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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의 일당백! 高額錢 <고액전>발행 소동

당백전의 일당백! 高額錢 <고액전>발행 소동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바닥났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고민했지만, 아직 뾰족한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에 의해 훼손되기 전 경복궁 전경(1890). 경복궁 중건 사업이 진행된 1865~68년 780만 냥의 원납전이 모금되었다. 부족한 재원은 당백전 주조, 갖은 명목의 세금을 징수해 마련했다.

고종 3년(1866) 10월 30일(양력 12월 6일), 좌의정 김병학이 연방 고개를 조아리며 이제 겨우 15살밖에 안 된 어린 국왕에게 바닥난 재정 상황을 보고했다. 영건도감(營建都監: 경복궁 중건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도제조(都提調: 최고책임자)를 겸직하고 있던 김병학은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임진년(1597) 왜란 때 소실된 왕실의 법궁(法宮: 으뜸 궁궐)을 중건하는 국가적 대역사를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어린 국왕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지난해(1865) 4월, 경복궁 중건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재정이 이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사업 초기에는 대신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부역에 참여했고, 원납전(願納錢: 원해서 바치는 돈)을 헌납했다. 1만 냥 이상 바친 백성만 53명에 달했다.

어린 국왕은 대원군의 건의에 따라 그처럼 갸륵한 백성들에게 관직과 관품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하지만 사업이 해를 넘기면서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들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고, 원납전의 모금액도 눈에 띄게 줄었다. 지난해 500만 냥 이상 걷혔던 원납전은 올해는 120만 냥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내년엔 100만 냥 징수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는 흉폭한 양이(洋夷)들의 침공이 줄을 이었다. 7월에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에 나타나 대포를 쏘고, 양민을 학살하는 등 소란을 피우더니, 전 달에는 로즈라는 프랑스 해군 제독이 7척의 군함에 수백 명 수병을 데리고 나타나 강화도에서 농성하다 서적과 금은보화를 약탈해 돌아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복궁 중건은커녕 양이들과 맞서 싸울 전비(戰備)를 마련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좌의정 김병학이 수심에 젖어 있는 어린 국왕에게 당면한 재정 위기를 타개할 방책을 털어놓았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상평통보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지금 당장 시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대신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당백전을 주조한다? 실로 현묘한 방책이었다. 1닢에 1문인 상평통보 대신 1닢에 100문(1량)짜리 고액전(高額錢)을 찍어내자는 말이었다. 어차피 상평통보의 품질도 예전 같지 않았다. 숙종 4년(1678), 처음 발행될 때만 해도 1문에 2전5푼의 무게로 제작되었던 상평통보는 2전, 1전7푼…… 점점 줄어들더니 영조 33년(1757)부터는 1문에 1전2푼까지 가벼워졌다.

200여 년간 상평통보의 원료가 되는 구리 값도 많이 올라 무게를 반으로 줄였음에도, 한때 50%에 달했던 화폐 주조 수익률이 10%까지 떨어졌다가 20%로 간신히 회복되었다. 상평통보 10문을 만드는 데 숙종 때는 5문의 비용이 들었지만, 이제는 8문의 비용이 드는 셈이었다. 조선은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농업국이어서 가뭄이 들거나 수해를 입기라도 하면 재정 수입이 크게 줄어들었다.

화폐 주조 수익은 부족한 재정 수입을 보충하는 데 톡톡한 효자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엽전 10닢 만들면, 2닢밖에 남지 않고서야 재정에 보탬이 될 리 없었다. 좌의정 김병학의 방책이란 1문짜리 상평통보보다 무게를 5배 늘려서 100문짜리 당백전을 찍어내자는 것이었다. 당백전을 주조하면 상평통보보다 산술적으로 20배나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실로 ‘일당백’의 묘책이었다.



‘일당백’의 묘책, 그러나…


경복궁 근정전.
조선은 개국 초부터 광산 개발에 소극적이어서 상평통보의 원료인 구리와 주석을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왔다. 구리와 주석의 수입 가격은 해마다 올랐고, 공급마저 원활하지 않았다.

재료비가 상승한다는 것은 화폐 주조 수익률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수익률 감소보다 더 심각한 것은 화폐 공급 부족에 따른 전황(錢荒)이었다. 시장은 게걸스럽게 화폐를 집어삼키는데, 재료가 부족해 화폐 공급은 원활하지 않았다.

