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World Market View] 정부의 외환관리와 시스템 유지에 달렸다

[World Market View] 정부의 외환관리와 시스템 유지에 달렸다


폭락한 코스피 지수 그래프.

한국 증시가 급기야 하루살이 신세로 전락했다. 지난주 미국발 금융위기가 몰고 온 ‘피비린내’를 투자자들은 온몸으로 겪었다. 리먼브러더스가 문을 닫게 됐다는 악재가 전해진 지난 16일 코스피 지수는 6% 넘게 폭락했다. 투매 속에서 공포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 이튿날, 미국 정부가 보험사 AIG의 부실을 해결하려고 85조원을 지원한다는 호재에 코스피는 2.7% 급등했다.

그 다음 날, 모건스탠리와 골드먼삭스도 안전지대에 있지 않다는 경계령이 내려지자 코스피 지수는 다시 2.3% 떨어졌다. 그리고는 금요일,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구제금융 카드를 꺼내기로 합의했다는 희소식이 전해지자 코스피 지수는 다시 4.5% 급등한다. 보기 드물게 경사가 가파른 롤러코스트 주가였다.



ATM 노릇한 코스피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부실이 시장 전체를 뒤흔들면서 주머니가 거덜나게 생긴 미국 금융사들이 현금 확보 전쟁에 나섰다. 지난주 코스피 지수가 급락한 것은 외국인투자자들이 새 악재가 불거질 때마다 주식을 팔아 치우고 현금을 챙겼기 때문이다.

반면 위기의 불씨를 끄는 데 도움이 되는 호재가 나오면 다시 주식을 사들이면서 증시가 크게 올랐다. 의아한 점은 한국 증시의 상처가 유달리 깊었다는 사실이다. 리먼의 파산 소식에 중국 상하이 지수는 4.4% 떨어졌고, 리먼 채권을 많이 보유해 가장 크게 물렸다고 알려진 일본의 닛케이 지수는 4.9% 빠지는데 그쳤다.

LG경제연구원 박윤수 위원은 “미국이 딸꾹질하면 한국과 대만·싱가포르의 타격이 크다. 한국은 달러에 의존하는 나라 중에서 시장 규모가 비교적 커서 주식을 언제든지 내놓아도 거래가 비교적 잘된다. 현금화가 그만큼 쉽다는 소리다. 특히 경기에 민감한 반도체와 하이테크 산업이 발달했다. 경제 상황이 안 좋아 주가 전망도 나쁘다면 쉽게 매도 후보에 오른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한국 증시가 현금인출기(ATM) 노릇을 한다는 얘기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신의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달러를 쓰는 주변국의 비애를 그대로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외환위기는 우리가 잘못해서 생겼다. 지금은 미국이 잘못했다. 그런데 우리까지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며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달러 사용국 중에서 자본시장이 좋은 편이라 매매가 잦고 주가가 쉽게 출렁이는 숙명적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언제쯤 이런 악순환이 끝나게 될지 장담하긴 어렵다. 미국 금융위기의 상처가 점점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해석도 엇갈린다. HI투자증권의 박상현 이코노미스트는 “대형 금융사들이 파산한 뒤 중소 금융사와 제조업체 등의 연쇄부도로 사태가 확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증권 황금단 애널리스트도 “미 금융사들의 도미노 파산 위험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국내 증시는 여전히 미국 증시에 동조화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며 “지나친 공포도, 막연한 낙관도 피해야 한다”고 보수적 대응을 주문했다. 반면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애널리스트는 “베어스턴스·리먼브러더스·AIG처럼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 선고를 받은 6개 금융사의 처리가 신뢰회복의 관건이었다”며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고 진단했다.

특히 그는 “금융위기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주가는 반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를 보면 주가는 상처 치유의 가능성이 싹트는 시점에서 미리 오르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길목은 외환시장이다

