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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vs. 중도 우파

오바마 vs. 중도 우파


1985년 12월 5일 목요일. 미국 보수주의 성향의 정치 평론지 ‘내셔널 리뷰’의 창간 30주년 기념 만찬이 워싱턴DC의 플라자호텔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발행인 겸 편집장인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가 일어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위해 건배를 들었다.

할리우드 스타 찰턴 헤스턴이 MC를 맡았고 윌리엄 J 케이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부인 낸시, 빨갱이 사냥으로 유명한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의 고문 변호사 로이 콘, 헤스턴의 동료 배우 톰 셀렉 등 쟁쟁한 보수파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 13개월 전 레이건은 재선에 도전해 북부 연합 지역에서 월터 몬데일을 지지한 미네소타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버클리는 건배사에서 레이건에게 “귀하는 개인적으로 여러 면에서 미국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입니다”고 치하했다. “어떤 도전이 와도 우리는 최종 책임을 가진 지도자인 귀하에게 의지할 것입니다.” 버클리는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자신이 19세였으며, 이제 막 60세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자유로운 독립국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핵 억지력을 꾸준히 갖춰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또 필요하다면 핵무기를 사용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 왔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했습니다. 내 아들이 60세가 되고 당신의 아들이 60세가 됐을 때, 그들은 우리 세기에 깊은 상처를 남긴 그 엄청난 추악함이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들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역경에 처해서도 아버지들의 피가 힘차게 흐르는 것을 고마워할 것입니다.”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는가? 꽃이 만발하고 와인을 마시며 흥이 오른 하객들이 가득 메운 플라자호텔의 대연회장은 화려한 레이건 시대의 단면이었다. 버클리가 냉전에 관해 언급한 것은 원초적인 감정의 발로였다. 엄습해 오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원시인의 본능과 마찬가지였다.

그 한 달 전인 1985년 11월. 하원 민주당 당원대회 위원장을 지냈고 민주당리더십협의회(DLC) 의장을 맡은 앨 프롬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었다. 그는 동요하는 민주당원들이 몬데일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도록 집안을 단속하려고 랄리에서 출발해 그린스보로까지 가는 비행기를 탔다. 프롬은 이렇게 회상했다.

“유권자들은 ‘우리가 민주당을 떠난 게 아니라 민주당이 우리를 떠났다’고 푸념했다.” DLC는 당 노선을 오른쪽으로 조정해 중도로 옮겨 가려 했다. 딕 게파르트, 조 바이든, 샘 넌, 로튼 차일스가 프롬과 동승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주 괴로운 날이었다. 우리가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이미 프롬은 워싱턴 의회의 볼일 때문에 마지막 여정인 샬럿 행사를 취소했다. 빗속에서 그린스보로에 도착한 프롬 일행은 우울한 기분으로 모금 행사장인 한 공항 호텔로 향했다. “아무도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프롬은 돌이켰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문밖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그 행사의 메시지는 단도직입적이었다고 프롬은 회상했다. “민주당을 미국 주류로 재편입시키는 게 목표였다.”23년 전의 이 두 순간(플라자호텔의 만찬 행사와 그린스보로의 모금 행사)에 바로 미국 정치의 뿌리가 있다. 지금 선거를 몇 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의 승산이 커지면서 미국인들은 새로운 진보의 시대가 다가온다고 생각하기 쉽다.

바라던 바라고 외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8년에 걸친 공화당 집권은 끝이 안 보이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경기 후퇴에 빠진 경제, 금융 부문에 대한 사상 초유의 연방정부 개입 그리고 미국 전역에 만연된 불안감(미국인의 86%는 현 상황에 불만을 나타냈고, 73%는 현 대통령의 직무 수행을 비판한다)을 만들어 냈다.

미국 상원에서 4년을 아직 채우지 못한 오바마가 현재 지지도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존 매케인을 앞서고 있다. 민주당이 연방의회의 의석을 늘릴 가능성 또한 크다. 국제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는 2007년 ‘민주당에 유리한 정치 지형’이라는 부제를 단 112쪽짜리 보고서를 발표했다.