고액전 주조는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이었다. 고액전 주조의 필요성은 김병학이 처음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영조 7년(1731) 호조판서 송진명이 고액전 주조의 필요성을 건의한 이래 당이전(當二錢), 당오전, 당십전, 당백전 심지어 당천전짜리 고액전을 주조하자는 요구가 주기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고액전 주조 문제는 논의만 무성할 뿐 한 차례도 실행되지 않았다. 동전을 주조하는 근본은 돈이 흐르게 하는 데 있지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으며, 고액전 주조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볍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신중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고종은 김병학의 건의대로 당백전 주조 문제를 의정부에서 논의하도록 했다. 11월 6일 의정부에서 열린 경연에서 당백전 주조에 완곡하게나마 반대한 사람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두순뿐이었다.

“화폐의 무게나 크기를 갑자기 바꾸면 백성들이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불신하는 폐단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바꿔야 한다면 우선 당십전(當十錢)을 사용하여 유통이 순조롭게 되는가 알아보고 나서, 서서히 당백전의 시행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가벼운 것을 먼저 시험하여 무거운 것을 어떻게 할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다만, 당십전이나 당백전은 만들기는 쉬운데 이익은 너무 많아, 몰래 주조하여 하루아침에 몇 곱절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신은 이를 심려하는 바입니다.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시어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우의정 류후조는 당백전 주조를 조건 없이 찬성했다.

“방금 변란을 겪고 나라의 지출이 날로 늘어 재정이 어렵고 백성들의 곤란이 자심한 만큼 마땅히 재정을 넉넉히 하는 방책부터 강구해야 합니다. 당백전을 주조하자고 한 좌의정의 의견은 실로 옛일을 상고하고 오늘의 형편을 참작한 훌륭한 계책입니다. 다만, 화폐를 유통시키는 일은 관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나, 수입과 지출을 따지고 절약하는 것은 성상께 달려 있으니, 이를 유념하십시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의견을 들으시어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경연에 참석한 고관들은 류후조와 마찬가지로 앞 다투어 당백전 주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백전 주조가 절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김병학의 뒤에는 대원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정부의 보고를 받은 어린 국왕은 호조 주관으로 금위영에서 당백전을 주조하라고 전교했다.

대원군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일이었던 만큼, 호조는 국왕의 전교가 떨어지기 무섭게 당백전 주조에 돌입했다. 의정부 경연이 끝난 지 불과 한 달 후인 12월 10일 시장에는 ‘호대당백(戶大當百)’이라는 자호(字號)가 찍힌 당백전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상평통보가 사용된 200여 년간 총 발행량은 500만 냥 정도였는데, 당백전은 주조되기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1600만 냥이 발행되었다.

상평통보 5닢 찍어낼 비용으로 100닢 가치가 있는 당백전을 찍어내다 보니, 20%에 불과하던 화폐 주조 수익률은 단숨에 360%까지 치솟았다. 대원군은 당백전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관아의 지출과 수납에는 반드시 당백전과 상평통보를 2대 1의 비율로 섞어 쓸 것을 지시했다.

경복궁 중건과 군비 증강을 위해 발행된 당백전. 상평통보보다 5배의 실질가치가 있었음에 반해 100배의 액면가로 발행돼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당백전을 훈련도감과 각 군영에 수만 냥씩 내려보내 군비로 지출하게 하고, 각 도에 수만 냥씩 풀어 관아의 경비로 사용하게 했다. 빈집에 소 들어간 것처럼 온 나라가 일시에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작스런 통화량의 증가는 물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당백전 발행 직전 1섬에 7~8냥 하던 쌀값이 불과 1년 만에 44~45냥으로 6배 치솟았다. 상평통보가 통용되던 200여 년간 물가 상승률이 2배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폭등이었다.

물가 폭등으로 민생이 어려워지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백성이 속출하자, 대원군은 6개월 만에 당백전 발행을 중지하고 물가 잡기에 나섰다.



대원군, 시장과 싸우다

하지만 시장에 이미 1600만 냥의 당백전이 풀린 데다 민간에서 불법 주조한 당백전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당백전의 가치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백성들은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당백전을 보유하려 하지 않았고, 어쩌다 당백전이 손에 들어와도 하루라도 빨리 써버리려고 애썼다.

