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쇼와 시대의 향수를 팔다

쇼와 시대의 향수를 팔다


쇼와 거리의 전형적인 쇼와 시대 건물.

오이타현 분고타카다(豊後高田)시 쇼와(昭和) 거리에 자리 잡은 오즈루라디오전기상회. 쇼와 30년대를 재현한 이 거리에서 마주친 낯익은 소니 로고가 기자의 발길을 유인했다. 진열장엔 쇼와 시대에 만들어진 냉장고, 세탁기, 흑백 텔레비전이 전시돼 있었다. 쇼와 시대의 풍요를 상징하는 이른바 일본의 3종 신기.

70년대 우리나라 전파상을 연상케 하는 외관과 달리 가게 안엔 흔한 전기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가게 주인은 “쇼와 30년대의 향수를 느끼는 관광객들이 들어와 대화를 하다 간다”고 말했다. 쇼와 시대인 1954년 정촌(町村) 합병으로 1시 2정으로 개편됐던 분고타카다 지역은 이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2005년 분고타카다시로 통합된다.

인구는 2만5000여 명. 농촌 지역으로, 일본에서 인구 감소 지역의 전형으로 꼽히는 곳이다. 한때는 교통 중심지였지만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위축됐다. 대형 점포들은 교외로 빠져나갔다. 쇼와 30년대에 분고타카다가 자리 잡고 있는 구니사키(國東) 반도에서 가장 번화했던 시내 중심가는 개와 고양이만 남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퇴락했다.

인구는 계속 줄어 전국에서 아홉 번째로 인구가 적은 시로 추락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마을 주역들이 나섰다. 상인들이 앞장서자 상공회의소가 코디네이터 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시청이 후견인을 떠맡았다. 마을의 얼굴인 중심가를 되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방향성은 현대화가 아니라 쇼와 시대로의 복귀로 결정됐다.

쇼와 거리 5가지 성공 비결
1. 긴밀한 민·관 협력
2. 경제 주체들의 높은 참여의식
3. 모방할 수 없는 지역 고유의 개성 발굴
4. 거점시설 확보 및 지속적인 운영 시스템 개선
5. 쇼와 시대 붐을 활용한 마케팅
남아 있는 건물의 70%가 쇼와 30년대 이전에 지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리모델링 첫해인 2001년 9개 상점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2008년 현재 모두 38개 상점이 쇼와 시대 건물로 변신했다.

쇼와 시대는 이들 상가가 번영했던 마지막 시대였다. 쇼와 30년대는 그 정점으로 일본이 막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때다. 그에 앞서 1998년과 그 이듬해 분고타카다시는 전국적으로 쇼와 30년대를 재현한 사례를 수집했다.

신요코하마 라면박물관을 비롯해 100곳은 직접 찾아갔다. 이런 분석을 토대로 시는 쇼와 30년대 붐이 전국을 휩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쇼와 거리를 조성하면 경쟁력 있는 거리로 환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외벽을 리모델링하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았다. 쇼와 시대를 재현한 상점엔 ‘일점일보’(一店一寶)라 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보물을 전시하도록 했다. 3종 신기가 그 예. 아직 박물관으로 향할 때는 안 됐지만 쇼와 시대를 전해 주는 생활 유품들이다. 일점일품(一店一品)이라 하여 쇼와 시대 물건도 판다.

고로케를 파는 집도 있다. 교외의 대형 매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쇼와 시대의 명품들이다. 올해 서른여덟인 마쓰다는 쇼와 거리에서 130년 역사의 센베이 과자를 판다. 인근에 센베이 공장이 있다고 했다. 부인의 고향이라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는 그는 관광과 직접 관계없는 상인들의 사정은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다고 귀띔했다.

상인들은 쇼와 시대 상인의 모습도 재현했다. 마음을 열고 고객과 눈을 맞췄던 그 시대의 상인상을 복구해 낸 것이다. 소바 떡집 여주인 기요스에 모토코(44)는 “쇼와 시대 상점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 뿐 아니라 대화하기 위해서도 들르던 곳”이라고 말했다.

쇼와 시대 소니제품을 진열한 전기상회.



