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시장이 인플레 수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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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임금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 |
과거 세계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값싼 제품이었다. 자동차, 전자제품, 각종 소비재, 금융과 통신 서비스 등 지난 20~30년간 가격이 내리지 않은 제품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다. 전 세계에서 재화, 노동, 자본의 초국가적 이동이 일어나면서 선진국이나 신흥시장 모두 부유해졌다. 실제로 2003~07년 세계 GDP(국내총생산)는 인플레율이 4% 아래를 맴돌 때조차 연간 5%씩 성장했다(사상 최고의 성장률). 자유무역, 값싼 신흥시장 노동력, 향상된 기술, 풍부해진 자본이 한데 어우러져 21세기 초를 지구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로 만들었다. 전 세계에 기회와 번영을 듬뿍 안긴 이 같은 커다란 변화는 아주 매혹적이고 흡인력 있는 이야기다. 사실 너무 흡인력이 커 최근까지 소비자, 정책당국 심지어 그들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은행들조차 거기에 그늘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이 같은 유례없는 성장의 이면에서 세계적으로 노동·식량·에너지 등의 수요가 커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35년 만에 처음으로 동시다발적이고 심각한 인플레이션 압박을 받고 있다. 세계적 호황을 낳았던 글로벌 무역과 자본시장의 긴밀한 유대강화는 요즘 전 세계에 드리우기 시작한 세계화의 그늘을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확산시키고 있다. 지난 몇 달 사이 거의 모든 나라가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누구나 주유소에서, 음식점에서 또는 난방비를 치를 때 물가상승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개도국은 이미 초인플레이션으로 기아, 폭동, 정치 불안에 빠져들고 있다. 러시아의 소비자들은 옛 소련 치하의 만성적인 식량난 시절처럼 다시 식량을 사재기하고 있다. 그들은 요즘 밀가루·파스타·오일 같은 기본식량을 몇 달 치씩 대량 비축하고 있다. 15%의 인플레 때문에 물가가 더 오를까 두려워서다. 중국은 유례없는 전력난에 처해 있다. 석탄값 급등과 정부가 정한 전기요금에 묶여 경영난에 허덕이던 소규모 발전소들이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6월 말 모건스탠리에서 발표한 한 보고서가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우리 자신도 놀랐지만 전 세계 190여 개국 중 대다수 신흥시장을 포함한 50개국이 현재 두 자릿수의 인플레이션에 직면했다.” 다시 말해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이 이미 두 자릿수 물가상승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마침내 정책 당국들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불과 몇 주 전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물가상승이 유럽의 성장을 위협하는 수준이라고 선언하면서 임금상승 같은 2차 충격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경고했다(이미 독일에선 임금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미국 소비자물가가 17년래 가장 큰 폭의 상승률을 기록하자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우선 과제”라고 의회에서 강조하기도 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지난 7월의 보고서에서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이라는 더 큰 악재를 만나지 않으려면 각국의 정책 당국은 지난 수십 년간 매달려 온 성장 위주 정책을 버리고 인플레이션 억제에 힘써야 한다고 촉구했다. 30년 전 서구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은 저성장과 고인플레이션이라는 두 마녀가 세계화의 황금기를 완전한 암흑기로 바꿔 놓을 것이라는 얘기다. 요즘 상황을 1970년대와 비교하는 사례가 부쩍 많아졌는데(버냉키도 그중 한 명) 일부는 적절하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재정지출 증가와 무책임할 정도로 느슨한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차이점이 더 중요하다. 당시엔 그런 고통의 원인 제공자나 피해자 모두 선진 공업국이었다. 1970년대 초부터 80년대 초 사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실업률은 3%에서 7.8%로 상승했고 물가는 해마다 10% 이상 뛰었다. 이번에는 신흥시장이 그 주인공이다. 중국 같은 나라들이 폭발적인 성장과 마구잡이 식 자원확보 경쟁으로 세계 원자재 가격을 끌어올리면서 인플레이션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현재 식품과 석유가 물가상승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유럽에선 그 비율이 3분의 2 안팎이며 그보다 높은 개도국도 일부 있다. 요즘 인플레이션은 원자재 가격 급등에 거의 직결돼 있다는 사실도 1970년대와 확연히 다른 대목이다. 