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號 ‘죽음의 바다’에 진입하다
대한민국號 ‘죽음의 바다’에 진입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장강(長江·양쯔강)은 항상 조용하게 흐르는 것 같지만 실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치열하게 밀어내고 있다(長江後浪推前浪). 지난해 여름, 한국 경제 안팎에 ‘9월 위기설’이 나돌았다. 경제팀 수장이 직접 나서 “각종 경제지표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이는 공수표에 그쳤다. 경제지표 뒤에 숨어 있는 돌발변수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장강의 ‘유유함’에만 한껏 도취된 것과 다를 바 없다. 보이는 것은 사실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겉모습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불가측한 상황에 대비할 수 없다.
잘생긴 얼굴의 한 사내가 인면수심의 연쇄살인범인 것처럼 말이다. 바야흐로 ‘마이너스’ 성장 시대다. 2008년 4분기 경제성장률은 전기 대비 5.6% 떨어졌다.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3.4% 추락했다. 정문석 한화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쇼크 수준의 추락”이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경제지표는 ‘최악’이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1998년 외환위기(-6.0%) 이후, 분기 수치론 가장 형편없는 성적표다.
경제지표 “행간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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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상은 완전히 딴판이다. 최악의 경기지표를 바닥으로 판단하면 오산이라는 지적이 중론이다. 겉으로 드러난 경기지표를 단순하게 보지 말고 행간을 꼼꼼히 읽으라는 것이다.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 경제위기를 단순하게 경기순환 과정에서 내림세 정도로 속단해선 안 된다”며 “근본적 위기요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더욱 무서운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송재혁 SK증권 이코노미스트도 “예상을 뛰어넘는 실물경기 추락에 대비해야 한다”며 제2의 ‘최악’에 대비하자고 강조했다. 대한민국호(號)의 추락은 어쩌면 지금부터라는 경고성 발언들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한국 경제 추락의 근본 이유는 수출 부진이다.
한국은 절대적으로 수출의존적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63% 이상을 수출이 올린다. 수출이 부진의 늪에 빠지면 한국 경제의 기둥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까닭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4%로 예상하면서 수출의 성장기여도를 1.1%, 내수를 -5.1%로 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출 비중을 그만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수출은 한때 어마어마한 마력(馬力)을 가진 한국 최고의 성장엔진이었지만 지금은 반대다. 지난해 10월 금융충격으로 전 세계 교역량이 급감하면서 수출전선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1월 수출액은 216억9000만 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32.8% 감소했다.
한국 최고의 효자품목 IT 수출마저 전년 동월 대비 38.3% 감소한 69억6000만 달러로 잠정 집계됐다. 문제는 수출부진이 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최대 수출처 미국이 1929년 경제 대공황을 방불케 하는 극심한 침체기를 보내고 있다. 게다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 의회는 자국업체를 위한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할 태세다. ‘한국 수출기업의 입지가 예년만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감산·구조조정→고용률 감소, 실업률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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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택 유진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선진국의 경기침체가 중국, 중동 산유국으로 확산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수출 전망은 어둡다”고 분석했다.
‘수출부진’으로 형성되는 연쇄고리는 고약하고 질기다. 수출부진은 기업 감산 및 구조조정을 이끌고, 고용률 감소, 실업률 증가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수출 위축으로 물건이 팔리지 않는 기업들은 경계경보를 발령하고 있다.
유동성 위기를 알려주는 자체 시그널이다. 이는 감산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최악의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기업 스스로 공장을 멈춰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지난해 말 제조업 평균 공장가동률은 외환위기(63.8%)보다 하락한 62.5%에 그쳤다.
산업생산지수도 -18.6%를 기록했는데, 이 역시도 외환위기(-13.6%)보다 나쁜 수치다. 공장가동률이 이처럼 추락하는 상황에서 종업원이라고 안전할 리 만무하다. 잔업이 줄어드는 데 일터를 편안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감산에 돌입하면 몸집 줄이기(구조조정)가 수반되고, 고용률 감소와 실업률 증가가 공식처럼 따라붙는다.
2008년 12월 고용률은 전년 대비 0.7% 하락한 58.4%에 그쳤다. 실업자 수는 78만7000명으로, 지난해 대비 5만1000명 늘었다. 실업률은 3.1%에서 3.3%로 증가했고, 청년실업률은 7.7%까지 치솟았다. 반면 신규취업자 수는 감소추세다. 지난해 4분기 20~30대 취업자 수는 관련 통계작성 이후 처음으로 100만 명 밑으로 떨어졌다.
특히 20대 취업자는 389만4000명에 그쳐, 전년(399만2000명) 대비 2.5% 줄었다. 고용률이 하락하고 실업률이 증가하면 반드시 소비가 위축된다. 소득이 줄어드는데 지갑을 맘놓고 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이런 현상은 1998년 외환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1998년 2분기 고용률이 전년 대비 -12.2%로 떨어지자 1998년 3분기 소비지출액이 150만원 가까이 줄었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소비재 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 7.0% 감소했다. 특히 승용차 등 내구재는 14.5%, 의복·직물 등 준내구재는 13.7%씩 급감했다. 소비심리의 위축으로 먹을거리 등 꼭 필요한 품목이 아니면 돈을 쓰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돈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서민 중산층은 물론 부자까지 지갑을 닫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백화점 매출의 하락폭(-11.6%)이 대형마트(-6.8%)보다 크다는 점은 부자들이 돈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외환위기보다 경기하강 속도 빨라
한국 경제는 지금 ‘죽음의 바다’로 향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쾌속 질주하던 대한민국호의 앞길엔 세계 경기침체, 원화약세에 따른 투자부담 증가 등 악재가 가득하다. 여기에 금융불안의 지속으로 투자심리까지 위축되고 있다. 이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강도의 침체를 예고한다.
경기순환을 보여주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를 보면 그렇다.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100을 기준으로 이상이면 호황, 미만이면 불황으로 분류된다. 1998년 2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95.0에 그쳤지만 2008년 12월에는 93.7까지 떨어졌다. 외환위기 때보다 불황의 강도가 더욱 세고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연일 ‘낙관론’을 설파하고 있어 아쉽다. 근거는 국제통화기금이 전망한 ‘2010년 경제성장률 4% 회복’이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4%로 예상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처럼 팍팍한 민생으로 돌아오는 데도 꼬박 2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된다. 시커먼 먹구름이 마구 몰려오고 있는데 ‘곧 갤 것’이라며 빨래를 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중국 고사성어다. 경기 하강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는 지금, 지나친 낙관론보다는 경제부활을 위한 비책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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