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은행 비밀주의 ‘흔들’
스위스은행 비밀주의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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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부들 사이에선 호두 같은 ‘견과(堅果)’로 알려져 있다. 거품이 터지거나 소환장이 날아오는 등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은닉해 둔 비자금 말이다.
손자들의 사립학교 등록금이나 고급 휴양지 마사스 비녀드의 정원사 월급을 꾸준히 주는 데도 필요한 돈이다 (‘허영의 불꽃’이라는 소설을 쓴 톰 울프는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이라면 모두 다 아는 돈”이라고 썼다).
비자금은 대개 미국 국채 같은 안전자산에 투자된다. 그러나 때론 해외에도 맡겨둔다. 스위스 은행이 “후세를 위한 기금”이라고 표현하는 비밀계좌 말이다. 얼마나 많은 비자금이 스위스 은행에 예치됐을까?
그런 비밀계좌를 보유한 부자는 몇 명일까? 최근 미국 상원의 조사에 따르면,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에는 모두 180억 달러로 추산되는 돈이 미국인 4만6000명의 비밀계좌에 들어 있다.
최근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들 미국인 부자의 탈세 혐의 조사에 착수했다(스위스 은행의 미국인 고객들은 이런 비밀계좌에서 나오는 소득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았다). 예상대로 UBS는 반발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300여 년간 부자들의 자금 은닉을 도와줬다. 고객 중에는 나치당원이나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 심지어 이슬람주의 테러분자도 있었다.
미 수사당국이 비밀계좌를 보유한 부자들을 조사하면서 스위스 은행의 영업방식 내막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를 넘어 분노마저 느끼게 된다. 뉴스위크가 검토한 문건과 증언을 보면, 스위스 은행원들은 마치 스파이처럼 활동해 왔다. 온갖 기묘한 방법을 동원해 관계당국의 감독을 비켜갔다.
지난 2월 UBS는 이런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 UBS는 미국의 출입국 절차를 준수하지 못한 사실을 진심으로 뉘우친다. 이런 실수는 스위스와 미국 정부의 다양한 조사, 그리고 우리 은행의 내부 조사에서도 확인됐다.” 다시 말해, UBS는 미국인 부자들이 돈을 불법적으로 해외에 빼돌리도록(또는 미국으로 갖고 들어오기도 한다) 돕는 음성적인 영업활동을 해 왔다는 뜻이다.
이런 얘기를 가장 실감나게 전달하는 사례는 미국인 사업가 이고르 올레니코프(66)다. 엄청난 갑부인 그는 미국 태생의 스위스 은행원인 브래들리 버켄펠드의 도움으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버켄펠드는 치약 속에 다이아몬드를 숨겨 밀반입하는 등 할리우드 첩보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활동을 했다.
올레니코프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522위에 오른 사람이다. 은발머리에 기품이 있는 올레니코프의 가까운 친척 한 사람은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신하였다. 그의 가족은 레오 톨스토이 딸의 금전적 도움으로 공산 치하 러시아를 탈출했다.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부한 올레니코프는 모타운 레코즈의 중역으로 대중음악계에서 일했다.
그 뒤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와 플로리다주에서 상업용 부동산 사업으로 10억 달러 이상을 벌었다. 1990년대 말 미국 은행들의 안전성을 우려한 그는 돈의 일부를 해외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하마제도의 바클레이스은행에, 다음엔 스위스의 UBS에 돈을 맡겼다.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올레니코프는 태도가 부드럽고 말씨가 점잖은 버켄펠드에게 이끌려 UBS와 거래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버켄펠드는 그를 UBS의 지하 비밀금고로 안내했다. 올레니코프는 제네바에 있는 우아한 UBS은행 건물에서 지하 5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지상에서 폭탄이 터져도 끄떡없는 지하 시설이다).