당시 예컨대 미국에선 전체 인플레이션에서 식품과 석유의 비중은 30% 선이었다. 당시에는 식품과 석유를 제외한 근원 인플레이션이 급등했지만 요즘엔 대조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유지한다(적어도 선진국의 경우). 과거엔 식량과 석유 가격의 급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가격은 장기적으론 평균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식품과 석유 가격이 무차별적으로 오르는 듯한 원인은 인도와 러시아 같은 신흥 경제강국의 장기적인 수요 증가, 농업 생산성 증가율 둔화, 산유국들의 공급불안에 있다. 이런 추세 때문에 “인플레가 전반적으로 과거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유럽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 홀거 슈미딩이 말했다. 현재 전 세계 인플레율은 6%에 가까우며 단시일 내에 2000년 초의 3.5%는커녕 2007년 수준인 4% 정도로 떨어질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많은 기업이 새로운 인플레 환경에 대처하려고 사업모델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많은 항공사와 자동차 제조사가 주저앉기 직전이다. 음식점 체인도 숨을 헐떡이고 있다. 스타벅스는 최근 사상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커피값이 오르는데 4달러나 내고 라테 한 잔을 마시려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다. 생활용품 메이커 프록터&갬블은 최근 전 세계 공급망을 재편하겠다고 발표했다. 멀리 떨어진 생산공장을 소비자 가까운 곳으로 옮겨 급증하는 운송비 부담을 줄이려는 포석이다. 미국 소비재 회사 러버메이드는 각종 쓰레기통과 수납용기 생산라인을 감축해야 했다. 제품 소재인 합성수지가 석유를 원료로 하는 탓에 가격이 너무 비싸졌기 때문이다. 몇몇 기존 품목의 가격도 20%까지 인상할 계획이라고 이 회사는 밝혔다. 지금까지는 많은 회사가 그냥 높은 원가를 감수하면서 낮은 이익으로 만족했다. 세계화 황금기의 값싼 제품에 익숙해져 있던 소비자들이 비싼 가격에 거부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달라질지 모른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조사에서 소비자의 인플레 기대심리가 수년래 최고 수준을 기록한 반면 더 높은 가격에 물건을 구입하겠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낮았다. 그러나 현재로선 기업들이 타격을 입는다. 항공사들은 한 푼의 이익도 남기지 못했다. 캘리포니아주 대형 백화점 머빈스의 최근 파산신청도 의류가격 상승을 소비자에게 떠넘기지 못한 까닭이다. “신흥시장의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서구로 수출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그런 추세가 진행 중인 것 같다”고 모건스탠리의 미국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 리처드 버너가 말했다. 이익감소에 따른 기업지출의 급감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정부가 기업 대상의 일회성 세금감면을 실시한 덕분이며 올해 후반기에 그런 인센티브가 사라지면 그 여파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경고했다. 돌아보건대 저인플레이션 시대의 종언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2001년 첨단기술 거품이 꺼진 뒤 미국의 FRB를 위시한 서구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인하해 만신창이가 된 시장을 일으켜 세웠다. 자국 통화를 달러에 연동시킨 중국 같은 대형 신흥국 다수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하지만 경제의 빠른 성장 덕분에 금리를 인하할 필요까진 없었다). 금리가 바닥 수준으로 떨어지자 저리 자금이 흘러 넘치면서 현재의 혼란을 초래한 것이다. 작년 신용위기가 닥쳤을 때부터 이미 물가가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자 중앙은행들이 다시 금리를 내려 더 많은 저리 자금이 시중에 범람했다. 이번에는 1970년대보다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로 더 빨리 확산됐다”고 모건스탠리의 글로벌 이코노미스트 조아킴 펠스가 말했다. “세계적인 인플레율이 각국의 인플레를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키우고 있다.” 과거 인플레이션을 억제했던 세계화의 요인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위력이 더 떨어지거나 더 복잡하다. 중국에서 생산된 저가품들은 위안화로는 여전히 싸지만 달러 약세 때문에 미국인들에게는 더 비싸졌다. 그리고 물건값을 비교해 흥정하는 데는 인터넷이 강력한 도구지만 세계적인 수요 증가의 추세를 억제할 만한 힘은 없다. 정보기술의 확산으로 미국의 생산성이 크게 좋아지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연간 인플레율은 인터넷 덕택에 세계 평균보다 통상 0.5%포인트 정도 낮았다고 하버드대 경제학자 데일 조겐슨이 말했다. 그것은 세계 인플레율 평균이 2% 정도일 때는 큰 차이지만 5%를 웃도는 지금은 그 의미가 작아졌다. “인터넷이 도움이 되지만 유가 200달러나 식량가격 급등의 위협을 막지는 못한다”고 조겐슨이 말했다. 