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중국을 일구는 젊은 변혁가들
새로운 중국을 일구는 젊은 변혁가들
철교 전체 길이 6772m, 자동차 다리의 강 위에 걸치는 부분만 1577m나 되는 난징 장강대교(南京長江大橋). 다소 살찐 몸집의 사내가 다리의 한쪽 끝에서 쌍안경을 들고 다리 중앙 쪽을 열심히 살피고 있다. 사내는 목표물을 발견하자마자 오토바이 위에 뛰어올라 쏜살같이 달려간다. 자칭 자살 감시인인 천쓰(陳思·39)가 지난 5년간 설득하거나 때로는 억지로 난간에서 끌어내린 자살 기도자는 153명. “짐도 없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걸어가는 자살 기도자를 분간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180㎝의 거한을 제지하려다 약 50m 아래의 탁류로 함께 추락할 뻔한 간담이 서늘했던 적도 있었다. 그는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돈벌이를 위해 난징(南京)으로 상경했다. 그가 목숨을 구한 사람의 다수는 정신질환이 있든지 연애나 결혼에 실패하거나 또는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리던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나와 똑같은 주변인”이라고 천이 말했다. “그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다.” 부인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다며 천을 타박한다. 그래도 그는 주말이면 쌍안경을 들고 나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살 기도자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체면을 중시하는 배금주의자, 이기주의자라는 이미지가 강한 중국인이지만 쓰촨(四川) 대지진 때는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피해지역으로 몰려들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자신을 희생해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중국의 일상을 둘러봐도 두드러진다. 그 중핵을 담당하는 것이 천을 비롯한 30~40대 전반의 ‘혁명 7세대’다. 이 세대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경제 개방이 막 시작되던 80년대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였던 89년에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경험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크게 확대되고 국가의 사회보장이 줄어드는 90년대에 사회에 진출했다. “이들의 부모 세대는 국가가 모든 것을 정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대만의 단장(淡江)대학 국제정세 전략연구소의 린중빈(林中斌)이 말했다. 정계에서는 신중국을 만든 혁명 제1세대인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제2세대인 덩샤오핑(鄧小平)으로부터 제3세대인 장쩌민(江澤民), 제4세대인 후진타오(胡錦濤)까지 세대교체가 계속돼 왔다. 2007년 가을의 공산당 전당대회에는 제5세대인 시진핑(習近平) 부주석, 리거창(李克强) 부총리에 이어 40대 후반을 중심으로 한 제6세대가 주요 직책에 오르기 시작했다. 제6세대와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한 자녀 세대인 ‘80년 이후 세대’의 중간에 위치한 천 같은 30~40대 전반의 ‘제7세대’는 인구 13억 명의 25%, 약 3억4000만 명을 차지한다. 현재와 같은 속도가 유지된다면 공산당은 2032년에 제22회 당대회를 맞아 제7세대가 정권의 중추를 담당하게 된다. “문화혁명에 휘말렸던 세대는 베이징 올림픽의 개폐회식을 연출하는 영화감독 장이모우(張藝謀)처럼 체제와 사회의 커다란 흐름에 순응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제7세대는 강요된 가치관을 거부할 수 있는 세대”라고 문혁 세대에 속하는 중국인 정치학자 자오훙웨이(趙宏偉·54)가 말했다. “어쨌든 남들과 다른 것을 추구한다.” 일본의 통계·수리연구소가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총 3000명가량의 중국인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실시했다. “남들이 틈만 보이면 당신을 이용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당시 25~29세의 상하이 주민의 83%와, 30~34세 베이징 주민의 65%가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양쪽 통계 모두 다른 세대를 웃돌았다. 천이 목숨을 구한 153명은 중국 인구 13억 명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숫자지만 단 한 사람으로 시작한 그의 활동을 지금은 중국인 대학생과 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지원하고 있다. 