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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품고 주류 왕국 세운다

‘처음처럼’ 품고 주류 왕국 세운다

‘처음처럼’을 품에 안은 롯데가 OB맥주의 유력 인수 후보로 떠올랐다. 견고하기만 한 하이트-진로의 아성을 깨트릴 수 있을까.

“재계에서 아마 가장 재미있는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두고 보세요.”

1월 6일 롯데가 두산주류BG 인수를 위한 본계약을 맺자 국내 한 주류업체 CEO가 던진 말이다. ‘참이슬’을 생산하는 하이트-진로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말 두산주류가 매물로 나왔을 때 “롯데야말로 가장 피하고 싶은 상대”라고 귀띔했다.

롯데는 계열사인 롯데칠성음료를 통해 소주 ‘처음처럼’을 생산하는 두산주류를 5030억 원에 인수하기로 본계약을 맺었다. 3주간의 실사를 거쳐 2월 중 거래를 마칠 예정이다.

롯데칠성은 100% 출자한 ㈜롯데주류BG를 설립해 3월부터 소주생산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두산주류는 ‘처음처럼’ 외에도 ‘산’과 ‘그린’ 등 소주, ‘국향’·'군주' 등 약주, ‘마주앙’ 등의 와인 브랜드를 갖고 있다.

국내 소주 시장은 ‘참이슬’과 ‘J’를 앞세운 진로가 53%를 점유하며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처음처럼’을 내세운 두산이 11%, 나머지 지방 주조 회사들이 36%를 차지한다. 특히 진로는 탄탄한 영업망으로 주류 도매상을 장악하고 있어 다른 소주 회사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가 두산이 아닌 롯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롯데는 전국에 백화점을 비롯해 대형 마트와 편의점 등 촘촘한 유통망을 갖고 있다. 위스키 시장에서 ‘스카치블루’를 비롯해 수입 와인, 전통주 ‘천인지오’ 등 다양한 주종을 이미 내놓고 있다. 롯데칠성이 지분 85%를 가진 롯데아사히주류의 아사히맥주는 국내 수입 맥주 시장에서 밀러, 하이네켄에 이어 3위를 달린다.

롯데는 1998년 텃세가 심하기로 유명한 국내 위스키 시장에 진출해 ‘유통 왕국’의 저력을 보여줬다. 롯데는 당시 딤플과 윈저, 임페리얼 등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던 위스키 시장에 스카치블루를 내놓았다. 다들 무리한 도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국에 퍼진 롯데의 유통 채널을 모두 동원하고, 유흥가 중심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며 출시 4년 만에 시장점유율을 10%대로 끌어올렸다.

현재 스카치블루는 위스키 시장 점유율 18%로 업계 3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밀러타임의 김용민 대표는 “당시 스카치블루의 선전을 돌이켜 본다면 진로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막대한 자금력과 전국 유통망은 기존 두산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롯데의 등장에 소주 매출을 좌지우지하는 주류 도매상들도 호의적이다.

주류도매상 대정의 고석현 부장은 “진로와 롯데의 경쟁이 심화될수록 주류 도매상에겐 이익”이라고 설명했다. 롯데가 두산주류를 인수하며 가장 주목받는 시장은 영남권이다. 롯데가 프로야구단 롯데자이언츠를 등에 업고 그 지역 소주 시장에 신바람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시원소주 등으로 유명한 대선주조와 한판 전쟁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고 부장은 “스카치블루에서 알 수 있듯이 영남권 주류 시장은 롯데의 텃밭”이라며 “그곳 도매상들에겐 ‘의리파’들이 많아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봤다.‘처음처럼’은 전체 소주 시장에서 점유율 11%에 불과하지만 서울과 경기 지역이 각각 20%, 15%로 높은 편이다.