가장 최신 ABC뉴스·워싱턴포스트 여론조사에서는 55%가 오바마의 시각이 너무 진보적이지도, 너무 보수적이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2대 대통령 존 애덤스가 사실에 입각해 말했듯이 역사는 쉬 변하지 않는다. FDR(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JFK(존 케네디), LBJ(린든 존슨), 지미 카터, 빌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대통령들은 대개 처음 자신들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정도로 우익으로 크게 기울고 말았다.

또 진보주의를 고집한 경우에는 선거에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오바마가 승리한다면 본능적으로 진보보다는 보수에 가까운 나라를 통치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원래 보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변함없는 현실이다. 역대 민주당 대통령들은 그 점을 무시했다가 낭패를 봤다.

앤드루 잭슨이 ‘다수의 통치’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창립한 민주당은 바로 그 다수가 민주당의 미덕과 공화당의 악덕을 알아차리지 못함으로써 오랫동안 상처를 입었다. 이렇게 되풀이된 시행착오는 뿌리가 깊다. FDR은 높은 지지도가 오래갔지만(1933∼37년) 38년과 42년 중간선거에서 입지를 크게 잃었다.

린든 존슨은 1964년 배리 골드워터 민주당 후보를 물리친 뒤 베트남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2년 동안만 반짝 인기를 누렸다. 그 후 1968년 민권운동에 대한 백색반동(백인들의 반발)으로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올랐다. 지미 카터는 단임으로 끝났고, 빌 클린턴의 민주당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패했다.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성공한 것은 전통적인 민주당 정신을 증진한 것보다는 복지를 개혁하고 기술 붐에 따른 번영을 잘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화당 대통령들 역시 우에서 중도로 노선을 이동했다. 닉슨은 임금과 물가 관리를 제도화했으며, 환경보호청(EPA)을 설립했다.

레이건은 세금을 내렸다가는 다시 올렸고, 연방정부의 확대를 주도했으며, 자신이 악의 제국으로 부르던 소련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중도 국가인가, 아니면 중도 우파 국가인가? 나는 후자라고 본다. 대다수 미국인이 되돌아가는 심적인 기준은 진보보다는 보수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뉴스위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보다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두 배나 된다(40% 대 20%). 그리고 공화당이 대통령 정치를 40년이나 주도했다. 1968년 이후 민주당은 10차례의 대통령 일반 선거에서 단 세 차례 승리했을 뿐이다(1976, 92, 96년). 그때는 진보라는 라벨을 떼어 버린 남부 침례교 신자 후보들이 주도했다.

“미국이 중도 우파 국가일까? 그렇다. 유럽이나 캐나다에 비해 훨씬 더 보수적”이라고 애드리언 울드리지가 말했다. 그는 런던에서 발행하는 이코노미스트지의 워싱턴 지국장이며 ‘우파 국가:미국의 보수 파워(The Right Nation:Conservative Power in America)’의 공동 저자다. 그는 이런 설명을 붙였다. “불평등에 대한 용인도가 훨씬 높고, 문화 면에서 훨씬 보수적이며, 범죄자 수감률도 높고, 권총 소지가 합법이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훨씬 크다.”

정치와 문화를 논하는 용어는 모호하고, 때로는 이현령 비현령 식이다. 보수주의라는 라벨은 모든 종류와 조건의 부류를 아우르는 경우가 많다. 자유의지론자, 복음주의 기독교인, 감세주의자, 호전론자 등(진보 부류도 거의 마찬가지로 다양하다). 하지만 크게 봐서 나는 미국인 대다수가 최근 몇십 년 동안 사용해 온 의미로 ‘보수’를 정의한다.

