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시대의 향수를 팔다
쇼와 시대의 향수를 팔다
쇼와 거리의 전형적인 쇼와 시대 건물. |
오이타현 분고타카다(豊後高田)시 쇼와(昭和) 거리에 자리 잡은 오즈루라디오전기상회. 쇼와 30년대를 재현한 이 거리에서 마주친 낯익은 소니 로고가 기자의 발길을 유인했다. 진열장엔 쇼와 시대에 만들어진 냉장고, 세탁기, 흑백 텔레비전이 전시돼 있었다. 쇼와 시대의 풍요를 상징하는 이른바 일본의 3종 신기.
70년대 우리나라 전파상을 연상케 하는 외관과 달리 가게 안엔 흔한 전기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가게 주인은 “쇼와 30년대의 향수를 느끼는 관광객들이 들어와 대화를 하다 간다”고 말했다. 쇼와 시대인 1954년 정촌(町村) 합병으로 1시 2정으로 개편됐던 분고타카다 지역은 이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2005년 분고타카다시로 통합된다.
인구는 2만5000여 명. 농촌 지역으로, 일본에서 인구 감소 지역의 전형으로 꼽히는 곳이다. 한때는 교통 중심지였지만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위축됐다. 대형 점포들은 교외로 빠져나갔다. 쇼와 30년대에 분고타카다가 자리 잡고 있는 구니사키(國東) 반도에서 가장 번화했던 시내 중심가는 개와 고양이만 남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퇴락했다.
인구는 계속 줄어 전국에서 아홉 번째로 인구가 적은 시로 추락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마을 주역들이 나섰다. 상인들이 앞장서자 상공회의소가 코디네이터 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시청이 후견인을 떠맡았다. 마을의 얼굴인 중심가를 되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방향성은 현대화가 아니라 쇼와 시대로의 복귀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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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시대는 이들 상가가 번영했던 마지막 시대였다. 쇼와 30년대는 그 정점으로 일본이 막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때다. 그에 앞서 1998년과 그 이듬해 분고타카다시는 전국적으로 쇼와 30년대를 재현한 사례를 수집했다.
신요코하마 라면박물관을 비롯해 100곳은 직접 찾아갔다. 이런 분석을 토대로 시는 쇼와 30년대 붐이 전국을 휩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쇼와 거리를 조성하면 경쟁력 있는 거리로 환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외벽을 리모델링하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았다. 쇼와 시대를 재현한 상점엔 ‘일점일보’(一店一寶)라 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보물을 전시하도록 했다. 3종 신기가 그 예. 아직 박물관으로 향할 때는 안 됐지만 쇼와 시대를 전해 주는 생활 유품들이다. 일점일품(一店一品)이라 하여 쇼와 시대 물건도 판다.
고로케를 파는 집도 있다. 교외의 대형 매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쇼와 시대의 명품들이다. 올해 서른여덟인 마쓰다는 쇼와 거리에서 130년 역사의 센베이 과자를 판다. 인근에 센베이 공장이 있다고 했다. 부인의 고향이라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는 그는 관광과 직접 관계없는 상인들의 사정은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다고 귀띔했다.
상인들은 쇼와 시대 상인의 모습도 재현했다. 마음을 열고 고객과 눈을 맞췄던 그 시대의 상인상을 복구해 낸 것이다. 소바 떡집 여주인 기요스에 모토코(44)는 “쇼와 시대 상점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 뿐 아니라 대화하기 위해서도 들르던 곳”이라고 말했다.
쇼와 시대 소니제품을 진열한 전기상회. |
키워드는 건물·역사·상품·상인
쇼와 시대의 건물, 역사(일점일보), 상품(일점일품), 상인. 이 네 가지는 쇼와 거리 재현의 키워드다. 총 연장 500m의 거리에 이런 요소들을 내장한 상점 100개가 자리 잡은 곳이 쇼와 거리다. 주민들은 그러나 관광객을 유치하기에는 이들 상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무언가 거점이 될 만한 시설이 필요했다.
상가에서 멀지 않은 다카다 농업창고가 발탁됐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이타현의 갑부였던 노무라 재벌이 1935년에 지은 건물. 6500만 엔을 들여 이 창고를 보수한 후 ‘로만 창고’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다가시야 꿈의 박물관(2002년), 레스토랑 순사이미나미구라(2006년), 쇼와 꿈의 마을 3초메관(2007년)을 잇따라 개관했다.