강원도에선 52%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롯데가 영남을 잡는다면 지역적인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된다. 대신증권의 이정기 선임연구위원은 “불황기지만 롯데가 자본금 대비 부채비율이 낮고 자산이 많아 진로와 충분히 경쟁할 만한 요소를 갖췄다”고 평했다.

1월 6일 열린 두산주류BG의 영업양수도계약 체결식. 롯데칠성의 정황 대표는 OB맥주 인수와 관련한 질문에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금액도 만만치 않고 저쪽(OB맥주)에서 팔겠다고 요청하지도 않았다”며 “아직은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신세계 이마트가 복병?


롯데가 두산주류 인수전에 뛰어들자마자 업계의 관심은 롯데의 OB맥주 인수 여부에 모였다. 지난해 9월 로이터통신은 OB맥주의 최대주주인 인베브가 미국의 안호이저부시를 인수하며 생긴 채무를 갚기 위해 OB맥주를 매각할 것이라고 전했다.

인베브는 안호이저부시를 인수하며 463억 달러를 쏟아 부어 자금 압박에 시달려 왔다. 이때부터 롯데는 OB맥주의 유력 인수 후보에 올랐다. 한동안 잠잠했던 매각설은 1월 12일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를 통해 다시 불거졌다.

인베브가 매각 대금을 15억∼20억 달러로 낮춰 재매각에 들어갔다는 보도였다. 직접 벨기에 인베브 측에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인베브의 오르니그 그웬돌린 홍보이사는 “안호이저부시 인수로 생긴 채무를 줄이기 위해 일부 자산의 처분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e메일을 보내왔다.

OB맥주 매입에 대해선 롯데를 포함해 기린 등 한국과 일본의 기업, 그리고 사모펀드들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롯데의 경우 일본 아사히와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OB맥주 인수전에 적극 참여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롯데칠성은 이미 롯데아사히를 통해 국내에서 맥주겳痼?사업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자금력이 앞서는 롯데 입장에선 ‘의지’만 확고하다면 단독이든 컨소시엄이든 OB맥주를 인수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란 게 업계의 분석이다.

국내 한 인수·합병(M&A) 전문가는 “전 세계 주류 회사 중 롯데만큼 OB맥주와 시너지를 올릴 수 있는 회사는 없을 것”이라며 “롯데 입장에서 볼 때 OB맥주의 인수 책정가도 높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OB맥주는 하이트에 이어 국내 2위 맥주업체로 40%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OB맥주까지 인수하면 위스키와 소주에 이어 맥주, 와인, 전통주 등 모든 주종을 아우르는 ‘공룡 주류업체’가 탄생하게 된다. 하이트-진로가 소주, 맥주에선 앞서지만 위스키 부문에선 롯데가 앞서고 있다. 롯데가 거대 유통망을 통해 세 가지 주종을 함께 판매한다면 주류 업계의 판도도 뒤집을 수 있다.

김용민 대표는 “하이트-진로로선 롯데가 처음처럼을 인수한 것보다 OB맥주 인수에 더 대비해야 한다”며 “맥주는 한순간에 뒤집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롯데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현재 월 115만 상자의 ‘처음처럼’을 생산하는 두산주류 강릉 공장의 생산량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진로 측은 “처음처럼의 생산 설비로는 현 시장점유율을 넘어서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 측은 공장을 풀가동할 경우 월 200만 상자까지 생산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 경우 롯데는 전국 점유율을 11%에서 20%까지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롯데칠성음료의 정황 대표는 기자 간담회에서 “필요하다면 설비를 늘릴 수 있다”고 밝혔다. 두산주류의 경우 과도한 마케팅 비용으로 영업이익이 낮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2007년 두산주류의 매출액은 3419억 원, 영업이익은 214억 원으로 영업이익률이 6.3%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는 이효리, 송혜교 등 스타 마케팅이 치열했던 2006년(3.1%)에 비해서는 나아진 것이다. 올해 다시 마케팅 비용이 급증하면서 지난 3분기까지 영업이익률이 4%로 떨어졌다. 미래에셋증권의 한국희 연구원은 “앞으로 주류 업계에서 롯데와 하이트의 경쟁은 지금처럼 우아할 리 없다”며 “신규 진입자는 공격해야 하고 기존 사업자는 방어해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 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롯데가 소주에 이어 OB맥주를 산다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조치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하이트맥주가 2005년 진로를 인수하면서 공정거래위원회는 맥주와 소주 시장이 별개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합병 이후 유통 시장에선 독과점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해,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영업 인력을 5년 동안 합치지 말고 가격도 함부로 올리지 말라고 결정했다.