톈안먼 사건은 건축가인 마옌쑹(馬岩松·33)이 중학생 때 일어났다. 80년대의 개혁을 이끌었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죽음을 계기로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89년 6월 4일 정부가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정부 발표만으로도 240명이 사망했다. 마는 그 시기를 전후해 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뚜렷이 기억한다. “그 이전의 교육에선 선악의 기준이 주어진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6월 4일 이후로 기준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입장의 교사가 (체제에 의한 탄압을 보고)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기준이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건축가가 된 이후 마가 뉴욕의 공모전에 금붕어가 들어 있는 비틀린 수조 모양의 작품을 출품한 것도 그 영향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대형 선호” 경향을 조롱하는 디자인을 설계한 일도 있다. “광저우(廣州)시 정부의 공모전에 출품한 것은 ‘800m 타워’라는 작품이었다”며 마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지만 400m 올라간 후 400m 내려가는 비틀린 모양이었다.” 당연히 마는 정부의 기피 인물이 됐다. 그러나 2006년 캐나다의 공모전에 입상해 세계에 이름을 알리면서 주가가 올랐다. 같은 해 톈안먼 광장을 숲으로 에워싸는 베이징 중심부의 도시계획안 ‘베이징 2050’을 발표했다. 주요 언론은 이 계획을 묵살했지만 마는 변화의 조짐을 감지하고 있다. 하나는 어느 지방정부가 그의 개방적이고 인간적인 건축을 행정부 건물에 채용하려고 열성을 보이는 것. 또 하나는 대형 국유기업 사옥의 설계를 마의 설계사무소가 수주한 일이다. “(요즘의 중국에는) 독자적인 잣대를 가지고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이 어느 계층에나 존재한다”고 마가 말했다. 톈안먼 사태 약 20년 전 마오쩌둥이 온건파로부터 당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은 10년간의 내전에 가까운 대혼란에 빠졌다. 사망자 수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사상이나 문화활동 외에는 모두 반혁명적이라고 탄압 당하고 운동을 담당했던 학생들도 나중에 ‘학습’ 명목으로 농촌으로 쫓겨났다. 80년대 들어 문혁의 종료와 경제개방에 따라 정부의 억압이 완화되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사상과 문화가 일제히 꽃을 피웠다. ‘황하는 죽었다’는 주제의 다큐멘타리 ‘하상’이 중국 CCTV에서 방송된 것은 88년 6월.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인 황하 문명을 ‘구 문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하며 투명하고 개방된 문명을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전통문화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이 작품은 1년 후에 톈안먼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인 학생과 지식인에게 영향을 줬다. 하지만 그 뒤로는 언제 그런 게 있었느냐는 듯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수하오룬(舒浩侖·36)은 ‘하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가난하면서도 높은 이상을 가진 80년대야말로 그의 세대가 가진 공통의 기억이며 지금도 그 이상주의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수는 믿고 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수가 귀국을 결정했던 것도 덩샤오핑의 전기영화나 과학기술영화밖에 볼 수 없었던 중국에서 사람들의 혼을 일깨우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재사고의 보장을 요구하는 이주 노동자를 돕는 변호사를 그린 수의 졸업작품 ‘몸부림’은 스위스의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수의 다음 작품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영화 ‘흑백사진(白黑寫眞).’ 상하이의 저잣거리에서 사는 소년의 성장을 통해 무지하지만 그 순수함 덕분에 ‘하상’ 같은 다큐멘터리가 탄생한 시대를 그린다. 80년대의 개방을 계기로 제7세대는 해외에도 눈을 돌렸다. 2007년 11월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지에 쓰촨성의 농촌 여성이 꾀임에 넘어가 네이멍구(內蒙古)의 사막 마을에 3600위안(약 54만원)에 팔린 사건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베이징에서 사는 저널리스트인 장리자(張麗佳·44)가 쓴 글이다. 