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살은 빼고 리스크 재점검하라
군살은 빼고 리스크 재점검하라
역풍을 맞으며 마라톤을 하면 속도는 늦지만 체력은 강해진다.”
“현금이 왕이다(Cash is King).”
“본업으로 돌아가라.”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밀어닥치자 세계 기업들이 생존을 걸고 비상 탈출작전을 펼치고 있다. 격동의 시대의 기업들의 분투다. 지난 10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철강협회(IISI) 총회는 내년 세계 철강수요 예측치를 발표하지 못한 채 끝났다. 이례적인 일이다. 내년 이후에도 세계 철강수요는 성장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앞날이 매우 불안하다는 관계자 논평만 있었다.
세계 금융위기의 폭풍은 ‘산업계의 쌀’인 철강에도 휘몰아치고 있는 듯하다. IISI는 올해 세계 철강수요 성장예측을 종래의 6.7%(올 4월 시점)에서 5%로 수정했다고 발표했다. IISI는 “우리는 불안정한 환경의 한가운데 있다. 올 후반에 걸쳐 철강시장에 미칠 영향은 보다 확실히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자동차 빅3(GM·포드·크라이슬러)가 정부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가운데 GM과 크라이슬러의 합병구상, 포드가 갖고 있는 일본 마쓰다의 주식매각 계획 등이 표면화되고, 심지어 디트로이트에 있는 GM 본사 건물마저 매각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자원가격 폭등에 이은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에 타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업종 전반에 걸쳐 재편 압력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9월 15일’ 이후 미국에서는 여러 업종의 기업이 사업재편과 자본증강에 혈안이 되고 있다. 적자가 이어지고 있는 유력 반도체 회사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스(AMD)는 투자 부담이 무거운 생산부문을 분리해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계열 투자회사의 추가 출자를 받을 예정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도 금융의존(순이익의 절반)을 벗어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워런 버핏의 출자를 요청했다. 일본이 금융불안과 디플레이션에 빠졌던 지난 90년대 후반 닛산자동차 등 일본 기업들이 해외에서 출자 받은 사례들이 재현되는 모습이다. 당시에 비해 일본 기업들은 자금 여유가 있는 편이다.
크라이슬러와의 합병을 GM에 강권하고 있는 미 투자펀드 서버러스 캐피털 매니지먼트는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닛산자동차-르노 연합과의 교섭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조사기관 톰슨 로이터에 따르면 미 주요 500개사의 올 3분기(7~9월)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4.8% 감소해 5분기 연속 줄어들 전망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경기침체 우려를 경고하면서 현재 6.1%인 실업률이 9%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강 도요타자동차도 미 금융불안으로 미·일·유럽에서 판매가 부진하고 신흥개도국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자 마침내 올해 실적 예상치를 내리기로 했다.
지난 9월 15일 도요타자동차 사장을 비롯한 간부 60명이 하마마쓰시의 연수시설에 비밀리에 모였다. 사업 환경이 격변하는 가운데 경영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연초 도요타는 “한류와 난류가 바뀌고 있다”는 표현을 썼는데 최근에는 훨씬 강한 톤인 “시대가 변했다”고 했다. 일등기업 도요타도 위기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도요타가 이익의 절반을 버는 미국 시장이 지난 6월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해 최근에는 불황이 본격화한 기분이다. 니혼게이자이에 의하면 도요타의 6월 판매는 21% 감소했고, 그 후도 계속 떨어져 9월에는 32%나 줄었다. 혼다, 닛산자동차도 두 자릿수 감소를 보였다. ‘미국세’와 ‘대형차’로 대표되던 미국 시장이 ‘일본세’와 ‘소형차’로 바뀌더니 이제는 일본세마저 경기감속의 역풍을 맞고 있다.