롯데와 유통 업계에서 1위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신세계도 복병이다. 신세계가 운영하는 이마트는 국내 주류 시장에서 큰손. 이마트는 한때 롯데가 수입하는 아사히맥주의 입점을 거부하는 등 롯데와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다. 국내 한 와인수입업체 사장은 “신세계는 최저 가격과 단독 입점 등을 강조하며 국내 주류업체들에 ‘공공의 적’으로 불릴 때가 많다”며 “경쟁자인 롯데의 주류 시장 확장을 지켜만 보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문덕 회장 ‘영업통’ VS 신동빈 부회장 ‘추진력’

2008년 12월 벌어진 두산주류 인수전에선 롯데가 ‘꽃놀이패’를 가지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만큼 롯데에 유리한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인수전에 뛰어들었던 사모펀드 관계자는 우선협상자가 발표되기 전에 “우리가 인수를 해도 롯데에 경영을 위탁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롯데로선 직접 인수해도 되고, 나중에 펀드로부터 인수해도 되는데 굳이 높은 가격을 썼겠느냐”고 귀띔했다.

지난 12월 본 입찰에서 롯데는 4000억 원대 초반을 제시해 후보 가운데 최저가를 기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산이 기대하던 6000억~8000억 원 사이의 가격대에 한참 못 미친 셈이다. 두산은 본 입찰 이후 얼마 안 돼 재입찰을 실시했다. 이때도 보수적인 롯데가 무리하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롯데는 일주일 만에 가격을 1000억 원 이상 올린 후 두산주류를 거머쥐었다.

당시 인수에 적극 나선 주인공이 신동빈 부회장으로 알려졌다. 신 부회장은 2005년 진로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을 때 하이트에 밀려 고배를 마신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하이트맥주의 박문덕 회장은 3조4000억 원을 써 내 2조 원대를 제시한 롯데를 제치고 ‘두꺼비’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소주 시장에서 두 사람의 자존심 경쟁이 재현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신 부회장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이후 노무라증권에 입사해 영국 런던 지점에서 근무한 글로벌 엘리트다. 하지만 신 부회장이 그동안 국내에서 펼친 사업은 대부분 주목받지 못했다.

편의점인 ‘세븐일레븐’, 에스프레소커피 체인점인 ‘자바커피’, 저가 캐주얼 브랜드 ‘유니클로’, 최근 인수한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 등 대부분이 시장에서 고전했다. 하지만 최근 신 부회장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있다. 외국인 감독을 직접 영입해 롯데자이언츠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인 신격호 회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잠실 제2 롯데월드 건립을 주도하면서 재계에서 추진력을 인정받고 있다.

하이트맥주의 박문덕 회장도 신 부회장의 도전을 바라만 보고 있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 회장은 창업주의 차남으로 76년 하이트맥주(옛 조선맥주)에 입사해 15년 동안 현장에서 누빈 영업통. 96년 맥주 업계의 ‘영원한 맞수’인 OB맥주의 아성을 무너뜨린 주역이다.

특히 내년 5월로 예정된 진로의 재상장을 앞두고 소주 시장에서 1위의 입지를 확실히 굳혀야 하는 입장이다. 올해 주류 시장에서 벌어질 ‘총성 없는 전쟁’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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