외국인 매도는 증시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삼성금융연구소의 김승진 상무는 ‘3대 감염경로’를 걱정했다. 첫째, 금융사들이 직접 피해를 볼 수 있다. 리먼브러더스나 주택대출 보증업체인 패니메이·프레디맥이 만든 상품에 투자한 곳이 대표적이다. 다만 김 상무는 “손실이 크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뒤 위험관리를 철저히 해 치명타를 입을 만큼 물리진 않았다는 분석이다. 한때는 “몸을 사려 돈을 제대로 못 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위기 속에선 ‘보신주의’가 되레 약이 된 셈이다. 둘째, ‘달러 엑소더스’ 우려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한국 증시의 ATM 역할이 커지면서 위기 바이러스가 국내에도 고스란히 전염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구체적으로 ‘미 집값 추가 하락 → 담보대출·금융사 부실 확대 → 외국인 현금 비상 → 한국 주식 매도 → 환율 급등 → 공황’이라는 시나리오를 우려할 수 있다. 김 상무는 “아직 여기까지 이르진 않았다. 이런 국면이 현실화하면 정부가 손 쓸 여지는 많지 않다”고 했다. 셋째, 실물경제로 타격이 옮겨가면서 모든 이가 피부로 위기를 겪는 단계가 올 수도 있다.

‘미 금융시장 위축 → 경기침체 → 소득 감소 → 한국수출 감소 → 경제 하강’의 악순환 시나리오다. 세 가지 감염 경로에서 전문가들은 특히 ‘외국인 자금 이탈’과 ‘외환시장’을 주시하고 있다. 외환위기·카드사태 등을 해결하면서 위기 때마다 ‘대책반장’ 역할을 했던 김석동 전 재정경제부 차관(현 농협경제연구소 대표)은 “외환시장이 위기감염의 길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위기로 미국에서 금융시장 옥죄기가 시작될 것이다. 규제를 강화하면서 시장이 위축된다는 소리다. 그러면 한국은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첫째, 외채로 시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단기에 갚을 빚이 200조원을 넘는다. 그런데 이 돈을 빌려줄 곳이 마땅치 않다. 둘째는 주식 매도 우려다. 그는 “사태가 더 커지면 한국이 밉지 않더라도 외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관치(官治)의 귀환

위기 전염과 피해를 최소화하는 복안은 뭘까? 정부는 우선적으로 ‘외부 악재’임을 강조해 위기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겠다는 생각이다. 감염경로가 어느 정도 보이는 만큼 외환을 비롯해 재정과 규제 카드를 적절히 조합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위 박영춘 금융정책과장은 “지금으로선 외부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최악을 가정한 대책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김석동 전 차관도 ‘심리와의 싸움’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일단 튼튼하다. 기업이며 금융사들이 지금처럼 건전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흥분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터놓고 고통분담을 얘기하는 것”이라며 “상처가 오래갈 수 있지만 정부가 강인한 대응책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태로 미국에선 시장이 관(官)에 SOS를 요청했다. 금융부실이 옮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세계적으로 규제가 많아지고 정부가 다시 힘을 얻게 될 거란 이야기다. 김 전 차관은 “정부의 사명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다. 시장은 그 역할을 못한다”고 설명했다. “평시엔 베일 뒤에 있다가 위기 때 나서는 게 정부다.”

예컨대 외환시장에 경고등이 켜졌을 때도 정부가 외환보유액으로 수급 차이를 조절하거나 환율의 고삐를 푸는 등 여러 가지 해법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창용 금융위 부위원장은 “이번 사태로 금융·경제 개방이 위축되는 빌미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투자은행 모델이 끝장을 봤고, 금융사들의 해외진출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안될 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금융사들이 국내에서만 크려고 하니 달러 조달이 힘에 부쳤다. 주식이나 채권으로만 자금을 조달하려 했다. 만약 해외에 큰 은행이 있었다면 위기감도 덜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필자는 ‘중앙SUNDAY’에서 국제경제 기사를 쓰고 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구간 '경고 파업' 철회

2‘하늘길도 꽁꽁’ 대설에 항공기 150편 결항

3‘이재명 아파트’도 재건축된다…1기 선도지구 발표

4코스피로 이사준비…에코프로비엠, 이전상장 예비심사 신청

5‘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6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7중부내륙철도 충주-문경 구간 개통..."문경서 수도권까지 90분 걸려"

8경북 서남권에 초대형 복합레저형 관광단지 들어서

9LIG넥스원, 경북 구미에 최첨단 소나 시험시설 준공

실시간 뉴스

1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구간 '경고 파업' 철회

2‘하늘길도 꽁꽁’ 대설에 항공기 150편 결항

3‘이재명 아파트’도 재건축된다…1기 선도지구 발표

4코스피로 이사준비…에코프로비엠, 이전상장 예비심사 신청

5‘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