변화보다 관례를 중시하며, 익숙한 것을 잃어버리는 상황과 정부의 팽창을 두려워하며, 신앙·애국심·문화에 대해 잘난 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부류를 말한다. 다시 말해 영국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서 미국 건국 아버지 중 한 명인 토머스 제퍼슨, 뉴욕타임스의 보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 그리고 현재의 공화당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에 이르는 가지각색의 인물들을 포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다수 미국인은 위기가 닥쳤을 때는 정부를 필요로 하지만 위기가 지나고 나면 정부가 왜 있어야 하는지 의심한다. 미국이 그처럼 본래 우익 편향적인 국가라는 나의 주장은 앞으로 여러 달 동안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민주당을 상징하는 청색의 거대한 쓰나미가 임박해 보인다.

선거 당일 밤과 어쩌면 오바마 행정부의 첫 몇 달 동안은 미국이 대담한 새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해묵은 틀을 버렸고, 실용주의가 도그마를 압도하는 시대를 말한다. 경제적으로는 예산 적자가 너무 심해 우리 모두가 지금 정부의 개입을 중시하는 케인스 경제학의 신봉자가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미국에서 정부와 국민의 관계는 위선과 인지적 부조화(모순 또는 상반되는 신념·태도 따위를 동시에 갖는 데서 오는 심리적 불안)가 너무 심해 합리적으로 논하기가 어렵다. 대다수는 정부의 도움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정부를 싫어한다.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전쟁, 인프라 건설, 재난 구호, 투자은행 구제)를 제외하고는 세금을 혐오한다.

그러나 현재의 미국은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위기 상황에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진보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클지 모른다. 실제로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를 역전시킨 금융 부문의 구제, 종교적인 논의가 수그러들던 상황 등을 감안하면 2008년의 미국인들이 1960년 영화 ‘신의 법정(Inherit the Wind)’에서 진화론 교육에 강하게 반대운동을 했던 보수적인 주민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조짐이 많다.

그러나 맥락이 중요하다. 물론 미국은 좀 더 행동주의적인 정부, 종교·성별 등에 관한 사회적 이슈에서 좀 더 부드러운 어조를 수용하는 조짐을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을, 예컨대 유럽과 비교해 본다면 여전히 보수 성향이 강하다.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서 ‘가족과 결혼에 관해 구식 가치관’을 가졌다는 사람은 1994년 이후 8%포인트 줄었다.

하지만 84%에서 76%가 됐을 뿐 잣대가 완전히 기운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 민주당을 유럽의 노동당과 비교해 보면 미 민주당이 많은 면에서 보수주의로 나타난다”고 울드리지가 말했다. “민주당 행정부가 권총 소지를 불법화하겠는가? 천만에. 모든 주의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려 들까? 천만에. 그렇다면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미국은 근본적으로 보수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다.”

예수 제자들이 자신들이 죽기 전에 메시아가 보라는 듯 재림하기를 기대하다가 실망했듯이 진보주의자들도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실망할 게 거의 확실하다. “지금은 이념이 아니라 실용주의가 대세인 듯하다”고 오바마의 수석 전략가 데이비드 액슬로드가 말했다.
그러나 일부 유권자의 마음에 혹시나 이념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바마는 진보의 ‘진’ 자를 피하려 애썼다.

오바마는 동성 결혼에 반대하며 감세, 종교, 참전군인 특혜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 온 버지니아·노스캐롤라이나주, 심지어 올해 초 힐러리 클린턴에게 대패한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도 선거 광고에 거액을 쓴다. “오바마는 중도의 약간 우측에서 통치할 것 같다”고 DLC 의장인 헤럴드 포드 주니어가 말했다. “그는 이념가가 아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면 40년에 이르는 공화당의 통치 가운데 몇 가지 예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공화당의 백악관 장악이 쉬운 이유는 뭘까? 당연하지만 각 당의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다. 공화당은 자신들의 정책과 가치가 미국인 전체를 포용하기 때문에 승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민주당은 공화당이 두려움을 부추기는 데 명수라고 비난한다.

그래서 무엇이든 이용해 사람들을 겁줘 더 바람직한 방향보다는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내게 만들기 때문에 민주당이 계속 패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진실은 양 극단 사이의 중간 어디엔가에 있다. 공화당은 아버지 같고 드세어 보였다. 반면 민주당은 어머니 같고 부드러워 보였다.

