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콕 집을 것 없이 다 어렵다”
“콕 집을 것 없이 다 어렵다”
불 꺼진 미분양 아파트. |
고급 의료기기를 수입해 국내에 판매하는 K사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요즘 어떠시냐?”는 안부인사가 편치 않은 듯했다. 이 회사는 제품을 100% 외국에서 들여온다. 1년 사이에 환율이 900원에서 1500원으로 급등했으니 사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는 “환율을 따르자면 1억원짜리 제품을 1억4000만원에 팔아야 하는데 1억원에 내놔도 안 팔린다”며 “다 어렵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나마 20년 동안 회사를 이끌어온 노하우와 영업망이 있어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있다는 그다. 고액의 의료시술을 하는 장비가 주력제품인 것 또한 방어막이 됐다. 부자들의 지갑은 경기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K사장은 “우리는 물론이고 주변에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진 회사가 많다”며 몇 번이나 “어렵다”는 말을 내뱉었다.
환율급등, 소비감소, 자금압박이라는 3대 악재에 시달리는 중소기업 CEO는 힘겨워 보였다. 지난 3월 11일 중소기업중앙회는 152개 중소기업을 방문조사한 결과 중소기업의 75%가 ‘현재 경영상황이 심각하다”고 답했다고 발표했다. 결과에 따르면 78%가 자금 사정이 어렵고 38.5%가 대출을 거절당한 적이 있다.
수출 상황에 대해서는 71.5%의 중소기업이 수출 물량이 감소했다고 답했다. 대기업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3월 12일 회장단회의를 열고 상장 대기업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 71조원 가운데 1년 이내에 갚아야 하는 단기자금이 51조원이라고 밝혔다. 동유럽 국가의 위기, 미국 대형 상업은행의 위기 등 해외 악재가 연이어 터지면서 회장단이 채무상환 만기연장(롤오버)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국내 기업이 불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가장 큰 이유는 ‘수요 감소’다. 소비자가 경기에 얼마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어디 한 군데 콕 집어 말할 필요 없이 다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삼성증권의 김성봉 투자정보파트 연구위원은 “제약, 음식료 같은 필수소비재 업종은 상대적으로 덜하고 정보통신(IT), 자동차처럼 경기에 민감한 소비재는 압박이 심할 것”이라며 “특히 산업재의 불황이 가장 심각하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이 최대 피해자로 꼽은 산업재 부문엔 건설, 조선, 철강 등의 업종이 속한다. 그 어디보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곳은 건설업체다. 한 건설 하도급업체 관계자는 “대형 건설회사가 공사비를 보전해 주기는커녕 적자라는 소문이 돌아 부도가 나면 공사비를 받지 못할까 봐 무척 불안하다”고 말했다.
건설업계에는 곧 있을 2차 구조조정에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이 될 건설사 명단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그중 한 곳과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회사 관계자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고 어렵기는 다 마찬가지”라며 더 이상의 답변을 거부했다.
올해 조선 수주 실적? 한 척
미래에셋증권의 변성진 선임연구원은 건설업계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미분양’을 꼽았다. 결국 집을 사려는 수요가 없다는 얘기다. 변 연구원은 “지방 미분양률이 40%에 이른다”며 “집 짓는 데 들어가는 돈은 100% 써야 하는데 사람이 반만 들어오니 당연히 어렵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토목공사를 하면 선수금을 받으니 더 유리한데 국내 건설사 가운데 토목사업을 하는 곳은 30%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상장 건설업체 41개의 알트먼 부실지수가 보통 1.8 수준”이라며 “중소 건설업체들은 줄부도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알트먼 지수란 기업경영의 부실예측을 분석하기 위한 지수로 에드워드 알트먼 미국 뉴욕대 교수가 1960년대에 개발했다. 보통 2.67 이하면 부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2.7을 넘는 건설업체가 단 한 곳도 없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2월에 비금융 상장사 1576곳의 재무상태를 분석해 40%에 이르는 628개 기업의 알트먼 지수가 1.81보다 낮다며 부실기업으로 진단하기도 했다. 조선업체는 당장은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다. 기존 수주로 받은 선수금이 현재 매출을 이끌어 가는 덕이다.
한 증권사의 조선 담당 애널리스트는 “그렇다 해도 곳간에 있는 돈으로는 2~3년밖에 버티지 못한다”며 “신규 수주가 계속 없으면 올해 4분기 이후 조선업계의 돈이 메마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동차 판매대수 70년대 이후 최대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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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 조선업체의 수주 잔액은 2000억 달러 정도인데 대우증권은 이 가운데 915억 달러어치가 발주 취소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모든 산업에 기초 소재로 사용돼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철강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담금질에 나섰다.
대체로 철강업체는 기업 규모가 크고 안정돼 있어 내부에서 스트레스 해소가 가능할 것이라는 평가다. 포스코는 지난 4분기부터 창사 이래 처음으로 감산 체제에 돌입했다.
최근 원료인 철광석 등의 가격이 하락했지만 호재인 동시에 철강 가격 인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어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꽁꽁 언 소비심리로 인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시장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기업은 재무 악화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자동차업계도 수요 감소로 크게 위축됐다. 한국투자증권의 서성문 연구원은 “자동차는 장치산업이라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1970년대의 1차 오일쇼크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판매대수가 줄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1월 글로벌 판매대수 감소율은 25%, 2월 감소율은 18%다.
올해 들어 외국에 수출한 자동차 대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7.9%나 감소했다. 수출길이 막히면서 쌍용자동차는 지난달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GM대우는 자금 수혈을 필요로 한다. 이 회사의 공장 가동률은 현재 50%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다. 수출 비중이 큰 현대·기아차는 환율 급등으로 다행히 위기에서 한발 비켜나 있다.
완성차업체가 휘청이니 하도급업체가 따라 흔들려 재무 상태가 좋지 않은 2, 3차 하도급업체들이 부도를 맞았다. 한국은행이 매월 발표하는 소비자심리지수는 2월 기준 85로 전월(84)보다 1%포인트 상승했지만 2008년 7월부터 계속해 기준치인 100을 넘지 못하고 있다.
또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최근 경제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민간 소비가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4.4% 줄었는데, 이는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이에 정부는 12일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고 6조3733억원을 풀어 저소득 40만 가구에 현금과 소비 쿠폰을 지급하는 등 ‘민생안정 긴급지원대책’을 마련했다.
6개월간의 한시적인 정책이 소비 증가→기업 수익개선→고용 확대라는 선순환 구조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경기도 시흥 시화공단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한 CEO는 “공장이 많이 비어 활력이 없고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푸념하면서도 “빈 공장이 내 공장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했다.
대기업들은 수시로 바뀌는 환경에 경영계획조차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성봉 연구위원은 “IMF 외환위기 때는 기업이 줄부도를 냈는데 정부 정책이나 기업의 재무 상황 면에서 지금이 그때보다는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중견기업 간부는 “어느 때보다 자주 바뀌는 게 요즘 분석 아닌가”라고 오히려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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