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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erenade] 위기에서 실감한 역동성

[Seoul Serenade] 위기에서 실감한 역동성

내가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이다. 대학 1학년 때 봉사단원으로 서울을 방문해 18개월간 대구·포항·울산·목포·전주 등 지방을 돌아봤다. 그 시절 한국의 매력에 푹 빠져 1994년엔 다시 미국의 엘리베이터·에스컬레이터 전문 기업인 오티스 엘리베이터의 한국법인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로부터 16년째 한국을 떠나본 적 없으니 이젠 나도 한국 사람이 다 됐다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국어 실력도 꽤 늘었지만 한자를 알아야 한국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몇 년 전부터는 천자문을 배웠다. 이때 배운 한자 실력으로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다면?

오래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온탕냉탕(溫湯冷湯)’이란 말이 뇌리에 떠오른다. 강산이 한 번하고도 절반이 바뀌는 동안 이 나라는 엄청난 속도로 선진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다. 실생활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걸 꼽으라면 지하철과 할인마트를 들 수 있겠다.

90년대 초에 1~4호선밖에 없었던 지하철은 그 뒤로 거미줄처럼 서울을 가로질러 누구라도 이 도시 구석구석을 쉽사리 찾아갈 수 있게 됐다. 외국인들에게 편리한 대형 마트도 당시엔 서울 양평동에 한 곳뿐이었지만 지금은 전국 곳곳에 수백 개로 늘어났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외국인 거주자들의 생활은 나날이 편리해지고 있다.

그 밖에도 도시엔 아침에 눈만 뜨면 새로운 빌딩이 생겨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다. 그 역동적인 모습에 나는 마치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학생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2005년 2월께 우리 회사의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엔 한 고객으로부터 감사 편지 한 통이 올랐다.

“엘리베이터 공사 일정이 워낙 촉박해 둘 이상의 회사를 참여시켜야 준공 일을 맞출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티스 한 곳에만 맡기면서 내심 불안했는데 공기를 맞춰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글을 올린 사람은 한국의 유수 건설회사에 있는 한 임원이었다. 대구 수성구에 짓고 있던 한 아파트 시공 현장에서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엘리베이터 설치공사를 단 40일 만에 마무리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당시 총 3200여 가구가 입주할 예정이었던 이 아파트 단지는 엘리베이터 100대가 설치되는 대규모 공사 현장이었다.

당초 시공을 맡았던 건설회사가 부도를 내면서 급기야 공사가 중단됐고, 그 뒤 공사를 떠맡은 해당 건설회사는 입주 일정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공사가 늦춰질수록 피해는 입주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파트 공사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으면 마감공사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 회사에 주어진 시간은 40여 일에 불과했다. 아무리 낭비 요소를 줄인다 해도 절대적으로 공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나는 CEO로서 용단을 내려 공사를 맡기로 했다. 그 뒤로 40여 명의 건설 현장 식구들은 묵묵히,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작업에 매달렸다. 주말도, 공휴일도 반납했다.

이러한 일이 그들에겐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외국인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비상 상황이라지만 외국에서는 직원들에게 그 정도의 헌신을 기대하긴 어렵다. 마침내 우리는 약속한 대로 40일 만에 공사를 끝냈다. 당시 현장 소장은 “다들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데 못할 것은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벼락치기 근성을 피부로 느낀 경우는 또 있다. 몇 년 전 신제품의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단 6개월의 시간이 배정됐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직원들은 4개월이 지나도록 딴 업무에만 골몰했다. 프로젝트를 제대로 끝마칠 수 있을지 마음을 졸였는데 놀랍게도 그 뒤로 한 달여 만에 완성된 결과물을 내게 가져왔다.

나의 사고와 업무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한국인 특유의 집중력일까’라고 생각하면서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앞서 한국인의 기질을 ‘온탕냉탕’이란 얄궂은 말로 표현한 것은 이래서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화끈한 집중력’을 몸소 체험해 봤기 때문이다.

그처럼 무서운 집중력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가장 큰 원동력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경영 현장에서 새삼 깨닫게 됐다. 평소 김치찌개를 즐겨 먹는 나도 해가 갈수록 한국인의 ‘온탕냉탕’ 기질을 닮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때로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비로소 움직이는 듯하다는 부정적인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특유의 집중력을 위기 극복의 힘으로 전환해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다시금 기대해 본다.

[필자인 브래들리 벅워터는 미국인으로 승강기 제조업체인 ‘오티스 엘리베이터’ 한국법인 사장이다. 그의 영문 기고문을 우리말로 옮겨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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