쇼와 그림책 미술관도 생겼다. 다가시야 꿈의 박물관엔 쇼와 시대 유물이 전시돼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우주소년 아톰도 있었다. 시는 박물관장으로 인근 후쿠오카시에서 막과자 가게를 운영하던 고미야 히로노부(小宮裕宣)를 영입했다. 25년 동안 20만 점에 이르는 쇼와 시대 상품을 모은 수집광.
박물관에서 만난 고미야는 “쇼와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그리움을 되찾아주고 쇼와를 모르는 사람에겐 새로움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쇼와 거리의 상품성은 쇼와 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다. ‘아 옛날이여’ 앞에 사람들은 무장해제 됐다. 향수에 기대어 새로운 관광자원을 개발해 낸 것이다.
중앙공원을 끼고 있는 극장 ‘쇼와좌’엔 ‘하이눈’과 ‘로마의 휴일’ 영화 간판이 걸려 있다. 간판에 ‘하이눈’은 쇼와 27년 작, ‘로마의 휴일’은 쇼와 29년 작이라고 적혀 있었다. 외관은 극장이지만 내부는 가라스펜이라는 회사였다. 상가 활성화 계획인 쇼와 거리 정책이 관광객까지 끌어들이자 분고타카다시 관광지역 만들기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이 회사가 주축이 돼 여행사를 상대로 마케팅 활동을 벌였다. 이들 여행사가 다가시야 꿈의 박물관을 둘러보는 관광상품을 개발했다. 나가미쓰 히로후미 분고타카다 시장은 첫 관광버스가 들이닥쳤을 때의 감격을 기자에게 들려줬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고로케나 아이스캔디를 먹으면서 쇼와 거리를 누볐다.
단체여행객들이 찾자 보도진이 따라붙었다. 언론에 보도되자 시찰단이 줄을 이었다. 돌아다니는 것은 개와 고양이뿐이라던 거리에 관광객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노다 요우지(野田洋二·60) 분고타카다시 관광지역 만들기 주식회사 대표는 “쇼와 거리의 타깃 고객은 쇼와 30, 4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라고 말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쇼와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은 저마다 다르죠. 당시 풍경일 수도 있고 사람 사이의 정일 수도 있어요.”
오쓰카 히토시(大塚仁) 상점가 돌아보기 실행위원회 대표는 “교토에서 온 한 게이샤가 이곳이 더 쇼와 시대 같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쇼와 거리는 지방도시 재건의 성공 사례로 주목 받고 있다. 2006년엔 JTB교류문화상 우수상을 받았다. 지난해 봄 일본 총리실은 쇼와 거리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분고타카다시 중심 시가지 활성화 기본계획을 승인했다.
우에다 가쓰미 분고타카다시 상공관광과 계장은 “쇼와 거리는 남아 있는 건물을 활용해 그 시대를 재현한 것이라 모방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쇼와 거리에 대해서는 상가 활성화 대책이다 보니 관광자원화가 미진하다는 평가도 있다. 관광 콘텐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관광객의 체류 시간이 짧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은 보통 1시간에서 1시간30분 가량 머물고 인근의 벳푸나 유후인으로 발길을 돌린다.
지역 개발 어떻게 이뤄냈나 상인·상공회의소·시청이 공동출자 회사 만들어 분고타카다시 지역 개발은 민·관 협력 모델의 성공 사례다. ‘쇼와 30년대’를 테마로 지역을 활성화하는 데 모든 경제 주체가 적극 참여했다. 이 점을 첫 번째 성공 요인으로 꼽을 만하다.‘쇼와 거리’는 본래 상인들이 위기의식에서 시작한 상점가 부흥운동이었다. |
쇼와 시대를 재현한 극장에 걸린 영화 ‘로마의 휴일’ 간판. |
분고타카다시는 체류형 관광지로 ‘비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비전은 분고타카다의 관광자원을 패키지화한 ‘구니사키 천년 로만’. 지역 산업인 소바(메밀) 재배와 연계한 상품도 개발됐다. 소바 생산지를 둘러보고 이곳에서 생산된 소바를 맛보도록 했다. 나가미쓰 분고타카다 시장은 체류형 관광의 대안으로 불교문화 관광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분고타카다가 있는 구니사키 반도는 ‘부처의 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구니사키 반도는 중세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 멀지 않은 곳에 온천도 여섯 곳 있죠. 올해 들어 지역 활성화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시내를 관통하는 가쓰라강 동쪽 지역에서 마을 살리기의 일환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죠. 소바 집이 있는 고령자를 위한 마을로 만들려고 합니다. 체류형 관광객을 유인하려면 기본적으로 광역이라야 합니다. 히메시마무라 등 이웃 마을과 손잡고 이틀 정도 묵고 가는 마을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분고타카다는 아직은 외국인에게 친숙한 도시가 아니다. 분고타카다에서 기자가 묵은 호텔 세이쇼는 시내에서 비자카드로 숙박비를 결제할 수 있는 유일한 호텔이다. 투숙객을 위한 안내문 중 영문으로도 인쇄된 것은 ‘폭력 행위를 금한다’는 내용뿐이었다. 정작 투숙객이 알아야 할 숙박 약관, 대피로, 세탁 서비스 등은 일본어로만 안내돼 있었다.