전미도서상을 받은 재미작가 하진처럼 영어로 작품을 쓰는 중국인은 그 말고도 있지만 장은 베이징에서 거주하며 때로는 정부의 압력을 견디어가며 외국인 특파원이 취재할 수 없고 중국 매체가 보도하기 어려운 중국의 실태를 외국에 전한다. 장은 16세부터, 퇴직한 엄마를 대신해 난징시의 국영공장에서 일해 왔다(당시 중국에서는 일자리의 세습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장은 당시 공장에서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혁명시와 혁명문학 대신 자유로운 테마를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노래하는 현대시 ‘몽롱시(朦朧詩)’가 유행했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녀 자신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표현 속에 자유를 향한 갈망과 체제비판이 스며 있는 몽롱시가 실린 전문지를 탐독하고, 생산라인에 매몰하는 노동자의 심리를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 수틴의 시 ‘생산선’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했다. “정치집회보다 시나 문학이 얼마나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장이 말했다. 기자를 꿈꿨던 장은 공장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영어를 배워 90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3년 후 귀국해 외국인 기자의 조수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의 공장체험을 바탕으로 경제 개방기의 중국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최근 저서 ‘사회주의는 좋은 것이다’는 톈안먼 사태의 노동자 시위에 참가한 ‘나’가 경관의 심문을 받는 장면으로 끝난다. 소비자 피해사건이나 매체의 언론자유와 관계된 재판을 많이 다루는 베이징의 변호사 푸즈창(浦志强·43)은 올해의 톈안먼 사태 기념일(6월 4일)이 가까워진 어느 날 공안(중국 경찰)의 차에 태워져 “6월 3일과 4일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공안이 푸를 경계하는 것은 그의 영향력 때문이다. 푸는 과거 정부가 단속하지 않아 피해가 확대된, 미용성형업자에 의한 독성 가슴확대제 사건에서 십수만 명의 중국 여성을 도왔다. 대학원생이었던 89년에 민주화 시위에 참가해 징계를 받았던 과거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푸는 톈안먼 사태 후의 징계로 교원으로 대학에 남겠다는 꿈을 접고 취업을 받아주는 국가기관도 없이 시장 경리 등의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에게 변호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에 농락 당한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도 종종 자신의 불운을 탓하기도 한다. 그래도 정부를 자극할 가능성이 큰 자유와 인권 관련 소송을 굳이 맡으려는 것은 남들이 하라는 대로는 하지 않겠다는 가치관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다. 때문에 공안도 정부도 나를 어떻게도 하지 못한다”고 푸가 말했다. 실제로 49년 공산정권 성립 후 56년의 사상해방운동을 거꾸로 탄압한 57년의 반우파 투쟁, 58년의 대약진 정책, 66년부터 76년까지 이어진 문화대혁명, 그리고 78년에 시작된 경제개방 등, 중국인은 정치의 거친 파도에 마구 휩쓸렸다. 78년 이후에 진행된 자유화와 경제성장도 89년의 톈안먼 사태로 암흑기를 맞았다.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덩샤오핑이 화남지방에서 개혁과 발전의 필요성을 목청 높여 선언한 92년 이후의 일이다. 제7세대의 정치에 대한 경계심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취재 요청을 받은 남성 중 한 사람(직장 업무에 영향이 있다며 익명을 요구)은 “(89년) 당시 베이징 시민으로 톈안먼 광장에 나가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 본지가 직접 인터뷰한 이들 세대의 중국인들 가운데 톈안먼 사건에 관해 실명으로 증언한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이주 노동자 출신으로 이주 노동을 하는 농민의 지원활동을 계속하는 가수 쑨헝(孫恒·32)은 “베이징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해외 언론의 인터뷰에 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정부로부터 받았다”며 본지의 취재요청을 거부했다. 미국 라 샐르 대학의 중국학자 찰스 데스노이어스에 따르면 톈안먼사태 후 수년간 이 세대의 다수는 정치참여를 피해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하게 됐다. “무엇을 어디까지 하면 문제가 되는지를 그들을 잘 알고 있다”고 데스노이어스가 말했다. 