공화당의 빈번한 백악관 장악을 가능케 하는 힘을 이해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관해 많은 사실을 설명해 줄 뿐 아니라, 만약 오바마가 승리한다면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 필수적인 고려 사항이 될 것이다. 역대의 유능한 대통령들은 미국의 내재적인 보수주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일반적인 묘사와 달리 보수주의가 반드시 인종차별주의나 수구주의, 또는 닫힌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존하겠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에 의해 이끌어진다. 진보주의와 온건주의도 똑같은 충동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나 온건주의자들처럼 보수주의자들도 관대하고 미래지향적이며 개혁에 관심을 갖는다.

요점은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정치와 문화적 이슈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급진적인 변화를 수용하기보다는 익숙한 관례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48년 저서 ‘미국의 정치전통(The American Political Tradition)’ 서문에서 소설가 존 도스 파소스의 말을 인용했다.

“변화와 위험의 시기에 인간의 사고력 아래 두려움이라는 모래늪이 있을 때에는, 과거 세대와 연속성이 이 무시무시한 현실의 건너편에서 생명선처럼 뻗쳐 온다.” 그 생명선의 필요성은 어느 세대에서든, 어떤 정치적 라벨이든 모두를 초월한다. 미국의 보수주의 시대는 오는 11월 말 끝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인들은 그 시대가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시작됐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역사를 더 깊이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충동이 1820년과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 독립을 쟁취한 혁명 세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미국인들은 제퍼슨 식의 ‘옛 공화당’ 노선을 그리워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관례를 따르는 정치가 잃어버린 더 나은 세계를 되찾아 줄 수 있다는 게 보수주의적 충동의 근원이다.

1940년대 호프스태터가 논했듯이 진보의 시대는 여러 면에서 복고 의식이 이끌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로버트 라폴레트, 우드로 윌슨은 지난 40년 동안의 해악을 없애고 분산화된 권력, 순수한 경쟁, 민주적 기회가 가능한 옛 국가를 재창조하려 했다”고 그는 말했다.
호프스태터는 미국 중도 우파의 관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유재산의 신성함, 재산을 처분하고 구입하는 개인의 권리, 기회의 가치, 폭넓은 법적 제한 속에서 사리와 자기 주장을 유익한 사회 질서로 승화시키는 것이 미국 정치 이념의 핵심이었다. 이런 개념은 제퍼슨, 잭슨, 링컨, 클리블랜드, 브라이언, 윌슨, 후버 등이 공유했다.” 이 명단에 버락 오바마(그리고 존 매케인)의 이름을 추가해도 무방할 듯하다.

두 명의 아서 슐레진저(아버지와 아들)는 미국 역사가 순환적이라고 믿었다. 진보적인 ‘작용’ 다음에는 보수적인 ‘반작용’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주목할 만한 학설이지만 역사와 정치는 삶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명확하게 정의되기 힘들다. 보수의 시대에 진보적인 아이디어가 꽃피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진보파가 보수파의 도그마를 실천하고, 보수파가 진보적인 구호를 채택한다.

아이젠하워는 루스벨트-트루먼이 확대해 놓은 정부의 규모를 되돌리지 않고 사실상 뉴딜 정책을 성문화했다. 닉슨은 진보파의 염원이던 어퍼머티브 액션(소수민족 배려 정책)의 채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경계선은 흐릿하고 용어도 불명확하다. 미국이 원래 보수주의 국가라는 주장에 회의론도 많다. 올해 초 ‘닉슨랜드(Nixonland)’라는 책을 펴낸 릭 펄스타인은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여론에 관한 한 미국 대중은 중도 우파가 아니다.” 여론이라면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데이터 같은 것을 말한다.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진보적이다. 그러나 정치 시스템으로 보면 미국은 중도 우파 국가다.” 펄스타인의 시각에는 시스템상으로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사고방식만큼 진보적인 정부를 세우기가 어렵게 돼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 의회의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 막강한 이익단체들 때문에 정부를 개혁하려면 압도적인 다수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의 건국자들은 변화가 점진적이고 신중한 과정이 되도록 헌법을 만들었다.” 옳은 말이다. 사실 미국은 그 시스템 덕을 많이 봤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200년이 넘도록 미국이 그럭저럭 역경을 헤쳐 나올 수 있도록 해 줬다.

