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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erenade] 소싯적 꿈 되살려준 ‘음악의 낙원’

[Seoul Serenade] 소싯적 꿈 되살려준 ‘음악의 낙원’

서울에서 사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아래의 장소들이 언급될 듯하다. 청계천, 삼청동, 경복궁, 이태원, 인사동, 압구정동, 홍대 입구, 여의도 공원…. 외국인을 위한 서울의 관광 안내서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곳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어느 관광 안내서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불결하고, 칙칙하고, 낡아빠진 4층짜리 건물이어서일까?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라. 결코 출입 금지구역도, 우범지대도 아니니까. 바로 낙원상가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그곳에 가면 온갖 악기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놀라운 별천지가 펼쳐진다.

나는 그 별천지를 우연하게 찾아냈다. 실은 영화를 볼 요량으로 영화 광고를 열심히 쳐다보다가 필름포럼(옛 허리우드 극장)이 있는 낙원상가를 알게 됐다. 때마침 한국어로 제작된 영화만 상영된다는 말에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근데 왠지 모를 호기심에 이끌려 그 건물 2, 3층으로 올라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내 눈앞에 아찔한 광경이 펼쳐졌다.

복도마다 빼곡히 놓인 피아노, 수백 개는 너끈히 될 듯한 가게를 가득 메운 기타, 앰프, 만돌린, 바이올린, 밴조, 심지어 하와이 원주민들이 쓰는 4줄 현악기 우쿨렐레까지-. 지금은 홍보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나의 소싯적 꿈은 달랐다. 그때만 해도 멋진 록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를 꿈꾸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표주자 격인 영국 출신의 ‘예스’ 나 캐나다 토론토에서 결성된 3인조 록밴드 ‘러시’나, 그것도 아니라면 보다 정통파에 속하는 ‘밴 헤일런’이나 ‘더 후’ 같은 록 그룹의 멤버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연주 기법을 향상시키려고 밤에도 음악전문지를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록그룹의 멋진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내 꿈은 꿈으로 그쳤다. 고교와 대학 시절,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조그만 밴드에서 연주를 했던 정도였다. 나의 최고 전성기를 꼽으라면 워싱턴 DC의 유명한 ‘9:30 클럽’에서 일당 100달러를 받고 연주하던 시절이었던 듯하다(맥주는 무료로 마셨다).

그래도 그 생활이 좋았고 그 시간들을 즐겼던 듯하다. 결국은 음악과 무관한 직업을 갖게 됐지만 악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아직도 결코 식지 않았다. 낙원상가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모든 가게가 한 곳에 밀집해 있다는 점이다. 나 같은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얼핏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게란 한 곳에 모여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다른 동네로 가는 편이 훨씬 낫다는 ‘시장원칙’을 어릴 적부터 주입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낙원상가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가격과 품질을 서로 비교해가며 쇼핑하기에 안성맞춤일 뿐 아니라 상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악기점으로 봐도 미국의 여느 대형 악기점보다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랜드 피아노, 각종 녹음 소프트웨어, 아코디언 등 모든 악기와 장비가 한 지붕 아래에 있다(도쿄 신주쿠에서도 이런 곳은 구경하지 못했다). 조금만 발품을 팔아도 필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게다가 영어로도 충분히 의사전달이 가능하다(가령, “어, 시퀀서 있어요?”라고 물으면 된다. 시퀀서는 여러 가지 사운드를 작곡·편곡·재생에 이용하게 하는 장치다).

그곳을 어슬렁거리다가 ‘놀라운’ 수확물을 건진 적도 있다. 록음악의 전설인 에릭 클랩턴이 크림 밴드 시절에 쓰던, 몽환적 분위기의 무지개 무늬가 새겨진 기타의 완벽한 복제품을 발견한 까닭이다. 물론 낙원상가엔 정말 ‘소름’ 돋게 하는 물건도 있다. 흉측하게 생긴 기타와 볼썽사나운 기타 스트랩(멜빵)이 그런 예다.

특히 1980년대 제작된 집채만 한 가라오케 기계와 시퀀서는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덕분에 이젠 완전히 무용지물이 됐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누군가의 ‘낙점’을 기다린다. 그렇다고 내가 윈도 쇼핑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하고 따뜻한 음색을 가진 아름다운 야마하 피아노를 거기서 구입했다.

그 피아노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가장 아끼는 물품 목록 중에서도 맨 위에 올라있다(이웃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악기점 주인들에게 어떤 신제품이 나왔는지를 직접 묻곤 한다. 그 과정에서 외국인과 한국인을 불문하고 음악인들과도 친해질 기회도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면 상가 복도를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듯하지만 실은 놀라운 효과음을 내는 최신형 이펙트 페달(전자기타의 음 변환 장치), 드럼 스틱, 악보대의 출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어디서 살든지 간에 나는 악기점 ‘탐사’를 즐긴다. 낙원상가 같은 곳이 서울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더군다나 내 사무실과도 가깝다. 물론 낙원상가는 낡고, 불결하고, 어쩌면 초라하다. 그래도 애착을 떨칠 수 없어 다시 찾곤 한다. 그러고 보니 기타 줄을 새로 갈아 끼울 때가 된 듯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필자 필립 라스킨은 홍보회사 버슨-마스텔라 한국지사 대표로 5년째 서울에서 살고 있다. 영어로 보내온 글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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