10월 1일 도요타는 무이자 대출 판매 캠페인을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본격적인 무이자 판매는 2001년 이래 처음이다. 무이자는 도중에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도요타로서도 늘어나는 재고에 어쩔 수 없이 취한 비상수단이다. 스즈키자동차의 스즈키 오사무 회장은 “기책(奇策)은 없다. 부품 한 개에 1엔씩 싸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 금융위기처럼 자동차 수요 부진도 미국에서 세계로 넓어지고 있다. 고성장을 해 온 중국과 인도 시장도 8월부터 전년 수준 이하로 떨어졌고 9월 들어 더 심해지자 도요타 중국공장은 감산에 들어갔다. 자동차는 일본 제조업의 20%, 취업인구의 8%를 차지하는 기간산업이다.
선두주자 도요타가 삐걱대면 부품, 소재 메이커가 흔들리고 고용이 곧바로 타격을 받는다. 도요타 공장에서 일하는 기간직 종업원도 반 년 새 20% 줄었다. 도요타 본거지인 아이치현의 올해 세수는 1000억엔(약 1조원) 이상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지난해 적자가 40조원을 넘어 주가가 한때 60% 이상 빠진 GM에 비하면 도요타의 재무기반은 단단한 편이다.
세계 제조업에서도 톱 클래스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차 메이커의 경영이 기로에 서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일본의 경제 전문가들은 “15년 전 버블붕괴 이후 맞는 시련을 어떻게 타고 넘을 것인가. 이것은 일본 제조업 전체에 던져진 질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볼보는 6000명 구조조정
세계 고급차 시장에서 상위를 지켜온 독일 차들도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최대 업체인 BMW의 9월 세계 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 14.6% 감소한 12만1600대로 내려앉았고, 2위인 다임러도 2% 준 12만2200대를 기록했다. 지역별로 보면 미국에서 BMW는 25.8%, 다임러는 8.5% 각각 줄었다. 미 포드 산하에 있는 볼보 카즈(스웨덴)는 최근 4000명의 추가 삭감을 발표했다.
이미 발표한 2000명을 합치면 전체의 25%가 나가게 된다. 호주는 사정이 더 심각하다. 완성차 업체들이 시작한 구조조정 바람이 자동차 부품업체들에도 불고 있다. 부품업체들은 내수침체로 내년까지 7000명 이상의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업계는 자동차 관련 세금을 대폭 줄이고 최대 8000만 호주 달러(약 694억원)의 긴급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촉구했다.
정부도 지체 없이 지원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컴퓨터와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등에 사용하는 반도체 메모리의 하락 기조도 역력하다. 수요가 줄자 공급이 넘쳐 가격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개인용 컴퓨터용 D램은 1개월 새 24%, 낸드형 플래시 메모리는 45% 내렸다. 반도체 회사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판매를 앞두고 생산량을 늘려왔는데 수요가 당초 예상을 밑돌자 공급이 넘쳐, 가격 교섭에서 수요자 측이 우위에 서게 됐다.
컴퓨터는 특히 유럽과 아시아 두 시장에서 수요세가 꺾였다. 일본 엘피다 메모리와 하이닉스는 9월부터 잇따라 감산하고 있으나 시장에서는 2~3개월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메모리 시황 부진은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 실리콘밸리의 경기 진단가들은 “IT 등 첨단기술 업체들은 비용을 최대한 줄여 가면서 경기 하락세가 길어질 것에 대비한 장기적 전략에 치중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선진기업 가운데는 불황 대책으로 기업위기관리(ERM)라는 전사적인 리스크 관리에 나서는 곳이 늘고 있다. 지금까지 위기관리는 기업조직이 피라미드형이기 때문에 피라미드 구조에서 생각해 왔다. 문제는 이런 피라미드 조직은 부문마다 벽을 치고 있어 불투명한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ERM은 이런 벽을 깨고 전체적으로 가장 적합한 리스크 관리를 하는 것이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사고나 불상사가 많아진다는 통계가 있듯이 ERM은 기업의 사고· 불상사 대책뿐 아니라 불황 대책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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