나가미쓰 시장은 기자의 이런 지적에 대해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시계(市界)에 자리 잡고 있는 온천 료칸(旅館)에 묵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쇼와 거리의 한계는 쇼와 시대를 기억하는 세대와 운명을 같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세대를 대체할 관광객들이 전 세대처럼 쇼와 거리를 찾을지는 미지수다. 지속 가능한 관광은 쇼와 거리로서도 화두인 셈이다.
인터뷰 나카마쓰 히로후미 분고타카다 시장 “의구심 있었지만 기적 만들어”
나카마쓰 히로후미(永松博文) 분고타카다 시장은 “연간 36만 명이 다녀가는데 관광지로서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용 전세 버스가 처음 들이닥쳤을 때, 카메라를 든 방송기자들이 취재차 처음 이 작은 도시를 찾았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는 듯했다. - 쇼와 거리를 다녀간 사람들의 만족도는 어느 수준입니까? “절반은 만족스러워하고 나머지 절반은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역 개발로는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관광지로서는 계속 분발해야 합니다. 사실 쇼와 시대는 가까운 과거라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구경거리라면 에도무라와 메이지무라 쪽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죠. ‘일점일품(一店一品)’ 등을 시찰하러 오거나 아시아 국가에서 벤치마킹하러 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 어떻게 해서 쇼와 거리를 조성하게 됐습니까? “쇼와 30년대 후반 들어 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상가는 완전히 문을 닫게 생겼죠. 당시 다른 지역에서 에도 상점가나 메이지 상점가를 만들어 지역을 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고타카다는 메이지 시대는 물론 다이쇼 시대에도 번성했던 지역이 아닙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상공회의소를 주축으로 연구 모임이 생겨났고, 전국 각지를 답사했습니다. 그런데 쇼와 시대를 활용해 지역 개발을 시도하는 곳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도 쇼와 거리를 조성해 마을을 되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죠.” - 왜 쇼와 거리였습니까? “우리 시는 다이쇼 시대 후기에서 쇼와 시대 초기에 걸쳐, 특히 쇼와 30년대에 크게 번성했던 지역입니다. 많은 건물이 파라페트(옥상 난간벽)로 보수만 하면 쇼와 시대 건물로 단장할 수 있는 상태였죠. 그래서 건물을 보수하고 간판을 갈았습니다.” - 분고타카다에 앞서 쇼와 시대를 재현한 거리는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도쿄의 오메시와 또 어느 한 곳에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재현한 거리 자체가 짧아 쇼와 거리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 쇼와 거리 조성에 반대한 사람도 있습니까? 쇼와 거리 조성 과정에서 이견을 어떻게 조정해 나갔습니까? “극렬한 반대자는 없었지만, 협력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작은 마을에서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도로 확장 공사가 있었는데 보상금을 받고 가게를 그만둔 사람도 몇 명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쇼와 거리 조성 첫해에 상점 7곳이 참여했습니다. 비용은 현과 시 그리고 본인이 각각 3분의 1씩 부담했죠. 파라페트로 보수하는 비용은 많이 안 들었어요. 그러나 다른 지역은 전부 개조해야 했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카마쓰 시장은 분고타카다 출신이다. 오이타현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상공노동관광부 산업진흥과장, 도쿄사무소장, 상공노동관광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 처음 시장에 선출됐고 재선에 성공해 2기째 시정을 맡고 있다. - 쇼와 30년대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향수를 느끼나요? “쇼와 30년대는 산업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죠. 쇼와 3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리워서 찾고, 젊은 사람들은 호기심에서 쇼와 거리를 찾습니다. 일종의 돈 안 드는 테마파크인 셈이죠” - 시민사회와 시 정부가 어떻게 협력해야 한다고 봅니까? “시민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시의 경우 저와 상공회의소 회장, 그밖에 두 사람이 일일이 상점을 찾아다니며 설명했습니다. 시 공무원이 할 일과 시민이 할 일은 따로 있어요. 시민들이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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