키워드는 건물·역사·상품·상인

쇼와 시대의 건물, 역사(일점일보), 상품(일점일품), 상인. 이 네 가지는 쇼와 거리 재현의 키워드다. 총 연장 500m의 거리에 이런 요소들을 내장한 상점 100개가 자리 잡은 곳이 쇼와 거리다. 주민들은 그러나 관광객을 유치하기에는 이들 상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무언가 거점이 될 만한 시설이 필요했다.

상가에서 멀지 않은 다카다 농업창고가 발탁됐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이타현의 갑부였던 노무라 재벌이 1935년에 지은 건물. 6500만 엔을 들여 이 창고를 보수한 후 ‘로만 창고’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다가시야 꿈의 박물관(2002년), 레스토랑 순사이미나미구라(2006년), 쇼와 꿈의 마을 3초메관(2007년)을 잇따라 개관했다.

쇼와 그림책 미술관도 생겼다. 다가시야 꿈의 박물관엔 쇼와 시대 유물이 전시돼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우주소년 아톰도 있었다. 시는 박물관장으로 인근 후쿠오카시에서 막과자 가게를 운영하던 고미야 히로노부(小宮裕宣)를 영입했다. 25년 동안 20만 점에 이르는 쇼와 시대 상품을 모은 수집광.

박물관에서 만난 고미야는 “쇼와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그리움을 되찾아주고 쇼와를 모르는 사람에겐 새로움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쇼와 거리의 상품성은 쇼와 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다. ‘아 옛날이여’ 앞에 사람들은 무장해제 됐다. 향수에 기대어 새로운 관광자원을 개발해 낸 것이다.

중앙공원을 끼고 있는 극장 ‘쇼와좌’엔 ‘하이눈’과 ‘로마의 휴일’ 영화 간판이 걸려 있다. 간판에 ‘하이눈’은 쇼와 27년 작, ‘로마의 휴일’은 쇼와 29년 작이라고 적혀 있었다. 외관은 극장이지만 내부는 가라스펜이라는 회사였다. 상가 활성화 계획인 쇼와 거리 정책이 관광객까지 끌어들이자 분고타카다시 관광지역 만들기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이 회사가 주축이 돼 여행사를 상대로 마케팅 활동을 벌였다. 이들 여행사가 다가시야 꿈의 박물관을 둘러보는 관광상품을 개발했다. 나가미쓰 히로후미 분고타카다 시장은 첫 관광버스가 들이닥쳤을 때의 감격을 기자에게 들려줬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고로케나 아이스캔디를 먹으면서 쇼와 거리를 누볐다.

단체여행객들이 찾자 보도진이 따라붙었다. 언론에 보도되자 시찰단이 줄을 이었다. 돌아다니는 것은 개와 고양이뿐이라던 거리에 관광객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노다 요우지(野田洋二·60) 분고타카다시 관광지역 만들기 주식회사 대표는 “쇼와 거리의 타깃 고객은 쇼와 30, 4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라고 말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쇼와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은 저마다 다르죠. 당시 풍경일 수도 있고 사람 사이의 정일 수도 있어요.”

오쓰카 히토시(大塚仁) 상점가 돌아보기 실행위원회 대표는 “교토에서 온 한 게이샤가 이곳이 더 쇼와 시대 같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쇼와 거리는 지방도시 재건의 성공 사례로 주목 받고 있다. 2006년엔 JTB교류문화상 우수상을 받았다. 지난해 봄 일본 총리실은 쇼와 거리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분고타카다시 중심 시가지 활성화 기본계획을 승인했다.

우에다 가쓰미 분고타카다시 상공관광과 계장은 “쇼와 거리는 남아 있는 건물을 활용해 그 시대를 재현한 것이라 모방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쇼와 거리에 대해서는 상가 활성화 대책이다 보니 관광자원화가 미진하다는 평가도 있다. 관광 콘텐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관광객의 체류 시간이 짧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은 보통 1시간에서 1시간30분 가량 머물고 인근의 벳푸나 유후인으로 발길을 돌린다.

지역 개발 어떻게 이뤄냈나
상인·상공회의소·시청이 공동출자 회사 만들어

분고타카다시 지역 개발은 민·관 협력 모델의 성공 사례다. ‘쇼와 30년대’를 테마로 지역을 활성화하는 데 모든 경제 주체가 적극 참여했다. 이 점을 첫 번째 성공 요인으로 꼽을 만하다.‘쇼와 거리’는 본래 상인들이 위기의식에서 시작한 상점가 부흥운동이었다.

