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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통계 안 잡힌 도산기업 수두룩

정부 통계 안 잡힌 도산기업 수두룩

‘시한부’ 선고를 받은 기업이 날로 늘고 있다. 정부 통계에는 잡히지 않은 사실상 도산 기업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부의 내부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874건이었던 도산 신청건수가 올해엔 4000건을 넘을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도산 신청이 승인되면 해당 기업은 영업활동을 영위하기 어려운 ‘빈 껍데기’ 회사로 낙인찍힌다.

'2008년 9월 임금 보름 늦게 지급, 10월 50% 지급, 11월 이후 임금 지급 무기한 연기….’ 글로벌 불황이 한국경제를 휘감고 있는 지금, 부동산 시행업체 A사는 사실상 도산 상태다. 뜨문뜨문 나오던 임금은 지난해 11월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매출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지만 운영자금을 메우기 급급하다.

부쩍 늘어난 금융비용도 감당하기 어렵다. A사의 대출액은 적게 잡아도 500여억원. 이 가운데 급전을 위해 조달한 사채도 있다. 금리는 평균 15% 수준이다. 매달 갚아야 할 이자만 해도 수억원이 훌쩍 넘는 셈이다. 임금지급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 이 회사 직원들은 최근 노조 회의에서 중대 결단을 내렸다. 노동부에 ‘A사의 도산을 인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하자는 데 합의한 것이다.



사실상 도산기업 증가추세

만약 노동부가 이 회사를 도산업체로 인정하면, 이들은 밀린 임금 중 일부를 받을 수 있다. 반면 A사는 사실상 부도업체, 이를테면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사상 유례없는 불황이다. 대다수 기업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숨통이 끊어진 곳도 많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부도 중소기업은 649곳에 달한다.

월 216개, 하루 7개 기업이 문을 닫은 셈이다. 지난해 파산을 신청한 법인도 전년 대비 44% 증가한 191곳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전주곡’일 뿐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법적으로 부도 또는 파산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도산한 기업도 적지 않다. 정부 통계에는 잡히지 않은 도산기업, 이를테면 ‘시한부 사망선고’를 받은 곳이 상당수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사실상 도산기업’은 무엇일까? 지방노동관서의 장은 근로자가 ‘도산기업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면, 해당 회사의 영업실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 승인할 수 있다. 이는 아직 파산(부도)하지 않은 회사의 영업활동을 검증하는 것이다. 도산기업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해당 기업은 사실상 도산기업이 되고, 근로자는 미지급 임금을 받을 수 있다.

A사의 사례처럼 말이다. 노동부 근로조건지도과 금정수 사무관은 이를 “사실상 또는 행정절차에 따른 도산”이라며 “도산기업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임금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경영상태가 악화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노동부엔 최근 ‘도산 사실 인정 신청서’가 쇄도하고 있다.

노동부의 내부 자료에 따르면 도산기업 신청건수는 지난해 총 2784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5년(2186건), 2006년(2247건)보다 각각 27%, 23% 증가한 수치다. 올해 들어선 증가폭이 더욱 크다. 2009년 1월에만 360건이 접수됐는데, 이런 추세라면 도산기업 신청건수가 전년 대비 55% 증가한 4320건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해당 회사가 도산기업으로 인정되면 국가가 밀린 임금 등을 대신 지급한다. 이를 ‘체당금’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2008년 10월 이후 급증하고 있다. 노동부 자료를 보면 지난해 10월 체당금 지급액은 123억원에 그쳤다. 하지만 12월 274억원으로 2배 이상 껑충 뛰더니 올 1월엔 289억원을 기록했다.

불과 3개월 만에 134% 증가한 것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실상 도산기업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이다. 열린노무법인 하해규 노무사는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사실상 도산기업으로 인정되면 곧바로 체당금이 지급됐다”며 “하지만 요즘은 도산기업 인정건수가 급증해 체당금을 받는 데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린다”고 전했다.

문제는 ‘시한부 선고’를 받을 기업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기업의 자금회전이 원활하지 않다. 내수침체 탓에 거래가 이뤄지지 않아 창고에 쌓인 제품이 자금줄을 옥죄는 ‘악성재고’로 변한 지 오래다. 기업대출도 신통치 않다. 한국은행의 ‘2009년 2월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은행의 기업대출(원화 기준) 잔액은 467조1000억원으로 1조5000억원 늘어나는 데 그쳐, 전월의 증가폭(5조8000억원)을 크게 밑돌았다.

금융기관이 여전히 돈줄을 죄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중앙회가 최근 152개 중소업체를 직접 방문해 조사한 결과, 정부의 유동성 지원정책에도 중소기업 중 78%는 자금사정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자 임금을 제대로 줄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임금 미지급이 기업 파산 부추겨


반대로 근로자는 지금 돈이 필요하다. 실질소득은 감소하는 반면 물가는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실질소득은 전년 대비 2.1%포인트 줄었다.

명목임금도 같은 기간 2.1%포인트 줄어 1998년 2분기 이후 처음으로 감소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원화가치 하락 등의 영향으로 물가는 껑충 뛰었다. 달러가치는 지난해 1~2월 943.4원에서 올해 같은 기간 1388원으로 대략 47%나 올랐는데, 이에 따라 소비자물가 역시 2.5%포인트 치솟았다.

소득은 줄었는데, 물가는 오히려 급등한 셈이다. 이처럼 지독한 침체기에 임금체불을 견딜 수 있는 근로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부도기업 인정’ 신청건수가 날로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경제전문 이성희 변호사는 “경기불황 탓에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회사가 늘고 있지만 근로자들 역시 예전처럼 참고 견디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근로자가 직접 ‘부도 사실 인정 신청서’를 내는 사례가 급증하는 것은 ‘밀린 임금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노동부에 의해 사실상 도산기업이 된 곳은 실제로 부도 또는 파산할 확률이 높다는 지적이다. 금정수 사무관은 “도산 인정 기업들은 대부분 사업폐지를 하거나 파산하게 마련”이라고 밝혔다. 하해규 노무사도 “행정적 절차에 따라 도산기업으로 인정된 것이기 때문에 법적 파산만 아닐 뿐 실제론 도산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기업이 증가한다는 것은 줄부도 사태의 ‘전조’라는 얘기다.

이성희 변호사는 “수년간 건실하게 유지돼 온 중소기업이 임금 미지급 등의 이유로 무너지는 안타까운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며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대기업과 은행권, 관계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금지원을 포함한 전방위적 구제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기문 중기중앙회장도 “현장조사 결과 중소기업의 75%가 적자 또는 부도위기에 놓일 정도로 중소기업 사정이 어렵다”며 정부의 획기적인 대응책과 내수진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망선고를 받은 기업들, 이들은 지금 한국경제에 경고등을 켜고 있다.
용어설명
체당금 기업이 도산 또는 사실상 도산에 빠져 있는 경우, 임금·휴업수당 및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퇴직한 근로자에게 사업주를 대신해 국가가 지급하는 돈. 도산 등 사실인정 사업주가 경영악화 등으로 인해 사실상 도산상태에 빠진 경우, 지방노동관서의 장이 근로자의 청구에 의해 이를 도산으로 인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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