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대통령 찾아가 인력 수출 부탁
![]() ![]() 월남으로 파견갔던 기술자들이 1968년 귀국하고 있다. |
남의 나라에 가서 돈을 벌어온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 주머니의 돈을 내 주머니로 빌려서 넣기도 온갖 머리를 써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다급한 현안이 경제부흥이고 정부의 독려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익창출이 기업의 최종 목표라 하더라도, 머나먼 월남 시장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어지간한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수의계약을 위해 조중건 상무는 미군사령부의 계약관 교체를 시도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젊어서 그랬는지 그는 계약관 교체 요구가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 조 상무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미군에서는 미군 인사 발령을 한국인 찰리 조가 낸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그것이 한국군사령부와 우리 대사관에도 전해진다면 한진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의계약을 했다면 원청사는 미군이 됩니까?
“원청과 하청의 개념이 아니지요. 우리 단독계약인데 따지자면 미군이 원청사가 되지만 미군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 맡아서 해주는 직영회사가 되는 셈이에요. 건설을 한 사람들은 미국의 RNK라고 미국의 건설업체 하청을 했지만. 그러니까 우리 경우는 미국하고 직접 원청 계약을 해서 우리가 직영을 했기 때문에 하청에 따른 시끄러운 건 없었어요. 인력도 자체적으로 전부 모집을 하고. 우리가 주로 했던 일은 수송을 중심으로 트럭을 우리가 사서 운전, 정비, 하역장비 등을 계약하고 물건은 뭐가 어느 위치에 얼마가 있다 하는 검사요원들까지 우리가 배치하는 것이지요.”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벌써 40년이 넘은 지금에서 되돌아봐도 조중훈 회장이 월남과 미국을 위해 은연중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던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코멘트가 조 상무 얘기 속에서 나오고 있는 셈이었다. 자유 월남을 지키고, 탄약과 군수물자를 긴급 수송해 미군의 승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본 인프라를 조 회장은 한진 스스로 갖추도록 지시했다는 뜻이었다.
-100일 이내에 모든 준비를 갖추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사이에 준비는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게 정말 우리 회장이 할 일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때까지 수송은 전문업체였지만 하역은 경험도 전문지식도 없었어요. 그래 가지고 나로서는 한두 번 들어갔나? 거의 월남에 있으면서 회장하고 연락만 하는데, 회장한테 긴급히 알렸지요. 문제는 하역이다, 회장이 해결을 해줘야 되겠다고. 근데 회장이 그때는 하역장비도 모르고 하역작업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직접 잠바 걸쳐 입고 인천에 나가서 하역하는 걸 살펴보고 배우는 겁니다. 일본 요코하마에도 가서 도대체 하역이 무엇인지 견문을 넓히고. 나는 또 100일 동안에 해결 못하면 페널티를 물어야 되니까 일본 회사, 미국 회사들을 쭉 조사해서 하역장비들을 발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미국 회사는 장비 주문을 하면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간만 100일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걸 월남까지 수송해 온다고 하면 또 한 달 이상 걸릴 거 아니오. 큰일 났어요.”
조 상무로서는 당장 하역장비부터 속을 태웠다고 했다. 주문에서 생산까지, 그리고 월남으로 이동하려면 아무리 계산을 해도 약속했던 100일 안에 모두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큰소리치면서 제안서를 냈던 것이 아찔할 정도로 막막했고, 또 회장에게 긴급 타전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계산을 해보니까 약속을 못 지켜 40여만 달러 변상을 하게 생겼는데, 돈도 돈이지만 첫 사업부터 신용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알아보지도 않고 제안서부터 낸 것이 경솔했다 싶기도 하고 낙담도 되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겁니다. 누워 있으면 박정희 대통령과 장기영 부총리한테 우리 회장이 질책을 듣는 것도 상상이 되고, 미치겠어. 부사령관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고 워커 중령 그 녀석도 비웃는 것 같고 말이지. 근데 우리 회장이 참 빨라요. 형이지만 그때 회장을 진짜 다시 봤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오사노 겐지라는 일본의 유명한 경제인이 있습니다. 그 양반이 이스즈(ISUZU) 자동차 대주주인데 우리가 한국에서 버스사업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그분한테 회장이 직접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랬더니 일본 사람이 주문해 놓은 걸 오사노 겐지 그분이 웃돈을 주고 우리한테 빼주더라는 거지요. 그걸 아무나 할 수 있어요? 나는 속만 타들어갔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 걸 볼 때 아무나 회장 하는 게 아니구나 싶고, 회장이 가만 보면 결정적일 때 꼭 힘을 써요. 그러니까 그만한 인맥과 인덕이 있었던 거예요.”
“혁명주체 20명 회장에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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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계약을 해놓고 시동을 걸려니까 이건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게 없어요. 노무자를 데려온다는 게 또 걸림돌이야. 현지에서는 누가 베트콩인지 모르니까 아예 모집을 할 수가 없는 거고, 더구나 1달러라도 우리 국민이 벌도록 해야 하니까 국내에서 데려와야 되겠는데,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모집 자체가 힘들게 돼 있는 겁니다. 해외에 나가서 하는 사업 아닙니까. 당시만 해도 여권을 만들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더라 그거지요. 그런 걸 보면 정부가 참 답답한 것이, 입만 열면 애국하자, 달러를 벌어와야 된다고 하면서 대문을 걸어두고 있는 꼴이니 말이지. 해외로 돈 벌기 위해 나간다는데 그까짓 여권 만드는 게 뭘 그렇게 제약이 많고 까다로워야 됩니까. 6·25 때 부역 나간 사람이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돼. 그땐 그랬다구요. 그래서 다급하니까 우리 회장한테 박 대통령을 찾아가라고 했지요.”
