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카메라를 감시하는 세상
감시카메라를 감시하는 세상
영국은 세계 최대의 감시 카메라 천국이다. 현재 인구 14명당 한 대꼴인 420만 대의 감시 카메라가 거리 곳곳에 설치돼 있으며 10년 뒤엔 그 수가 두 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런던 시민이 CCTV 화면에 잡히는 횟수는 하루 평균 300회에 달한다고 영국의 비영리 단체 감시연구네트워크(SSN)가 밝혔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의회 건물까지만 걸어도 그만큼 CCTV에 노출된다.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론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하지만 CCTV가 범죄자 체포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까? 런던 경찰청에 따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비용 편익 분석을 하자면 엄청난 물량과 예산에 비해 범죄예방과 해결 성과가 미미하다는 얘기다.
최근 바로 그 빅 브러더의 코 밑에서 텅 빈 복도나 주차장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의 따분하고 화질이 나쁜 영상을 제멋대로 가져다 쓰는 신종 게릴라 예술이나 해킹 수법이 등장했다. 80달러와 약간의 기술적 지식만 있다면 누구든 전자제품 매장에서 가정용 방범카메라와 함께 판매되는 무선 영상 수신기와 배터리를 사서 런던의 CCTV 화면에 접속할 수 있다.
‘비디오 스니핑(네트워크에 몰래 침입해 영상을 훔쳐 보는 해킹 기법)’은 광대역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에 무선인터넷에 공짜로 몰래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면 분필로 특정 마크를 표시해 놓는 ‘워초킹(warchalking)’에서 진화한 일종의 놀이다. 이러한 스니핑은 규모는 작지만 유럽과 뉴욕, 브라질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일요일에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기에 딱이다”고 대학원에서 쌍방향 미디어를 전공하는 조아오 윌버트가 말했다. ‘스니핑꾼’들은 식당이나 호텔 로비의 흐릿한 CCTV 화면이나 근처 가정용품 매장에서 젊은 커플이 쇼핑하는 모습 등을 수집한다. 소름 끼치지만 가장 흔한 이미지는 아기침대의 모습이다. 무선 아동용 모니터는 다른 감시카메라와 주파수가 같다.
또 암호화되거나 접근이 차단된 경우가 거의 없다. 스니핑이 불법이기 때문에 일부 예술가는 다른 방법으로 감시카메라 영상을 입수한다. 영상자료를 요청하는 서한과 함께 10파운드 수표를 동봉해 보내는 것이다. 호주 태생의 마누 루크시는 자신의 영화 ‘얼굴 없는(Faceless)’을 만들기 위해 영국의 정보보호법을 이용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CCTV 화면에 잡힌 사람은 누구라도 그 영상자료를 요청할 권한이 있다는 조항이 있다. “40일 내에 CCTV 영상들을 받았다”고 루크시는 말했다. 4년 넘게 감시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광장에서 군무를 연출하고 관련 서류를 제출한 끝에 루크시는 아름답고도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국의 개인보호법에 따라 모든 연기자의 얼굴은 지워졌다.
데이비드 밸런타인이란 영화감독이 연출한 ‘듀얼리스트(The Duelists)’역시 CCTV를 소재로 한 영화로 좀 더 대중에 친숙하다. 이 작품은 맨체스터에 있는 한 쇼핑몰의 감시카메라 영상으로 채워졌다. 밸런타인은 수완을 부려CCTV 통제실까지 들어갔지만 비디오 스니핑을 사회적 담론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런던 외곽의 사우스엔드온시(Southend-On-Sea)에 위치한 미디어셰드(MediaShed)라는 청소년 노숙자 지원기관과 협력해 스니핑을 문제 청소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사회와 다시 소통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미디어셰드는 현지 보수적인 지방의회로부터도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하지만 비디오 스니핑을 해킹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화면을 엿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선 네트워크에 침입해 CCTV 통제실에 다른 이미지를 송출하는 것이다. 이때는 일반 카메라의 주파수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영상 출력기를 이용한다. 미디어셰드 역시 이런 방식으로 우주선이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는 비디오게임 영상을 여러 곳의 감시카메라로 방송했다.
독일 올덴부르크의 한 스니퍼 그룹은 패스트푸드점 계산대 뒤의 직원 감시용 카메라 화면을 해킹해 맥도널드의 화면을 버거킹에, 버거킹 화면을 KFC로 송출하는 식으로 장난을 쳤다. CCTV를 이용하는 스니퍼, 해커나 예술가들이 대부분 감시시스템에 비판적이다. 동시에 그동안 공론화되지 못했던 사회적 감시 체계에 대한 대화의 장을 열고자 한다.
그들이 무선 감시 시스템에 접속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현 감시 체계의 맹점을 시사한다. 인류학자들은 관찰 행위가 관찰의 대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환경을 재구성한다”고 디지털미디어 전문그룹 몽그렐의 아트 디렉터인 그레이엄 하우드가 말했다. 런던 같은 감시카메라의 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플래시몹(인터넷 등을 통해 특정 장소에 모여 단시간 동안 특이한 행동을 한 뒤 바로 흩어지는 불특정 다수의 군중)’이나 ‘와이파이 피크닉(로컬 네트워크 상에서 플래시몹처럼 모여 특정 목표를 수행하는 것)’처럼 스니핑과 CCTV 해킹도 첨단기술을 활용한 사회현상이 될지 모른다. 물론 감시업계가 보안을 강화하면 금세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거리 곳곳의 카메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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