게다가 민간 조사단체 콘퍼런스 보드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바트 반 아크에 따르면 글로벌 지식경제의 성장이 오히려 고소득자의 만성적인 임금 인플레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는 항상 세계화가 임금을 억제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고급기술자의 경우는 오히려 부풀린다”며 중국 같은 나라에선 이미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정보기술 분야의 임금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상당수 개도국에서 임금이 전반적으로 급등하고 있다. 대다수 페르시아만 국가 외에도 인도·이집트·남아공·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러시아·터키·인도네시아·파키스탄·헝가리·라트비아 등 많은 나라가 올해 두 자릿수 임금 상승률을 기록했다. 한편 유로화 통용권의 임금 인플레율은 2008년 초 3.3%로 올랐다. 4년래 가장 높은 비율이다. 그런 증가가 더 광범위한 1970년대 스타일의 임금-물가 상승 악순환을 초래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재 US스틸 같은 회사들의 주가 상승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중국 경쟁사들의 경쟁력이 운송비 증가로 약화된 까닭이다. 건전지·가구 등 각종 산업이 비슷한 충격을 받아 생산시설을 국내로 옮김에 따라 미국과 유럽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거세질 것이라고 CIBC의 월드 마케츠 수석 이코노미스트 제프 루빈이 말했다. “(평평해졌던) 세계가 인플레이션으로 다시 둥글어질 것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서방 노조의 영향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예전처럼 강력하게 임금인상을 요구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슈밀딩은 “요즘에는 좌파 정책이 우세했던 1970년대와는 기대치가 완전히 다르다”며 최근 유럽의 임금인상은 노조의 힘 덕분이 아니라 실업률 감소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반대 주장도 있다. 적어도 서구에선 경기침체 우려가 임금-물가 상승 악순환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악순환은 소비자가 물가 상승을 예상해 더 많은 물건을 사재기하고 물가 상승률과 같은 폭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일어난다. 그러나 요즘 미국과 유럽의 소비 지출이 크게 줄었고 몇몇 소매업 조사를 보면 사람들이 지역 시장에서 상품을 살 때 제3세계 스타일로 에누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어려워진 경제도 근로자들이 당당하게 임금인상을 요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인플레가 글로벌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확실치 않지만 만만치 않으리란 것만은 분명하다. 스탠리 피셔와 로버트 배로의 영향력 있는 연구를 보면 인플레율이 5~7% 범위를 넘어선 뒤 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세계 평균은 5.5%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이 작년보다 1%포인트 낮은 4%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며 상당부분 인플레 영향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경제질서가 얼마나 복잡해졌는지를 말해 준다. 세계화가 키운 수요는 새로운 신흥시장 부유층을 낳았으며 그들은 다시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신시대를 재촉해 이젠 우리 모두가 그런 환경에 대처해야 한다. 쉽게 벗어날 길은 없다. 이미 글로벌 경제환경의 악화로 보호주의와 고립주의가 대두하고 있다. 특히 신흥경제는 통화정책의 서방 동조화에서 탈피하고 대규모 보조금을 감축하면서 성장과 안정 중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한다. 보조금 지급은 국민의 식량과 연료 구입에 도움을 주지만 시장을 왜곡하고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채질하기 때문이다. 터키·남아공·인도 같은 몇몇 국가(재정 형편이 나쁘고 정치가 어지러우며 원자재 자산이 거의 없는 국가들)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심각한 타격으로 사회불안이 발생할 수도 있다. 다수의 다른 나라도 변화가 심하고 불확실한 성장기에 접어들 것이다. 1970년대 서방을 고통스러운 스태그플레이션에 빠뜨린 정책적 과오를 피하려면 모두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앨런 그린스펀의 금리인하 제안은 무시하고 폴 볼커의 말을 되새겨 봐야 한다는 것이다. 더 보수적인 성향의 FRB 의장이었던 볼커는 기어코 두 자릿수 인플레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신흥시장은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볼커 같은 사람이 등장해 경기를 가라앉히고” 인플레 압력을 해소해야 한다고 모건스탠리의 펠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사려 깊고 신중한 경제 지도부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30년 전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With ANDREW BAST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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