그러면서 법 아래서 개인의 자유는 결코 줄어듦이 없었고 오히려 조금씩 신장했다. 펄스타인의 견해는 좌익 진영에서 폭넓게 공유된다. 진보주의보다는 보수주의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미국인이 많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난 30년 동안 ‘진보’라는 단어를 불쾌하고 불안한 모든 것과 동일시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사람들이 진보 노선을 지지한다면 자신을 진보라고 하든, 보수라고 하든, 햄 샌드위치라고 하든 상관없다. 그들은 실제로 진보를 지지한다.”

역시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잘 드러나지 않는 사실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조차 같은 사실을 보면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대통령 후보 토론이 끝난 뒤 30분 내에 NBC뉴스의 브라이언 윌리엄스는 자기 프로그램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인터뷰했다. 윌리엄스는 워싱턴의 일당 통치 체제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하며 민주당이 “백악관도 장악하고 의회도 장악하면 그 힘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요?”라고 물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민주당 의회와 민주당 대통령을 가졌던 때가 1993년이었죠”라고 힐러리 클린턴이 대답했다. “그때 민주당이 한 것을 다시 해 나가야죠.”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당시를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장밋빛으로 기억하는 듯하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고 첫 두 해 뒤인 1994년 중간선거에서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이 이끄는 공화당이 압승을 거뒀다.

빌 클린턴은 과거의 선거 참모 딕 모리스를 다시 불러들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DLC 의장 위상을 되찾았다. 이 교훈은 초당적인 통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당은 언제나 과도하게 어느 한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1995년 공화당이 정부의 역할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패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요즘 공화당이 곤경에 빠진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나 같으면 만약 오바마가 승리한다면 30년 진보 시대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거창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액슬로드가 말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칼 로브가 바로 그런 실수를 했다. 그 정도의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오만으로 다른 사람이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도 있다. 미국 정치의 현실 중 하나는 대통령은 중요한 일을 할 기회가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존슨의 경우는 1964, 65, 66년이 그랬다. 레이건은 적어도 국내 정치에서는 1981년이 그런 기회였다. “오바마에게도 진정한 개혁의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워싱턴 먼슬리를 창간한 편집장인 찰스 피터스가 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바마는 미국의 본성이 적어도 내 생애 동안에는 중도 우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다.”

23년 전 버클리가 플라자호텔에서 말했던 그 아들이 작가 크리스토퍼 버클리다. 그는 이번 가을 많은 일을 겪었다. TheDailyBeast.com이라는 새 웹사이트에서 오바마 지지를 선언한 뒤 아버지의 우익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그는 아버지가 창간한 잡지의 마지막 페이지 칼럼니스트 자리를 사임했다. 그러자 현재의 편집장이 곧바로 사표를 수리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왕국에서 아들이 쫓겨나는 상황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비슷하지만 그런 비유를 논외로 치면 이 사건은 아주 흥미롭다. 버클리가 오바마를 지지하는 것은 보수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미국의 우파가 길을 잃었다고 본다. 그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전통적인 좌파 정치로는 미국이 스스로 판 구덩이에서 미국을 구할 수 없다는 걸 알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나는 지난 10월 17일 금요일 버클리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오바마가 중도 입장에서 미국을 통치하기를 바란다”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본성이 보수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는 교회에 나가고, 가정에 충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오바마는 시련을 견뎌 내기 위해 때에 따라 노선을 바꿔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보수주의자다.” 이제 트럼펫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오바마가 명심해야 할 이야기다. 루스벨트나 레이건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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