그런데 행정 당국이 뛰어들면서 지역 개발 정책으로 발전했다. 그런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민간주도형이지만 행정이 뒷받침된 민·관 협력 케이스로 볼 수 있다. 결국 민간단체, 상점 주인, 상공회의소, 시청 등이 비슷한 비중으로 지역 개발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구 2만6000명의 작은 도시가 행정적 도움 없이 민간의 힘만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역 개발을 이뤄 내기란 쉽지 않다. 두 번째로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분고타카다만의 개성을 만들어 냈다. 지역 활성화 착수에 앞서 분고타카다만의 고유한 매력을 찾기 위해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다.

마침내 ‘쇼와 30년대’ 재현이란 지역 활성화 컨셉트를 설정했다. 1994년 신요코하마 라면박물관 개관을 기점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쇼와 붐이 일고 있었다. 쇼와를 테마로 한 테마파크가 생겼고, 쇼와 시대 거리를 재현한 곳이 전국적으로 100개가 넘었다. 분고타카다는 현존하는 상점 건물의 70% 이상이 쇼와 이전 시대에 지어졌다는 데 착안했다.

쇼와 30년대를 재현했을 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도심을 재개발할 것도 없이 있는 건물의 간판을 교체하고 입구 정비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쇼와 30년대를 재현할 수 있었다. 분고타카다는 쇼와 거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네 가지에 집중했다.

쇼와 거리 재현의 키워드. 건물 외관을 비롯해 쇼와 시대 보물, 쇼와 시대 상품, 쇼와 시대 정서 재현 등이 그것이다. 모방이 어려운 이런 시도로 쇼와 시대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번째 성공 요인으로 거점 시설을 확보한 것과 분고타카다 관광마을 만들기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애초에 쇼와 거리 조성은 연간 5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경관 정비의 속도를 앞질러 30만 명 정도의 관광객이 마을을 찾았다. 이에 따라 서비스 질의 하락, 예산 부족, 콘텐트 빈약 등의 문제가 불거졌다. 시는 2002년 ‘다가시야 꿈의 박물관’ 등 거점시설을 마련했다. 그 덕에 쇼와 거리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행정적인 뒷받침은 흔히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주민들은 상공회의소, 시청, 금융기관 공동출자로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 주식회사는 쇼와 거리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고 있다. 수익금은 다시 지역개발에 투자한다. 이런 선순환 과정을 통해 쇼와 거리의 안정적인 활성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쇼와 30년대라는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성공 요인으로 들 수 있다. 당시 대규모 상가가 들어서고 도시 재개발이 급속히 진행되자 쇼와 30년대가 키워드로 부상했다. 쇼와 30년대는 일본이 막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시점. 아날로그 세대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다. 이런 정서를 꿰뚫어본 것이다.

한편 쇼와 30년대는 디지털 세대에게 새로운 문화 콘텐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쇼와 거리엔 주부로 이루어진 ‘쇼와 거리 안내인’도 있다. 이들은 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소개하면서 500m에 불과한 거리를 1시간 동안 안내해 준다. 쇼와 시대엔 상인과 고객이 물건을 주고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정이 오갔다. 사람들은 이 거리에서 이런 것들을 목격하고 행복해 한다. 이런 것이 어쩌면 ‘쇼와 거리’ 최대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오이타현 분고타카다시=구모란 지역연구센터 연구원·rany@empal.com


쇼와 시대를 재현한 극장에 걸린 영화 ‘로마의 휴일’ 간판.

