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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에서 온 차로 주유소들 ‘북적’

외지에서 온 차로 주유소들 ‘북적’

서울 영등포 일대 주유소들의 ‘기름값 내리기 전쟁’이 치열하다. 영등포구 도림동, 대림동, 신길동에 위치한 수십여 개 주유소는 유류세 환원조치로 전국 휘발유 평균 가격이 1370원(1월 1일 현재)으로 껑충 뛴 지금도 1200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 주유소는 멀리서 찾는 고객들로 북적댄다. 주유를 위해 30분 넘게 기다리는 게 예사다. 강남에서 찾아오는 고객도 많다. 그러나 지금의 자금력으로 언제까지 저가경쟁을 할 수 있을지 주유소 사장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영등포 일대에 불고 있는 기름값 저가전쟁의 명암을 현장 취재했다.

값싼 기름을 넣으려는 자동차들로 주유소가 북적거리고 있다. 이 주유소의 휘발유 값은 1200원대로, 서울 시내에서 가장 싼 편에 속한다.

2008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후 6시2분.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강서주유소 일대는 ‘마비지경’이다. “얼마요” “가득이오” “빵~빵~ 차 빨리 빼세요”라는 고성과 경적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울린다. 주유소를 가득 메운 자동차 10여 대는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여기까진 약과다. 주유소 진입을 기다리는 차는 무려 1.5㎞가량 늘어서 있다. 그야말로 장사진이다. 주유소 입구에서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설 주차장 입구는 자동차 행렬 때문에 막혀버린 지 오래다. 주유소 직원이 직접 나와 입구를 터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1t 화물차 운전자 임공렬(60)씨는 “30분 넘게 기다린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날만 그런 게 아니다. 평일 퇴근시간 풍경도 비슷하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강서주유소 기름값이 서울에서 가장 싼 곳 중 하나’라는 입 소문이 퍼지면서 자동차가 줄줄이 몰려드는 것이다.

이 주유소의 휘발유 값은 L당 1269원(1월 1일 오후 3시 현재). 같은 시기 전국 휘발유 평균값(1370원)보다 101원, 강남구 평균값(1439원)보다 170원 싸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신사동 신사주유소(1585원)와는 무려 316원 차이가 난다. 경유도 전국 평균 1326원보다 97원 싼 L당 1229원이다.

이 때문에 장거리 운전을 많이 하는 화물차 운전자들에게 이 주유소는 인기다. 신문배달영업을 하는 1t 화물차 운전자 정건웅(65)씨는 월 700L의 경유를 쓴다. 1월 1일 현재 전국 평균 경유가격으로 계산하면 월 92만8200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서주유소에서 주유하면 월 6만7900원(92만8200원-86만300원)을 줄일 수 있다.



영등포로 몰려드는 강남족들

정씨는 “L당 100원 차이가 별게 아닌 것 같아도, 매월 지출액을 따져보면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강남에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다. 강서주유소 직원은 “강남 단골손님이 많기도 하지만 강남이라면서 주유소를 물어보는 전화가 하루에도 10여 통 온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회사원 김세형(32·신사동)씨는 “강남 주유소의 가격이 너무 높아 이곳까지 애써 찾아온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강남에서 영등포까지 주유하기 위해 찾아오는 게 과연 남는 장사일까? 신사동에 사는 김세형씨 사례를 들어보자. 그는 2000㏄ 쏘나타 차량을 소유하고 있다. 이 차의 기름 탱크는 70L. 집 근처 신사주유소(1월 1일 현재 L당 1585원)에서 휘발유를 가득 넣었을 때 드는 비용은 11만950원이다.

반면 강서주유소에서 똑같은 양을 주유하면 8만8830원가량 들어간다. 단순 비교해도 한 번 주유에 2만2120원을 아낄 수 있다. 일주일에 1회 주유한다고 가정했을 땐, 1년에 대략 106만원이 절약된다는 얘기다. 그래도 왕복거리를 감안하면 ‘길에 버리는 돈’이 더 많지는 않을까? 신사주유소와 강서주유소의 거리는 14.48㎞다.

쏘나타의 연비가 L당 11.5㎞라고 했을 때, 이 구간을 왕복하는 데 필요한 기름은 2.86L(1㎞당 0.87L). 그렇다면 왕복하는 데 드는 기름값은 기껏해야 3800원 안팎이다. 왕복 비용을 감안해도 대략 2만원가량은 남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름을 넣기 위해 30여 분을 길에서 기다리고, 값싼 주유소를 가기 위해 강남에서 넘어오고….

기름값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한 서민들의 ‘유(油) 테크’를 엿볼 수 있다. 만약 경기가 좋고, 기름값이 고공행진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외지에서까지 찾아와 영등포 일대를 돌며 기름값이 싼 주유소를 찾는 탓일까. 영등포 일대 주유소들은 ‘기름값 내리기 전쟁’이 한창이다.


강서주유소가 위치한 도림동·대림동·신길동 일대에서 특히 치열하다. 주유소 가격공개사이트 ‘오피넷’에 따르면 1월 1일 현재 서울 지역 대부분의 주유소 휘발유 가격은 L당 1400원을 웃돌았다.

그러나 도림동·대림동·신길동엔 1200원대 주유소가 무려 16곳이나 있다. 영등포구에 위치한 전체 주유소(41개) 가운데 39%에 해당한다. 영등포구의 평균 휘발유 값이 제법 비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실례로 영등포구 여의도동 6개 주유소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L당 1373원이다. 여기엔 강남에 육박하는 1577원대 주유소도 있다. 목동 근처 문래1동 3개 주유소, 양평2동 4개 주유소의 평균 휘발유 가격 역시 L당 1423원, 1432원에 달한다.

