위한 고객들로 붐볐지만 실제 거래는 거의 끊긴 상태였다. 한 달 전 1억원 가까이 내린 가격에 매매가 일부 있었지만 다시 소강상태라는 것이 현지 공인중개사들의 얘기다. ‘초급매’ ‘급매’ 안내문이 붙은 중개업소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전세시장도 ‘강남 자존심’ 따위는 사치다. 워낙 전세 물량이 많다 보니 강북 아파트 전셋값과 비슷하게 나오는 물건도 있다. 한 중개업소 사장은 “실제로 강북 쪽에서 전세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입주 예정자 중에는 내놓은 집이 나가지 않아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 가구도 많다. 한 공인중개사 대표는 “1~2단지의 경우 원하는 값을 받으려면 집 팔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래도 잘 안 되는 데다 대출 받기 어려워진 환경도 잠실 재건축 단지를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잠실 시영단지를 재건축한 ‘파크리오’ 조합원들은 8월 6일 시공사를 상대로 “입주기간을 늘려 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잔금 낼 돈이 없어서다. 전세를 놔 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르거나, 매매를 통해 내야 하는데 거래가 뚝 끊기면서 8월 29일부터 10월 12일까지로 정해진 입주기간 내에 잔금을 치를 수 없는 형편이다. 조합원들은 입주기간 내 잔금을 치르지 못하면 10~15% 정도의 연체 이자를 내야 한다. 그렇다고 대출 받기도 만만치 않다. 대출 금리 때문이다. 현재 잠실 재건축 단지에는 금융회사들이 총 출동해 대출 영업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수요는 그리 많지 않다. 금리 상승으로 대출을 꺼리는 입주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당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7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다. 당연히 대출 금리도 올라 국내 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6.5~8.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4층의 낡고 허름했던 23~49.5㎡짜리 잠실 주공 아파트는 최고의 인기 아파트를 꿈꾸며 변신했지만 불황의 고개 앞에서 굴욕을 맛보고 있다. 특수는 없고 시름 소리만 큰 이 신도시는 한국 경제가 처한 불황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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