분고타카다시는 체류형 관광지로 ‘비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비전은 분고타카다의 관광자원을 패키지화한 ‘구니사키 천년 로만’. 지역 산업인 소바(메밀) 재배와 연계한 상품도 개발됐다. 소바 생산지를 둘러보고 이곳에서 생산된 소바를 맛보도록 했다. 나가미쓰 분고타카다 시장은 체류형 관광의 대안으로 불교문화 관광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분고타카다가 있는 구니사키 반도는 ‘부처의 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구니사키 반도는 중세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 멀지 않은 곳에 온천도 여섯 곳 있죠. 올해 들어 지역 활성화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시내를 관통하는 가쓰라강 동쪽 지역에서 마을 살리기의 일환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죠. 소바 집이 있는 고령자를 위한 마을로 만들려고 합니다. 체류형 관광객을 유인하려면 기본적으로 광역이라야 합니다. 히메시마무라 등 이웃 마을과 손잡고 이틀 정도 묵고 가는 마을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분고타카다는 아직은 외국인에게 친숙한 도시가 아니다. 분고타카다에서 기자가 묵은 호텔 세이쇼는 시내에서 비자카드로 숙박비를 결제할 수 있는 유일한 호텔이다. 투숙객을 위한 안내문 중 영문으로도 인쇄된 것은 ‘폭력 행위를 금한다’는 내용뿐이었다. 정작 투숙객이 알아야 할 숙박 약관, 대피로, 세탁 서비스 등은 일본어로만 안내돼 있었다.

나가미쓰 시장은 기자의 이런 지적에 대해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시계(市界)에 자리 잡고 있는 온천 료칸(旅館)에 묵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쇼와 거리의 한계는 쇼와 시대를 기억하는 세대와 운명을 같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세대를 대체할 관광객들이 전 세대처럼 쇼와 거리를 찾을지는 미지수다. 지속 가능한 관광은 쇼와 거리로서도 화두인 셈이다.

인터뷰 거리의 악사 가메이 가즈오
“40, 50년 전 노래 신청 받을 때 행복”

“이렇게 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람들이 40, 50년 전 노래를 신청할 때면 행복을 느낍니다.”

쇼와 거리의 찻집 ‘커피 하우스 브라질’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 가메이 가즈오(龜井一男·67)는 “박수를 받거나 손님들이 노래를 따라 부를 때 흐뭇하다”고 말했다.
가메이는 거리의 악사다. 카바레 밴드 경력 30년인 그는 10년 전 분고타카다시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카바레가 문을 닫고 노래방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면서 일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후 처음엔 다른 가게에서 일했는데 주위에서 전자기타 소리가 시끄럽다고 해 4년여 전 이 찻집에 정착했다.

42년째 기타를 친다는 그는 한국 노래도 썩 잘 연주했다. 기자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본 찻집 주인이 귀띔해 주자 악보를 뒤적이더니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연주했다.

“한국 노래를 연주하면 한국 관광객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연주에 맞춰 노래를 따라 하거나 춤을 추기도 합니다. 오늘도 6명의 한국 관광객이 들러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 ‘아리랑’ ‘도라지’ 등을 연주하죠.”



- 10년째 자원봉사를 하면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피로연 등 파티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농사도 조금 짓습니다.”



- 옛날이 더 좋았겠습니다.
“카바레 무대에 서던 시절의 긴장감이 아직 생생합니다. 목·금·토요일엔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올라야 했는데 수많은 눈이 나를 쳐다보면 몹시 긴장되곤 했죠.”



- 자원봉사에 대해 자녀들이 뭐라고 합니까?
“자녀가 셋, 손자가 넷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반대하지 않습니다.”



- 가라오케에 밀려난 게 서운하지 않습니까?
“젊은 사람은 지금도 가라오케 등에서 연주를 합니다. 나한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죠. 때로는 젊은 세대가 내가 옛날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신선하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 언제까지 이렇게 자원봉사를 할 건가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나카마쓰 히로후미 분고타카다 시장
“의구심 있었지만 기적 만들어”

-1939년 일본 규슈 오이타현 분고타카다시 출생
-1963년 가나자와대 법문학부 졸업, 오이타현 발령
-1993~2000년 오이타현 상공노동관광부 산업진흥과장, 도쿄사무소장, 상공노동관광부장
-2000년~현재 분고타카다 시장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쇼와 거리가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당초 상가가 문을 닫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이 거리를 만들었는데 관광객들이 몰려온 것이죠.”

나카마쓰 히로후미(永松博文) 분고타카다 시장은 “연간 36만 명이 다녀가는데 관광지로서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용 전세 버스가 처음 들이닥쳤을 때, 카메라를 든 방송기자들이 취재차 처음 이 작은 도시를 찾았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는 듯했다.



