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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임금 위임하고 고용 지켰다”

“회사에 임금 위임하고 고용 지켰다”

오종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은 지난달 25일 노조 창립 이후 처음으로 회사에 임금협상을 위임했다. 이에 경영진은 급여의 30~100%를 경영위기 상황이 해소될 때까지 반납하기로 결의했다. 파격적인 노사 협력의 단초를 마련해낸 오종쇄 위원장을 지난 3일 울산에서 만났다.

'되는 집안은 가지나무에도 수박이 열린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 보기엔 현대중공업이 그런 집안 같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자 노조가 먼저 무교섭 임금타결을 선언했다. 회사 측에 임금협상을 위임한 것이다.

여기에 사측은 경영위기가 해소될 때까지 부회장과 사장이 월급 전액을, 부사장과 임원이 각각 50%와 30%를 반납하기로 결의했다. 경제위기 후 일정기간 경영진이 10~20% 임금을 반납한 경우는 있지만 현대중공업처럼 30~100%를 무기한 반납하기로 결의하기는 처음이다.

노조의 ‘강수’에 사측 또한 ‘강수’로 받아친 것이다. 노조는 경영실패를, 경영자는 구조조정을 얘기하는 여느 회사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현대중공업의 성숙한 노사문화와 관련해 오종쇄 노조위원장은 상호 신뢰가 뒷받침된 것이라며 “사측도 뭘 풀어줘야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오 위원장은 “현대중공업에는 노사문제만 20년 이상 맡은 임원이 있는데, 이분은 한편으로는 회사 입장을 우리에게 설득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우리 입장을 사장에게 설득하기도 한다”고 예를 들었다.

그는 “조합원들의 의식도 많이 성숙됐다”는 자평도 잊지 않았다. >> 지난 14년간 무쟁의로 ‘어용’이란 의심을 받고 있는데 이번에는 임금교섭마저 회사에 위임했다.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남은 권리인 단결권이 소용 없는 것 아닌가? 즉 노조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노동3권이 왜 존재하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복지향상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현대중공업 노조가 단체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대화를 통해 타협하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쟁의를 안 했다고 노동자들의 권리나 복지가 나빠지진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신뢰가 두터워졌다. 올해는 노동계가 아무리 부정해도 세계 경제가 유례없는 불황이다. 물론 현대중공업은 몇 년 전에 따놓은 일감으로 올해 경영환경이 괜찮다. 그렇다고 올해 임금 인상하고 1~2년 뒤에 실적이 나빠지면 구조조정을 당한다면 그게 옳은 전술인가? 1년만 내다보면 답이 나온다. 그래서 올해엔 ‘임금은 회사에 위임할 테니 고용은 3년간 회사가 보장해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번에는 위임이라는 전술로 조합원의 고용을 지켜낸 것이다. 노동3권은 노동자를 위해 있는 것이지 노동자가 노동3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지난 4일 임금위임안 서명식을 가졌다. 서명안에는 2009년 임금 교섭은 회사에 위임한다는 조항과 2011년 5월 30일까지 고용을 보장한다는 것 외에도 사내 협력사 창업 중단, 국내 공장 물량 우선 확보 등이 포함돼 있다. 최대한 현재 고용인원을 유지하기 위해 노사가 노력한다는 뜻이다.

현대그룹을 떨게 한 ‘권오사’
오종쇄 위원장은...

오종쇄 위원장은 울산고를 졸업한 뒤 중소기업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다 1983년 현대엔진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1987년 현대엔진 노조를 만들어 교육홍보부장을 맡아 그해 파업을 주도했고 그 파업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발화점이 됐다. 오 위원장은 해고됐고 이듬해 해고자 신분으로 파업을 지원하다 제3자 개입협의로 구속됐다.

1991년 현총련 결성 후 두 차례 더 구속됐다. 당시 현대그룹 경영진에 ‘권오사’는 골칫거리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현대엔진 노조 3인방인 권용목, 오종쇄, 사영훈의 성을 따 만든 이 별칭에도 오 위원장의 이름이 올라있다. 오 위원장은 당시 정주영 회장이 “절대 복직시키지 말라”고 말했을 정도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민주노총 금속연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2003년에 현대중공업으로 복직됐다. 2007년 현대중공업 제17대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됐으며 임기는 올해 10월까지다.