신길동에 위치한 A주유소 대표는 “여의도와 목동에 인접한 지역과 달리, 강서주유소가 위치한 도림동 일대 주유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값싸게 기름을 팔아야 한다”며 “손님을 잡기 위해선 마진을 일정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박리다매’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영등포 기름값 내리기 경쟁은 서민들에겐 그나마 ‘가뭄 속 단비’와 같다. 유류세 환원조치가 시작된 탓에 서민들은 또다시 높은 기름값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1월 1일 시작된 유류세 환원조치로 휘발유, 경유에 붙는 세금이 각각 L당 83원, 57원 올랐다. 여기에 원유에 부과되는 관세율도 올 3월까지 순차적으로 오른다.

현재 1%인 원유 관세는 2월에는 2%, 3월에는 3%로 각각 상향조정될 예정이다. 화물차 운전자 임공렬씨는 “그렇지 않아도 경기침체 장기화 등으로 민생이 벼랑으로 내몰려 있는데, 기름값이 또다시 올라 막막하다”며 “그래도 기름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름값 전쟁, 서민에겐 ‘단비’

기름을 넣는 사람들이야 좋겠지만 영등포 일대 주유소 사장들의 고민은 이만저만 아니다. 무엇보다 언제까지 저가경쟁을 벌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저가경쟁은 매출 감소를 일정 기간 감수해야 한다.

저가 마케팅의 성과는 단기간에 나오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고객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는 강서주유소도 떼돈을 벌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월 7000드럼에서 1만2000드럼으로 외형 매출은 크게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오히려 감소했다.

기름값을 정상적으로 받던 때, 이 주유소는 200드럼당 300만원의 마진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60만원으로 5분의 1 토막이 났다. 단순 계산하더라도 이 주유소의 마진은 월 6900만원(1억500만원-3600만원)으로 줄었다.

박윤숙 강서주유소 회장은 “몇 년 사이 4억~5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며 “손해를 감수하고 1년여 저가전략을 편 게 요즘 들어 서서히 성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서주유소처럼 그만한 기간을 견딜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주유소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극심한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주유소가 속출하고 있는 게 주유소 업계의 현주소다. 한국주유소협회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까지 휴·폐업 한 주유소는 372개에 달한다. 매월 평균 33개가량 주유소가 문을 닫는 셈이다.

그렇다고 자금지원이 수월한 것도 아니다. 은행들은 현재 우량고객에게만 주로 돈을 빌려주고, 정작 자금이 절실한 곳에는 돈줄을 죄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앞날이 불투명한 자영업체인 주유소에 자금지원이 쉽게 될 리 만무하다. 한 주유소 사장은 “영등포에 불고 있는 기름값 저가경쟁은 서민들에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경기불황을 어렵게 견디고 있는 일부 주유소는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주유소엔 휘발유 등 기름값 결정권이 없다. 정유사가 제시하는 가격에 마진을 붙이는 것뿐이다. 정유사의 공급가격은 일정한데 마진폭을 줄이면 주유소 경영은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유소의 저가경쟁이 정유사의 석유제품 출고가격 인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여부”라면서 “그래야만 주유소, 고객, 정유사 모두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주유소마다 기름값 다른 이유
임차료·인건비 따라 천차만별
주유소마다 기름값이 천차만별인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주유소의 ‘마진’에 있다. 주유소는 석유제품 공급가격에 L당 평균 100~150원의 마진을 붙인다. 여기엔 인건비, 임차료, 운영비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임차료, 인건비. 임차료가 상대적으로 싸고, 직접 주유하는 방식으로 인건비를 줄인 주유소가 가격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가령 땅값이 상대적으로 싼 지방 주유소의 기름값이 싸고, 셀프 주유소가 저가 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턱없이 낮은 가격의 주유소는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유사 휘발유를 정상 휘발유로 둔갑시켜 판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정상 휘발유보다 유사 휘발유 판매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유사 휘발유 제조원료에 세금(교통세)이 붙지 않아서다. 유사 휘발유 제조원료는 ▶솔벤트 ▶톨루엔 ▶시너 ▶메탄올 등을 말한다. 이에 따라 유사 휘발유를 정상 휘발유로 속이면 낮은 가격에 팔면서도 많은 마진을 챙길 수 있다.
강서주유소는 왜 싼가?
특정 정유사 간판 내린 게 큰 몫
강서주유소가 기름값을 대폭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특정 정유사의 상표를 떼어냈기 때문이다. 강서주유소는 그동안 폴사인제에 묶여 특정 정유사의 기름만 공급받아 판매했는데, 이런 이유로 다른 정유사의 기름값이 아무리 싸도 선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폴사인제가 공식 폐지되면서 정유 4사 제품 중 가장 싼 기름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폴사인제 폐지로 강서주유소는 일종의 ‘가격 선택권’을 부여 받은 셈이다. 폴사인제는 석유제품 판매에서 부당한 표시·광고행위를 방지하고 소비자의 브랜드 선택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도입된 것이다. A정유사의 기름을 공급받으면 반드시 A정유사 간판을 걸어야 한다는 제도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정유사가 특정 주유소를 제약하는 근거로 악용돼 왔다. 다른 정유사의 기름을 공급받아선 안 된다는 독점공급조항이 대표적이다. 박윤숙 강서주유소 회장은 “정유사 간판을 떼면서 각 정유사의 가격을 보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며 “이를 통해 저렴한 가격에 기름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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