-조 회장님이 박 대통령과 정책적인 문제를 건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때 이미 가까이 있었다는 겁니까?
“펜타곤 갔다 와서 정부 보증도 받아냈으니까 우리 회장도 박 대통령 열정을 잘 알잖아요. 기업하는 사람이 정치인들하고 가깝다고 말하면 사회가 이상해서 정경유착부터 먼저 떠올리는데, 그 당시는 그게 아니에요. 박 대통령이 얼마나 경제부흥에 전념했습니까. 매일 건설현장 체크하고 매일 기업들이 달러 벌어올 수 있도록 하라고 경제부처 독려하고. 그런 차원이라구요. 솔직히 한진 입장에서는 월남 진출이 사운을 건 도전이었지만 회장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집념 때문에 진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마음이 반은 됐을 겁니다. 그 정도로 박 대통령은 모든 기업들을 독려했고 우리 회장은 회장대로 국가관이 깊었으니까 통하는 게 있었지요. 물론 5·16 이후에 내가 박 대통령을 비롯해 JP(김종필)부터 박종규씨까지 혁명주체 20여 명을 우리 회장한테 소개를 한 적이 있고, 같이 술좌석에도 참석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어른의 집념을 누구 못지않게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워낙 급했으니까 대통령을 찾아가라고 한 거예요.”
조 상무는 정부의 움직임까지는 모르고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정부는 이미 65년 3월, 당시의 내각조정실 김좌겸 차장, 엄익호 상공부 공업2국장, 강중경 국방부 과장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사이공에 파견해 시장조사를 하면서 인력수출에도 대비하고 있었다. 정부는 65년 월남 수출 목표액을 1400만 달러로 책정해 놓고 있었지만 김좌겸 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그들의 조사보고서대로 만약 미군의 지상 장비들을 정비한다거나 수송, 하역, 보관 등을 위한 기술자 파견이 가능하다면 외화 획득이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까지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시장보고서가 긍정적으로 나오자 힘을 얻은 정부는 한·월 간의 ‘경제각료회의’를 제안하고 1차 회의를 거쳐 66년 1월 11일부터 3일간 사이공에서 2차 경제각료회의를 열어 장기영 부총리를 수석대표로 해서 원용석 무임소장관, 김정렴 상공차관, 그리고 월남정부에서 트롱 타이톤 경제장관과 부서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송 문제까지 거론하며 외화 가득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특정업체 한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수송이라면 당시로서는 한진밖에 마땅한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들어도 한진을 거론한 셈이었고, 더구나 한진은 정부가 기대하는 외화획득 기업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만큼 한진이 수혜를 입을 것은 분명했다.
-박 대통령과 조 회장님이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습니까?
“5·16 직후지요. 그 당시 혁명주체들이 회의를 하려고 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어 자하문에 있던 우리 회장 별장에서 자주 모였어요. 그때만 해도 자하문 그쪽은 벌판인데 돌담을 만들고 근사하게 별장을 지어놓으니까 미군들이 선물한 양주도 있지, 고기도 있지, 곧잘 모인 거지요.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경제 문제로 고민하시는 걸 많이 들었을 거 아닙니까. 우리 회장이 또 자기는 웃지도 않고 남을 웃기는 입담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하. 그러니까 친해지지. 내가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미국 포병학교에 있을 때 박 대통령하고 같이 생활했잖아요. 그분이 일본말로 하면 마지매(眞面目·진지하고 성실함)예요. 선생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날 아주 아껴주셨거든. 하여간 그래 가지고 우리 회장이 박 대통령도 만나고 장기영씨도 찾아가고, 장기영씨가 무척 도와줬다고 들었지만 좌우간 막 서둘러서 결국 인력수출은 통과가 됐어요. 그 덕분에 기술자, 운전수, 하역인부들까지 우리가 전부 모집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부터 불이 붙는 겁니다.”
미 포병학교서 박 대통령과 생활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다. 66년 이 당시에는 이미 해외개발공사가 설립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65년 10월 6일 보사부의 감독을 받는 ‘한국 해외진출진흥회’가 설립됐다. 같은 해 11월 3일 재단법인으로 개편돼 76년 4월에 ‘해외개발공사’로 명칭이 바뀌지만 이미 해외진출진흥회 설립 첫해부터 미국 벡텔사와 알코사에 불도저 기술자 3000명의 인력을 수출해 왔듯이 설립 목적은 명칭이 바뀌기 전이라도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한진의 인력수출은 정부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으면서도 제동이 걸렸을까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벡텔과 알코사에 보낸 인력은 기술자들이었고 한진은 주로 단순 노동력이었다는 것뿐인데. 그러나 그런 차이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한국인 노무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비로소 정부가 왜 여권 발급에 제동을 걸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내막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조 상무는 여권 발급에 필요한 신원 문제를 언급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여권을 내주기가 어렵다면 해당자만 제외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에 여권 발급이 원인은 아니었다. 정부는 사실상 냉가슴을 앓고 있었지만 이유가 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언급됐지만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될 때 해외개발공사(해외진출진흥회)를 통해 외국회사로 취업 나간 기술자들은 1인당 500달러의 계약이었다.
기술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정보조직 모집이 최저 월급 375달러였고 어떤 외국회사는 최고 1000달러라는 안내문까지 붙여 놓았다. 그런데 회사마다 임금이 들쭉날쭉하긴 했지만 한진은 얼마가 될지 의문이었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 업체에 진출한 한국인 기술자들과 한국 업체에 진출한 기술자들이 똑같은 월남에서 일을 할 때 정부는 임금과 수당 차이 때문에 심각한 마찰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정부가 달러를 많이 벌어들일 수 있는 기업으로 한진을 선두기업으로 분류하면서도 한진의 임금 수준 때문에 인력수출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계속>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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