그곳에는 엄지 지문과 얼굴 이미지를 인식하는 소프트웨어 장치가 있었다. 올레니코프는 그런 첨단기술에는 약간 회의적이었지만 UBS 간부들에겐 좋은 인상을 받았다. 시간이 지난 뒤 그는 UBS의 여러 계좌에 2억 달러 상당의 재산을 예치했다. 그 자산 중 일부는 리히텐슈타인의 몇몇 은행에 보관됐다.
그는 그곳에서 왕족 같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 리히텐슈타인의 통치자였던 한스-아담 대공의 영빈관에서 묵었다. 그곳에는 집권 왕가의 일부 절친한 유명인사 친구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왕년의 명배우 캐리 그랜트와 도리스 데이가 서명한 사진들도 있었다. 올레니코프는 UBS와의 거래가 미국 세법에 전혀 위배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았다고 말한다(그러나 일류 변호사와 회계사를 여러 명 거느리는 억만장자가 세금 문제와 관련해 UBS 측 설명에만 의존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어쨌든 그는 2004년 미 국세청(IRS)의 집중조사를 받게 되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조사에서 IRS는 UBS가 그에게 보낸 은행계좌 내역서 사본을 발견했다. 올레니코프는 자신의 비밀 재산 정보를 IRS가 어떻게 그토록 많이 알았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그는 애당초 자신을 UBS로 이끌어간 버켄펠드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40대 중반인 버켄펠드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최근의 얼굴사진은 입수하기 어렵다. 지난해 그가 법정에 출두했을 때 모습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지(誌)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황갈색 피부에 뚱뚱한 체구로 ‘매드 머니’쇼의 진행자 짐 크레이머와 닮았다. 보스턴에서 성공한 신경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버켄펠드는 고등학교 시절엔 마약 복용으로 체포된 적도 있는 불량학생이었다.
그러자 부모는 그를 버몬트주 군사학교인 노위치대학에 보냈다. 규율을 배우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 뒤 버켄펠드는 스위스로 이주해 교과과정이 고되지 않고 화려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은행계로 진출해 출세했다. 머지않아 BMW를 굴렸고, 스위스 남부의 체르마트에 별장도 소유했다.
추측하건대, 버켄펠드의 업무는 돈 많은 미국인 고객들을 포섭하는 일이었다. 그가 UBS 관련 조사에 착수한 미 상원 상임분과위원회(위원장 칼 레빈 의원)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버켄펠드는 부자들을 유인하는 대규모 팀의 일원이었다. “제네바에 약 25명, 취리히에 50명, 루가노에 5~10명을 둔 그 팀은 막강한 조직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은밀하게 활동하는 이 은행원들은 1년에 4~6회 미국을 방문했다. 버켄펠드는 상원 진술에서 “우리는 스포츠 행사, 자동차 전시회, 와인 시음회 등에 자주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런 곳에는 부자가 많이 몰려왔고, 우리는 부동산 사업자, 변호사 등과 어울렸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면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이 나오면 우리는 ‘스위스 은행에서 자금과 계좌를 관리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들은 즉각 ‘아, 계좌를 맡기고 거래할 만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UBS도 이런 잠재 고객 확보 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예컨대 마이애미에서 매년 열리는 대규모 미술 전시회인 아트 바젤 같은 화려한 행사를 후원했다. UBS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미국의 여러 대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했다. 스위스의 정상급 요트 팀인 알링히가 참가하는 요트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UBS는 버켄펠드 같은 포섭 담당 직원들이 은행원보다는 스파이처럼 신중하게 행동하기를 원했다. 2006년 9월자 UBS 문건을 보면 그들에게 지시하는 사항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호텔 객실에서도 ‘책상 위 서류 방치금지 사규’를 준수하라. 노트북 컴퓨터, PDA 등 안전한 장비를 사용하라.