중국에선 90년대 말 이후 인터넷 수요가 급증했다. 제7세대에는 그 기회를 살린 IT기업의 유명 경영자가 많다.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의 최고경영자 리옌훙(李彦宏·39)이나 중국인의 PC에는 반드시 들어 있다고 알려진 인스턴트 메신저 프로그램 QQ를 개발한 텐센트(騰訊公司)의 마화텅(馬化騰·36) CEO, 중국에 블로그를 처음 도입한 ‘블로그 차이나(博客網)’ CEO 팡싱둥(方興東·39)이 모두 이 세대다. 그들이 발전 초기였던 사회의 ‘공백’을 살려 성공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는 거의 과실이 남아 있지 않다. “비즈니스로 성공한 ‘1980년생 이후 세대’는 거의 없다”고 81년생으로 창업 준비 중인 중국인 여성(업무에 피해가 있을지 모른다며 익명을 희망)이 말했다. “제7세대가 경영자이며 우리는 그들 밑에서 일한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우유밍(吳幼明·34)은 지금도 후베이(湖北)성 양쯔(揚子)강변의 거리 황스(黃石)에서 경찰관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는 도시 주민의 1년 소득에 달하는 월 9000위안이라는 터무니없이 많은 벌금이 교통경찰관에게 할당되는 일이나 중앙정부에 직소하는 사람을 지방정부가 체포하는 실태를 인터넷에 공개해 2007년 해직됐다. 원래 작가를 지망했던 우에게 경관은 집필 소재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한 자녀 정책을 준수토록 하기 위해 임신 6개월인 임부의 팔과 다리를 잡고 집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것을 돕기도 했다. 병원으로 데려가 낙태시키기 위해서였다. 경찰복을 벗은 이후 우는 베이징으로 옮겨가 화가로 활동하면서 실명으로 블로그를 쓰고 있다. “지식인이라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우가 말했다. “뭔가 알면서 입을 다문다면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베이징의 지하철에 있는 이동식 공중화장실에서 1회의 사용료 5각(약 70원)을 내도 이전에는 법정 영수증이 발행되지 않았다.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운영하는 지하철 회사가 탈세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자칭 ‘공익소송인’인 하오징쑹(35)은 2004년 지하철 회사를 상대로 영수증 발행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또 철도청에 차내 판매의 영수증 발행과 구정 때의 운임 편승인상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처음의 소송을 빼곤 모두 패소했지만 철도청은 2007년 구정부터 운임인상을 중단했다. 정부는 부정하지만 누구나 하오의 공적임을 인정한다. “한 개인이 철도청을 움직였다.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법률의 힘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하오는 말했다. 은행원을 거쳐 대학에서 법률을 다시 배우면서 공익소송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하오지만 무턱대고 정부에 맞서는 것은 아니다. 하오와 그를 지원하는 변호사들은 일련의 소송을 시작하기 전에, 정부를 강하게 자극하지 않는 문제부터 다루기 시작해 법정에서 실적을 쌓아가기로 방침을 정했다. ‘인치(人治)’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사회에서 법률의 지위는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전에는 대학입시에서 문과의 하위에 처져 있던 법학부의 인기도 최근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하오는 아직 자기들 세대에는 중국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우리들은 극히 소수파”라고 그가 말했다. “대부분은 ‘떠든다고 뭐가 도움이 되느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대다수 중국인이 표면상 하오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공산당의 힘이 아직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간부의 부패사건과 농민의 폭동이 끊이지 않아도 당원 수는 해마다 200만 명씩 계속 증가해 2006년 말에는 국민 18명당 한 명꼴인 7239만 명이 됐다. 당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존경 받는 일은 없어졌지만 출세의 왕도임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들 세대 중 공공연히 당이나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국외 거주자나 국내에 있어도 실권이 없는 사람”이라고 32세의 중국인 카메라맨(가족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이 말했다. “공산당은 전보다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그렇게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정부에 공공연히 반항하지 않더라도 탄압받는 경우도 있다. 