>> 지나치게 경영자 마인드가 강한 것 아니냐? 노조위원장이 패배주의적으로 행동한다는 비판도 있다.
“나는 민주노총위원장도, 금속연맹위원장도 아니다.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내 사업장 노조원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왜 경영자 마인드인가? 고용 문제보다 노동자에게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는가? 그걸 지키기 위해 공부도 하는 거고 경제 상황도 예측해 보는 거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경제위기에 눈을 감은 채 조합원에게 더 많은 임금과 고용보장을 함께 공약하는 게 무책임한 것 아닌가? 그건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

오 위원장 책상에는 ‘투쟁’이 아니라 ‘혁신’ 관련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내가 혁신 이야기를 하니까 책 쓴 분이 강의하고 싶다면서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 경영이나 혁신 관련 책도 보나?
“가끔 본다.”



>> 이런 책 보는 노조 위원장이 또 있나?
“서울지하철 노조의 정연수 위원장도 보는 걸로 알고 있다. 더러 있다.”



>> 사상이 흐려지게 왜 보나?
“경영자를 상대로 싸우는데 경영을 모르면 싸움이 되나? 꼭 싸움이 아니라도 대화하려고 해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 경영자들도 노동운동이나 노동자의 현실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경영자가 노동자를 연구하지 않고 경영할 수 있나?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서로 상대방을 모르니까 싸움만 격렬해지는 것 같다.”

오 위원장은 온화한 인상이었다. 얼굴은 주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경영 마인드까지 갖추고 있어 경영자 풍모도 있었다. 하지만 악수한 그의 오른손은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갔고, 나머지 하나도 온전하지 못했다. 2003년 작업 중 다친 것이라고 했다.



>> 임기가 언제까지인가?
“올해 10월까지다.”



>> 개인적으로 본다면 굳이 이런 협상을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 올해 임금 좀 올리고 내년에 나 몰라라 하면 된다. 그러면 인기는 좀 올라가겠지. 하지만 내 임기에만 문제 없이 가겠다는 것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올해 임금 몇% 올리고 내년에 대규모 삭감이나 정리해고가 들어오는 것 아닌가? 노동운동은 그렇게 꼭 근시안적으로 해야 되나?”



>>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만약 위원장의 경기예측이 틀린다면 조합원들은 손해를 보는 것 아닌가?
“회사를 1년 다니고 말 것 아니지 않은가? 만약 경기 침체가 일찍 끝난다면 현대중공업은 이번 결정을 바탕으로 수직 상승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그때 우리 몫을 요구해도 늦지 않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그 정도의 목소리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위기가 장기로 가면 노조는 무대책으로 있다가 해고 반대 투쟁만 하면 되나? 투쟁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는 건 비과학적이다.”



>> 이번 결정을 대우조선 노조와 금속연맹이 비난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건 좋다. 예를 들어 ‘오종쇄는 어용이다’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건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비난은 없는 사실을 근거로 했다. 그래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예를 들어 ‘현대중공업의 안전화는 10년간 안 바뀌었다’ ‘산재사고가 굉장히 많다’ 뭐 이런 식인데 이게 말이 되나? 산재율이 가장 낮은 사업장이 현대미포조선, 그 다음이 우리다. 수치로 증명됐다. 2007년 대비 2008년 해서 산재율이 36% 줄었다. 이렇게 공격하는 건 노동조합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노동운동 하는 사람의 매너가 아니다.”