- 쇼와 거리를 다녀간 사람들의 만족도는 어느 수준입니까?
“절반은 만족스러워하고 나머지 절반은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역 개발로는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관광지로서는 계속 분발해야 합니다. 사실 쇼와 시대는 가까운 과거라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구경거리라면 에도무라와 메이지무라 쪽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죠. ‘일점일품(一店一品)’ 등을 시찰하러 오거나 아시아 국가에서 벤치마킹하러 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 어떻게 해서 쇼와 거리를 조성하게 됐습니까?
“쇼와 30년대 후반 들어 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상가는 완전히 문을 닫게 생겼죠. 당시 다른 지역에서 에도 상점가나 메이지 상점가를 만들어 지역을 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고타카다는 메이지 시대는 물론 다이쇼 시대에도 번성했던 지역이 아닙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상공회의소를 주축으로 연구 모임이 생겨났고, 전국 각지를 답사했습니다. 그런데 쇼와 시대를 활용해 지역 개발을 시도하는 곳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도 쇼와 거리를 조성해 마을을 되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죠.”



- 왜 쇼와 거리였습니까?
“우리 시는 다이쇼 시대 후기에서 쇼와 시대 초기에 걸쳐, 특히 쇼와 30년대에 크게 번성했던 지역입니다. 많은 건물이 파라페트(옥상 난간벽)로 보수만 하면 쇼와 시대 건물로 단장할 수 있는 상태였죠. 그래서 건물을 보수하고 간판을 갈았습니다.”



- 분고타카다에 앞서 쇼와 시대를 재현한 거리는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도쿄의 오메시와 또 어느 한 곳에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재현한 거리 자체가 짧아 쇼와 거리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 쇼와 거리 조성에 반대한 사람도 있습니까? 쇼와 거리 조성 과정에서 이견을 어떻게 조정해 나갔습니까?
“극렬한 반대자는 없었지만, 협력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작은 마을에서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도로 확장 공사가 있었는데 보상금을 받고 가게를 그만둔 사람도 몇 명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쇼와 거리 조성 첫해에 상점 7곳이 참여했습니다. 비용은 현과 시 그리고 본인이 각각 3분의 1씩 부담했죠. 파라페트로 보수하는 비용은 많이 안 들었어요. 그러나 다른 지역은 전부 개조해야 했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카마쓰 시장은 분고타카다 출신이다. 오이타현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상공노동관광부 산업진흥과장, 도쿄사무소장, 상공노동관광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 처음 시장에 선출됐고 재선에 성공해 2기째 시정을 맡고 있다.



- 쇼와 30년대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향수를 느끼나요?
“쇼와 30년대는 산업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죠. 쇼와 3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리워서 찾고, 젊은 사람들은 호기심에서 쇼와 거리를 찾습니다. 일종의 돈 안 드는 테마파크인 셈이죠”



- 시민사회와 시 정부가 어떻게 협력해야 한다고 봅니까?
“시민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시의 경우 저와 상공회의소 회장, 그밖에 두 사람이 일일이 상점을 찾아다니며 설명했습니다. 시 공무원이 할 일과 시민이 할 일은 따로 있어요. 시민들이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민주, 금주 금투세 결론 전망…‘설화’ 역풍 맞으며 ‘유예론’ 무게

2강남구 삼성동서 10년 방치된 파출소 건물, 86억원에 매물로

3'대출 조이기' 나섰지만…“영끌 줄이기 쉽지 않네”

4술과 도파민의 관계

5 KT, MS와 5년간 수조원 규모 전략적 파트너십 체결

6‘신한저축은행→신한은행’ 대환대출…대상자 1만명 훌쩍

7찝찝한 임시공휴일

8“공개매수가 상향 없다더니” MBK 말 바꾸기 우려하는 이유

9커지는 ‘입시 불확실성’…혼란 빠진 ‘대입 전형 계획’

실시간 뉴스

1민주, 금주 금투세 결론 전망…‘설화’ 역풍 맞으며 ‘유예론’ 무게

2강남구 삼성동서 10년 방치된 파출소 건물, 86억원에 매물로

3'대출 조이기' 나섰지만…“영끌 줄이기 쉽지 않네”

4술과 도파민의 관계

5 KT, MS와 5년간 수조원 규모 전략적 파트너십 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