휴대전화는 도청당할 우려가 있음을 명심하라. 출입국할 때는 고객 관련 서류를 지참하지 마라.” UBS의 또 다른 문건에는 FBI 요원이 접근할 때 직원들이 은행 비밀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목도 있다. 버켄펠드가 수사관들에게 말한 내용을 보면, UBS 직원은 고객들에게 은행으로부터 송금받은 돈을 대출금으로 위장하도록 권장했다.
금융소득이라고 사실대로 밝힐 경우 세금이 부과되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미국에서는 외국 은행과의 거래 기록을 파기하라는 충고도 받았다. 또 스위스 은행 신용카드를 사용해 미 수사당국의 추적을 피하라고 권유했다. 버켄펠드는 첩보영화에나 나올 법한 방법으로 고객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에서 고객 돈으로 구입한 다이아몬드를 치약 튜브에 감춰 미국으로 밀반입했다.
그 과정에서 버켄펠드는 공범인 고객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런 증언을 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문건을 보면 그는 2005년 UBS를 떠났다. 그가 말한 퇴직 사유는 회사 측의 불법행위였다. 그는 UBS의 내부 컴퓨터망에서 직원들을 범법행위에 연루시키는 문건을 발견했다. 지시사항이 기록된 그 문건은 미국인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에게 주어지는 ‘스파이 활동 지침’의 일부였다.
버켄펠드는 그 무렵부터 수사당국에 협조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지난해 봄, 그는 고교 졸업 25주년 동창회 참석차 미국에 입국하다가 체포됐다. 나중에 그는 올레니코프가 IRS의 과세를 피하려고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에 수억 달러를 은닉하는 행위에 자신도 공모한 혐의를 시인했다.
그는 징역형을 면하려고 수사당국에 협조해 왔다. 선고공판은 4월에 열린다. 그는 내부고발자로 낙인찍혀 스위스에 발을 붙이기도 어렵게 됐다. 만약 스위스에 입국했다가는 엄격한 은행비밀보호법 위반죄로 체포돼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할 가능성이 크다(그의 변호사들은 언급을 피했다). 미 수사당국은 비밀계좌를 보유한 미국인들의 은행 기록 일체를 제시하라는 내용의 소환장을 UBS에 발부했다.
형사소추를 피하려고 UBS는 미국 법을 위반했음을 인정했으며 7억8000만 달러의 합의금과 고객 250명의 금융거래 자료를 내놓았다. 그러나 UBS는 다른 수천 개의 비밀계좌 정보를 넘겨주는 행위는 스위스 법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UBS는 미국인 고객들에게 계좌를 폐쇄하고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통지했다.
스위스의 보수파 정치인들은 미국의 행위가 스위스 은행법과 주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성토했다. 스위스인들은 자국 은행의 고객 정보 비밀주의에 문화적 자긍심을 느끼는 만큼 이번 논란이 쉽게 가라앉기는 어려울 듯하다. 당분간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의 은행들은 미국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됐다.
2001년 이래 두 나라는 테러단체의 자금망을 추적하는 데 협조해 왔다. 세계경제가 침체되고 대중의 분노가 커가는 상황에서 스위스 은행들이 비밀주의 전통을 고수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듯하다. 2주 전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정부는 세금 관련 정보를 외국 정부와 더 많이 공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스위스 정부는 “스위스 은행의 고객 비밀 엄수 원칙은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올레니코프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체납 세금과 벌금으로 5200만 달러를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포브스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14억 달러의 재산가다. 세계적 갑부로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재력이다.
UBS 비밀 금고 들여다보니걖 최근 미국 상원의 조사로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의 영업 자료 일부가 밝혀졌다. 4만6000개 미국인 고객들이 보유한 비밀계좌 수. 180억 달러 이들 계좌에 들어 있는 금액 합계. 계좌 주인들은 여기서 나오는 소득의 세금을 탈루했다. 7억8000만 달러UBS가 형사소추를 피하려고 미국에 지불하기로 합의한 액수. 250명 UBS가 미 수사당국에 넘기겠다고 밝힌 은행 자료와 관련된 고객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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