대원군은 물가 상승의 원인이 당백전을 주조한 탓이 아니라 민간의 불법 주조가 성행한 탓이라며 엉뚱한 곳으로 책임을 전가하고는, 불법 주조범은 참수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상평통보를 비축하고 사용하지 않는 상인을 소환해 강제로 유통시키게 했다. 조정이 당백전의 신용을 보장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관아에서 징수하는 조세와 원납전은 모두 당백전만 사용하도록 하는 한편, 민간에서 상평통보를 징수해 당백전으로 환납(還納)하는 관리들을 색출해 처벌했다.

그래도 별다른 효과가 나지 않자, 급기야 민간의 상거래도 1냥(100전) 이상은 반드시 당백전만 사용하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백성들은 상평통보는 손에 들어오는 족족 퇴장시킨 반면, 당백전은 웬만하면 받으려 하지 않았고, 재수 없이 받게 되더라도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했다.

고종 5년(1868) 10월, 대원군은 당백전 발행 1년 10개월 만에 시장에 백기를 들고 당백전의 통용을 금지했다. 민간에 남아 있던 당백전은 상평통보나 청전(淸錢: 청나라 동전)으로 바꿔주었다. 대원군은 당백전 주조 실패에 따른 재정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상평통보보다 절반에 불과한 가치를 지닌 청전을 수입해 상평통보와 동일가로 유통시켰다.

그 결과, 그로부터 30여 년 후 조선을 찾은 영국인 이사벨라 비숍은 다음과 같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선 엽전의 가치는 1달러에 3200닢에 달한다. 엽전은 수백 개씩 밀짚 끈에 꿰어져 있는데, 세거나, 운반하거나, 지불하는 것 모두 성가신 일이다. 나는 내륙 지방을 여행하기 위해 영국 돈 10파운드에 해당하는 일본 돈 100엔을 엽전으로 바꿨는데, 이를 운반하려면 인부 6명이나 조랑말 1필이 필요하다.”(‘한국과 이웃나라들’, 1897)

‘원해서 바치는 돈(願納錢)’인가 ‘원통하게 바치는 돈(怨納錢)’인가
백성의 원성으로 중건된 경복궁
고종 2년(1865) 4월 2일, 대왕대비 신정왕후는 경복궁 중건을 지시하고 대원군에게 총책임을 맡겼다. 대원군이 구상한 것을 수렴청정하던 신정왕후에게 요구해 발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원군은 집권 기간 어떠한 공식적인 직책도 맡지 않았지만, 경복궁 중건 사업을 위해 설치된 영건도감의 주요 보직에 측근을 임명해, 이들을 통해 국정을 조정했다.

경복궁 중건 재원은 주로 원납전(願納錢)으로 마련했는데, ‘원해서 바치는 돈’이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원납전 모금에는 매관매직이나 강제 할당 등의 편법이 총동원되었다. 고종 5년 중건 사업이 일단락될 때까지 대원군은 총 780만 냥의 원납전을 모금했는데, 그중 왕실과 종친이 낸 40만 냥을 제외한 740만 냥이 민간에서 모금한 것이었다. 가혹하게 모금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원납전이 아니라 원납전(怨納錢: 원통하게 바치는 돈)이라 비아냥댔다.

원납전으로도 사업비를 충당하기 어려워지자, 대원군은 당백전을 남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갖은 명목의 세금을 징수했다. 서울 사대문을 통행할 때 문세전(門稅錢)이란 통행세를 거뒀다. 지방에서는 장정의 수를 따져 세금을 징수했는데, 백성들은 이를 불알전(腎囊錢)이라고 비꼬았다. 그 밖에도 전답을 조사하여 수용전(水用錢)이라는 물세를 징수하고, 사용하다 부서진 솥, 보습, 가래 등을 할당량을 정해 수집하기도 했다.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서울대 국문과 및 같은 학교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넘나들며 한국 근대에 관한 다양한 글을 발표하고 있다. 저서 『황금광시대』(2005), 『경성기담』(2006), 『럭키경성』(2007), 『경성자살클럽』(2008) 등으로 화제를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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