>> 노동운동계에서는 현대중공업 노조가 너무 쉽게 투쟁을 양보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 때문에 더 영세한 기업의 노조들이 큰 압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면이 있다. 하지만 선택의 문제다. 단위사업장별로 임금을 선택하는 곳은 임금인상에 집중하는 것이고, 이번 위기에 고용 문제를 중요하게 보면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임금과 고용을 다 붙잡으려고 하면 어떤 자본가가 거기에 응해 주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자본가다. 임금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사업장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미안한 감이 있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모범일 수도 있다. 고용 보장을 원하는 회사에는 우리 방식이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 노조 입장에서는 더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이익이 되지 않나? 협상이란 그런 거 아니냐?
“대화해서 안 되는 것은 투쟁해도 안 되는 거고, 투쟁해서 되는 것은 대화해서도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투쟁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투쟁한다. 성과를 못 얻어도 조직을 유지하고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노조는 그렇게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지금 현대중공업이 처해 있는 조건과 형편을 고려할 때 웬만하면 대화해서 타협하고 합의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이미 그 정도의 수준에 와 있기 때문이다.”

오 위원장은 자신의 선택을 완전무결하거나 유일한 대안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가 ‘현실적인 선택’을 한 데엔 그럴 만한 경험이 있다.

“1992년에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 간부 때 당시 현대자동차 노조의 교육부장에게 내가 제안했다. ‘자동차 사업은 필연적으로 구조조정이 들어온다. 그러니 조합에서 월 5000만원씩 투자해 직업전환 교육이나 구조조정에 대비해 연구하자’고. 그러나 자동차 노조에서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97년에 외환위기가 오고 98년에 1만 명 정리해고가 생기지 않았나? 국내 최강의 현대차 노조도 그런 상황이 오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2007년부터 노동문화정책연구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거기서 ‘조선산업 전망과 노사관계 방향’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이번 상황이 왔다.”



>> 14년 무쟁의와 이번에 임금교섭을 위임할 만큼 사측은 말이 좀 통하고 믿을 만한 대화상대인가?
“현대중공업이 1974년에 창립돼 이제 36년째인데 세계 1위 조선업체다. 현대중공업은 노동자도 경영자도 각각 그 분야에서 1등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무분규는 처음에는 억지도 좀 있었다. 쟁의투표를 못하게 하기도 했고…. 하지만 14년 동안 오는 건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측도 뭘 풀어줘야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아는 거다. 물론 조합원들도 의식이 많이 성숙되었다.”
오 위원장은 경영설명회도 사업부별로 상세하게 한다고 전했다. “노조 대의원에게는 부서별로 경영현황설명회도 한다. 대의원쯤 되면 생산의 흐름과 내용, 전망을 잘 알고 있다. 또 노사협력실을 통해 노조와 상시로 채널을 가동하고 있다.”



>> 경영현황설명회는 대다수 기업에서 하는 것 아닌가?
“경영현황설명회도 질이 다르다. 예를 들어 현대중공업에는 노사문제만 20년 이상 맡은 임원이 있다. 이분은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23년 역사와 함께한 분이다. 어떤 면에서는 노조 대의원이나 위원장보다 노조를 더 잘 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노하우, 역량의 축적이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 그분은 한편으로는 회사의 입장을 우리에게 설득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입장을 사장에게 설득하기도 한다.”

겉에 드러나 있진 않지만 현대중공업처럼 고졸 사원으로 입사해 20년간 노사문제만 전담한 임원을 보유한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는 많은 차이가 있다. 노조 문제의 중요성을 경영자가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노동운동권에서는 조합주의자로 비판을 많이 받겠다.
“(흔쾌한 어조로) 맞다. 전투적이지 않다, 투쟁적이지 않다, 이런 얘기도 듣는다.”



>> 기분이 어떤가?
“조합원의 판단에 맡긴다.”



>> 쟁의 없는 회사가 되려면 경영자가 노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한마디해 달라.
“한마디로? 불가능한 얘기다. 노하우는 없다.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뢰를 얻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진솔하게 한 번만이라도 노동자의 위치로 돌아가 보면 좋겠다.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고민 없이 ‘노조 때문에 못 살겠다’고만 하면 안 된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 핵심은 뭔가?
“신뢰다.”



>> 신뢰를 어떻게 얻나?
“사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굳이 억지로 답을 찾는다면 자존심 다 버리고 만나야 한다. 내가 ‘사장이네’ 하고 만나면 상대편은 ‘노조위원장이네’ 하고 나올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대화가 아니라 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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