자칭 증권 애널리스트인 ‘다이터우다거(帶頭大哥, 솔선하는 형님이라는 의미)’라는 별명의 왕슈제(王秀傑·35)는 2007년 봄에 만든 주가예상 블로그가 국내 1위의 히트 수를 기록했다. “내가 하늘 아래 둘째라면 첫째는 없다”는 허풍에 가까운 자신감이 먹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하이 시장의 주가가 급상승하던 작년 7월 왕은 주가 거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당국에 돌연 체포됐다. 중국 언론은 그를 투기꾼으로 매도하고 탈세나 사기 의혹도 보도했지만 결국은 허가 없이 증권 관련 영업을 한 죄로 기소됐을 뿐이다. 공산당과 정부 내부에서도 7세대의 대두는 현실이 됐다. 2008년 들어 남부의 장시(江西)성 부성장에 비당원 출신 경제학자 셰루(謝茹·40)가, 과거 후진타오가 맡고 있던 공산주의청년단 제1서기에 베이징시 부시장인 루하오(陸昊·41)가 각각 발탁됐다. ‘미인 최연소 부성장’ 셰는 출세가도를 일사천리로 달려왔다. 원래 공산당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머지않아 입당허가를 받게 되며 당이 “젊고 우수한 지식분자를 당 밖에서 육성한다”며 일부러 입당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셰는 단순한 스타 정치인은 아니었다. 장시성 징더전(景德鎭)시에서 부시장을 맡고 있던 2002년 시내의 초·중등 학교의 내진강도가 낮은 교실의 보수에 착수해 2년간 위험교실 비율을 전국 최저로 끌어내렸다. 쓰촨 대지진으로 ‘두부 건축물’에 대한 전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기 6년 전의 일이다. 물론 특정 세대가 중국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중국사회를 가르는 것은 세대가 아닌 계급”이라고 프린스턴 대학의 중국 정치학자 페리 링크가 말했다. “해고 당한 근로자나 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퇴직자, 농민은 반체제 성향이 더 강한 반면 좋은 교육을 받은 세대의 사람들이 정부에 협력한다.” 2003년에 자신이 수십 명의 남성과 가진 성관계를 묘사한 블로그로 일약 스타가 된 무쯔메이(木子美), 본명 리리(李麗·30)는 “나는 제7세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80년대생, 90년대생으로 분류하는 쪽이 더 잘 이해된다.” 7월 1일, 칼과 화염병, 해머로 무장한 28세의 남자가 상하이시 공안국의 분국을 습격해 경관 6명을 살해했다. 남자는 분국의 한 경찰관으로부터 받은 단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중국에서 경찰 6명을 살해하면 사형을 면하기 어렵다. 본인과 가족 모두 가난해 변호비용을 댈 수 없다. 얼마 전의 중국이었다면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약식 재판을 거쳐 처형됐을 사건이다. 그러나 공익 소송인인 하오는 이 고립무원 상태의 남성을 법률 면에서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베이징의 변호사 슝례쒀(熊烈鎖·39)도 무상으로 남자를 변호하기로 결심했다. “제7세대에게 미숙한 부분도 있지만 상식의 틀을 벗어나려는 힘은 강하다”고 중국인 정치학자인 자오가 말했다. 제1세대인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는 항일전쟁과 국민당과의 전쟁을 이끌어 공산정권을 만들었다. 제2세대인 덩샤오핑은 경제개방을 선도해 현재의 발전 기틀을 다졌다. 카리스마 없는 집단지도체제라고 일컬어지는 후진타오의 제4세대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경제발전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을 획득하려 하고 있다. 경제개방이 막 시작되던 중국에서 몽롱시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몽롱시라고 인식했던 사람은 없었다. 사회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쓰인 시가 훗날 몽롱시라고 불리게 됐을 뿐이다. 제7세대도 반세기 후에는 중국을 바꾼 세대로 역사에 기록될지 모른다.
(기사제공·뉴스위크 일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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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PAUL MOONEY, NICK FRISCH, WANG XIAOYAN in Beijing, DUNCAN HEWITT in Shanghai, LEE DANUFF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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