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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여덟에도 진화하는 춤꾼

예순여덟에도 진화하는 춤꾼

"고향에 온 것 같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고 자란 곳은 분명 한국(충남 연기)이지만 홍신자의 영혼이 첫 울음을 터뜨린 건 뉴욕이란다. “이곳에서 춤을 시작했고 많은 예술가를 만났거든! 놀던 물에 돌아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소녀 시절처럼 흥분되더라고.” 1970년대 그녀는 뉴욕에서 존 케이지, 백남준 등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런 홍신자가 다시 뉴욕에서 ‘고도’로 헤엄친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그녀가 춤으로 재해석했다. 춤 인생 35년을 기념하는 이 작품은 지난 7월 서울에서 초연됐고 11월엔 뉴욕 관객을 만났다(11월 20일부터 11월 30일까지). “댄스드라마라고 내가 이름을 붙였어요. 내러티브가 있는 건 아니지만 무용과 연극, 음악, 비주얼이 융합된 공연이라고 할 수 있지요.”

베케트의 연극에서 두 주인공인 고고와 디디가 까닭 없이 무작정 무언가를 기다리던 그 ‘고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절대자인 신이라고도 하고 아직 못 이룬 소망이라고도 한다. 홍신자는 ‘고도’에서 누굴 기다렸을까? “그걸 한정 지으면 안 되겠지! 사랑, 명성, 부… 그런 건 사람마다 각기 다르잖아요. 우리는 늘 뭔가를 기다리는데, 기다리다가 좌절하지요. 나도 그런 좌절을 많이 겪었고. 하지만 이 나이에도 기다리는 게 늘 있더라고요.”

새침한 소녀처럼 그녀가 안경 너머로 한 눈을 씽긋거렸다. 1940년생인 그의 몸과 피부, 근육에서 예순여덟이라는 그녀의 나이를 실감하기 어렵지만 춤사위 고비고비에 보여주는 손끝, 발끝에서는 그녀만의 관록이 묻어난다. 명상가, 작가, 보컬리스트로도 잘 알려진 춤꾼 홍신자는 1966년 뉴욕에 와서 스물일곱 늦깎이로 춤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그녀는 당시 ‘제례’ 공연으로 뉴욕의 평단과 관객을 모두 사로잡았다. 70년대 초 한국의 반응도 뜨거웠지만 그녀는 결국 인도로 숨어들었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서 도망쳤던 한국에 귀국한 것은 1993년이다. “한국은 물질적으로, 시각적으로 많이 변했지요. 하지만 뿌리 깊은 곳은 전혀 안 바뀌었지. 유교적인 사고방식,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 그런 걸 난 이해할 수 없더라고. 나에게만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말야.”

공연을 했던 라마마 극장과 맺어온 인연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장의 소유주이자 예술감독인 앨런 스튜어트는 1960년 오프오프브로드웨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으로 뉴욕과 세계 공연계의 대모로 통한다. “내가 뭘 하고 싶다면 무조건 다 좋다고 하는 분”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스튜어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세계를 돌며 연출가와 배우를 직접 발굴해 뉴욕 무대에 올린다. 공연 때마다 뉴욕타임스다 빌리지보이스다 해서 내로라하는 매체가 비평을 실어주는 국제적인 예술가이지만 홍신자에게도 문제는 돈이다.“죽음에 대한 은유가 몇 장면 나오잖아요? 그래서 원래는 무대 뒤쪽으로 공동묘지를 배치하고 싶었는데, 그걸 못했어요.”

한국에서 그녀가 오랫동안 지속해온 안성 죽산 국제예술제는 올해로 14회째를 맞았다. 안성시의 지원금을 받아 10년 넘게 꾸려오고 있지만 살림이 늘 빠듯하다. “하다 보니 노하우도 생기고 동료 예술가들이 우정출연을 해줘서 유지하고 있지.” 모든 지자체가 문화를 얘기하는 요즘, 그녀의 축제는 늘 힘겨운 고비를 넘기고 있다고 한다.

홍신자의 작품이 낯설고 어려울 거라는 짐작은 선입견이었다. 기자가 본 ‘고도’는 아주 쉽고 편안하다. 객석을 채우는 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라마마 극장의 전속배우인 밸로이즈 미켄스는 그녀의 공연을 보면 항상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이번 작품의 음악을 맡은 데이비드 사이먼스에게 홍신자의 작품은 “최고의 도전”이었다. “그녀의 공연은 매일매일 진화한다. 소리도, 공간도, 움직임도 모두 빈 듯하지만 그 안에는 맑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고 그가 말했다. 20~30년 전에 홍신자의 공연을 처음 보았고 뉴욕에 올 때마다 라마마로 달려오는 일단의 중년 관객이 극장 밖에 진을 치고 그녀를 기다렸다.

“아직 이렇게 가난하고, 세트 하나 제대로 못 만들었지만 내 선택이니까 상관없어요. 해보고 싶은 건 거의 다 해봤으니까. 죽음이여 올 테면 와라. 그때까지 나는 또 뭔가를 할 테니까.” 뉴욕 공연을 마친 뒤 그녀는 새해에 폴란드, 프랑스 등지로 유럽 공연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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